출판사 리뷰
생활철학잡지 《뉴필로소퍼》 9호
_ “삶을 죽음에게 묻다”
“죽음의 두려움을 외면하기보다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삶’과 함께 ‘죽음’ 역시 철학의 오랜 주제였다. 예나 지금이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꿈꾸지 않는 잠과 같다”고 생각했고, 과학에도 해박했던 시인이자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인간에게 있어 태어나기 전의 시간과 죽은 후에 찾아올 영원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영화감독 우디 앨런은 “죽는 것이 두렵지는 않지만, 죽음이 일어나는 동안 그 자리에 있고 싶지는 않다”는 재치 있는 말로 죽음을 대하는 현대인들의 인식을 대변해 주기도 했다.
삶 곁에 늘 죽음이 있지만 그것을 인식하며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젊으면 젊은 대로 죽음은 먼 훗날의 일이며, 나이 들면 나이 든 대로 애써 그것을 외면하려고 한다. 찬란한 일상과 사랑하는 사람들, 이 모든 것에서 누릴 수 있는 삶의 행복을 놓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죽음을 외면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럼에도 그 두려움을 외면하기보다는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충만한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잔 보그 《뉴필로소퍼》 호주판 편집장은 강조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궁극적으로 모든 가능성, 즉 우리의 일상과 주변 사람들은 물론 삶의 진보와 행복을 놓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기인한다. 하지만 우리가 죽는다고 세상이 멈추지는 않는다. 우리 존재가 사라진 후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역사는 계속된다. 결국 우리는 두려움을 외면하기보다는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을 이기는 힘《뉴필로소퍼》 9호 ‘삶을 죽음에게 묻다’는 삶의 이면, 즉 삶과 등을 맞대고 있는 ‘죽음’에 주목한다. 사실 죽음은 인간 모두의 관심사이면서도 철저히 외면당할 때가 많다. 죽음 그 자체가 ‘두려운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가졌던 그 누구도 경험한 적 없고, 그래서 그것이 어떤 것이라고 남겨진 기록이 없기 때문에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100세 시대, 생명 연장의 꿈은 어쩌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인간의 최후 선택일지도 모른다.
철학자 팀 딘은 <죽음이라는 위대한 스승>에서 “우리에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게다가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면 삶의 공포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해서라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삶의 이면인 죽음의 가치를 역설한다.
“죽음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묻혀 있는 두려움과 욕망을 끄집어낼 수 있고, 가장 강렬한 열정과 공포를 드러낼 수 있다. 이로써 우리 존재의 바탕을 형성하는 관계들을 되돌아보고 다시금 삶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팀 딘은 성찰적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죽음을 이해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기술철학자 톰 챗필드는 죽음을 생각함에 있어 상상력이 철학보다 우월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그 상상력의 원천이 다름 아닌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상상해보자. 우리가 빠진 세상을, 그리고 우리가 결코 보지 못할 세상을. 우리에게 죽는 법을 더 잘 가르쳐주는 것은 철학보다 상상력이다. 그것은 철학자보다 시인이 더 잘할 수 있는 일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상상력이야말로 우리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고, 다른 사람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원하든 간에 아이들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그는 죽게 될 우리 모두가 사랑에 이끌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랑은 “배우고, 실천하여, 전해지는 것”으로 “서로를 사랑하도록 의무화”하는 것이 죽음을 함께 이기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물론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어떤 것도 충분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도 사랑이 우리가 가진 최초의 것이자 가장 나중의 것이다.”
죽음이 전시되는 세상《뉴필로소퍼》 9호의 죽음에 대한 관심은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이슈로 확대된다. 작가 티파니 젠킨스는 <죽음이 전시되는 세상>에서 죽음을 상업화하는 무분별한 행태를 강도 높게 비판한다. “TV와 신문, 인터넷 등 우리 주변에는 테러 집단에게 참수당한 구호운동가와 언론인, 보드룸 해안에 엎드려 있던 시리아 난민의 익사체 등 죽음에 관한 영상과 사진이 넘쳐난다.”
그에 따르면 죽음은 이제 일종의 행사처럼 바뀌었다. 실제든 허구든 죽음을 언론이나 예술로 표현한 결과물은 관음증을 유발하는 데 일조한다. 이런 현상은 죽음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이끌어내기보다 죽음을 하나의 ‘쇼’처럼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 종교의 사회적 기능이 쇠퇴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티파니 젠킨스는 “죽음을 전시하는 대신 유한한 삶이 일으키는 실존적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더 필요하다”며 죽음을 고찰하는 현대인의 사고와 방식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제기한다.
《뉴필로소퍼》 편집위원인 나이젤 워버튼은 선배 철학자의 사례를 들어 ‘조력 자살’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는 “앞으로 건강이 점점 악화되고 고통이 심해져 통제력을 잃게 되리라는 합리적 판단이 설 때는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조력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 모두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살 가망이 거의 없고 너무나 고통스럽고 쇠약해져서 차라리 죽는 게 나은 불치병 환자에게 조력 자살이 하나의 대안이 되어야 한다. 이런 죽음을 선택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므로, 우리는 그런 행동을 안타깝게 여기지 말고 존중해야 한다. 몽테뉴는 철학한다는 것은 어떻게 죽을지를 배우는 것이라고 썼다. 나는 이렇게 보태고 싶다. 철학한다는 것은 ‘언제’ 죽을지를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을 사는 것이 죽음을 가장 잘 준비하는 일이다”《뉴필로소퍼》 9호에는 두 사람의 인터뷰가 실린다. 2010년부터 죽음에 대해 탐구하는 ‘Dead and Alive Project’를 진행하고 있는 덴마크 사진작가 클라우스 보의 인터뷰 <삶과 죽음>은 죽음을 대하는 전 세계인들의 다양한 방식을 전해주는 독특한 지면이다. 육체적으로는 죽었지만 (며칠에서 몇 년 후) 매장되기까지 시신을 ‘아픈 사람’으로 대하며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인도네시아 토라자 부족 사람들의 생활 모습은 어찌 보면 충격적이지만 죽음이 늘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을 여실하게 증명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클라우스 보는 “삶의 자연스러운 결말이자 인생의 자연스러운 일부”라며 죽음을 긍정하는데, 세계 여러 민족의 독특한 장례 전통을 담은 그의 사진도 눈여겨볼 만하다.
수 블랙 랭커스터대학교 법의인류학 교수의 인터뷰 <오늘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재난 현장에서 만난 숱한 죽음과, 그 죽음에 대처하는 삶의 태도에 대해 다룬다. 숱한 죽음을 마주하면서 수 블랙이 깨달은 것은 ‘삶’에 대한 진정성이다. 그는 “죽음이란 삶이 마감될 때 일어나는 끔찍한 무엇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이 성취한 것들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생각하도록,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인터뷰어의 의견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지나치게 죽음에 집중하면 삶이 주는 유익 등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오늘밤에 죽는다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인생관을 바꾸면 삶은 충만해질 것이고,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에 후회도 훨씬 적을 것이다. 임종 자리에서 후회하는 일은 끔찍한 시간 낭비다. ‘일을 좀 더 많이 할 걸’ 하고 후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면, 지금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당신이 무엇을 후회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 지금 당장 그 일을 해야 한다. 하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우리 할머니가 늘 말씀하셨듯이, 관 안에 들어가면 시간이 남아돌지만, 지상에서의 시간은 너무나 짧다. 내일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정말로 충만하게 오늘을 살아야 한다.”
죽음은 삶의 이면이다. 어쩌면 삶이 죽음의 이면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은 진정 하나일 수밖에 없다. 세네카는 “어떻게 하면 오래 살 수 있을지 너무 많이 생각하는 사람은 평화롭게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죽음을 있는 대로 받아들이고, 삶에 집중하라는 조언일 것이다.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가장 잘 준비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것임을 기억할 때다.
수명 연장을 위한 모든 방법은 수명의 맨 끝부분을 연장하려고만 한다. 다들 80세에서 100세로 또는 100세에서 150세로 수명을 연장하자고만 이야기할 뿐, 신체적으로 정점에 있는 20대 시기나 지적으로 정점에 있는 40대, 즉 이른 시기를 연장하자고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10대 시절을 10년 정도 더 연장해 청소년들이 어떤 일탈을 더 하는지 지켜보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부모에게) 기쁨과 고통이 교차하는 유년기를 연장한다면 어떨까? 유년기를 10년 더 늘려서는 안 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생명 연장 논의에서 빠져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단순히 우리가 지구상에 머무는 연수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 시간의 질, 즉 주어진 시간에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 News from Nowhere _ 길고도 짧은 수명
영생이 곧 도래할 것이라고 말하는 종교인들이나 과학자들을 믿지 않을 생각이라면, 당신이 할 일은 삶의 유한함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를 통해 지금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는 철학적 사유의 한 갈래에 따르면, 삶의 유한함을 부정하는 것은 삶을 무의미하고 거짓되게 만든다. 영생이 썩 달갑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어차피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물러야 한다면 무언가를 포기하거나 선택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가치 있지만 힘든 일보다 가치 없이 재미있기만 한 일을 자꾸만 반복하게 되고, 무엇을 하든 온 마음을 다해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 인생은 너무 짧다 _ 올리버 버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