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후농 김상현(後農 金相賢, 1935.12.6.~2018.4.18.) 전라남도 장성군 출신으로 6선(제6, 7, 8, 14, 15, 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가난한 농촌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신문 배달과 껌팔이 등으로 동생들을 보살피며 야간학교를 졸업했다. 일찍이 정치를 꿈꾸어 웅변 연습 등에 매진하던 중 청년 김대중을 만나 평생의 동지가 되었다.
1965년, 서울 서대문갑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제6대 국회에 입성한 후, 김대중 의원의 핵심참모로 1970년 김대중을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만들었다. 비록 김대중이 간발의 차이로 박정희에게 패배했으나, 이후의 역사는 김대중을 세계적 인물, 민족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니, 이는 김상현의 기민한 전략과 직관이 큰 역할을 했다.
김대중과 김상현은 1972년 박정희의 '10월 유신'과 1980년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감옥에 가고, 국외로 망명하고, 장기간 자택에 연금되어 피선거권을 박탈당하는 등 두 사람 모두 오래도록 야인 생활을 해야 했다.
1983년, 김상현은 미국에 체류 중인 김대중을 대신하여 김영삼을 설득,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조직하고, 1984년 선명 야당 신민당을 창당하여 2.12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1987년 6월항쟁의 승리는 제도권 야당의 재야의 투쟁에 합류한 것이 결정적이었으니, 민추협 출범, 선명 야당 창당과 총선 승리, 6월 민주항쟁의 승리 모두 김상현의 직관에 크게 힘입었다.
『풍운의 정치인, 김상현을 읽다』 해설
풍운의 정치인 _ 김상현김상현은 50여 년의 정치 이력을 갖고 있지만, 상당 기간을 박정희 군사정권과 전두환 독재정권 아래서 감옥에 갇히고 연금되는 등 강제로 정치 활동을 금지당한 정치인이었다. 필자들이 감히 이 책의 제목을 '풍운의 정치인, 김상현을 읽다'라 하고, 부제를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린 을(乙)의 정치학'이라 한 것은, 그러한 수식(修飾)이 그의 정치 인생을 포괄하는데 가장 가까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책을 쓰면서 필자들의 가슴을 가장 뜨겁게 달군 부분은 그의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휴머니즘이었다. 요즘같이 정치가 극단적 대립과 증오, 독설과 편견으로 가득한 시대에 그의 정치적 삶은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생전에 김상현은 자신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한 사람에게조차 “나를 두드려 팬 놈들이 사람이 좋아서 이 정도지, 나쁜 놈들이었으면 뼈가 모두 부러졌지, 멍만 들었겠는가?” 하며 허허 웃었다고 한다.
또 “정치를 하다 보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패 죽일 놈들이 많은데, 내가 마음이 편해져야 적이 최소화되고, 그래야 나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이 많아지고 내 편이 넓어져서 내가 정치를 잘할 수 있다. 그래서 가능하면 이해하고 양해하고 용서하는 게 육체적·정신적 건강을 위해서도 좋다”고 주장하며 이를 그대로 실천했다.
한계를 극복한 정치인 _ 김상현김상현은 고매한 인품과 높은 지성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엄청난 카리스마를 내뿜는 지도자상(像)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는 자신을 '양아치'라고 스스럼없이 표현하기도 할 정도였는데, 노동부 장관을 지낸 남재희는 그를 일컬어 '잡놈성(性) 거물'이라고 했다. 그는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장삼이사들과도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김상현은 화려하고 장엄한 무대의 주인공이 아니었기에 '승자'로 추존되지는 않는다. 그래서인지 그의 업적과 활동은 기본적인 사실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를 전적으로 '패자'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그의 삶과 생각, 정치적 업적은 '승자'에 비견할 수 없을 정도의 평가받을 만한 것들이 많다.
이 책은, 바로 높게 평가받아야 하는, 그러나 묻혀 버린 김상현의 정치적 업적과 활동을 발굴하고 조명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김상현이라는 정치인의 업적과 활동을 기록한 전기(傳記)이되, 이를 해석·평가하여 서술하는 평전(critical biography)의 성격을 갖는다.
이 평전의 집필 원칙은, 절대로 김상현을 분식하고 미화하는 '기념사업' 차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곧 “사건을 기록하는 기사(記事), 직분을 바로잡는 정명(正名), 칭찬과 비난을 엄격히 하는 포폄(褒貶)의 원칙을 세워, 여기에 어긋나는 것은 철저히 배격하고 오직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여 자신의 판단에 따라 집필”해야 한다는 공자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을 따르자는 것이었다.
마당발 정치인 _ 김상현그런 만큼 이 책은 김상현의 업적과 활동만이 아니라, 그의 일생을 관통하였던 심리적 콤플렉스, 윤리·도덕적 일탈, 인간적 한계, 정치적 전략과 전술의 오류도 가감 없이 드러내려 하였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는 유족을 포함하여 그를 따르고 좋아했던 분들에게 다소 불편한 감정을 갖게 할 부분도 있다.
이 평전은 우리 정치사를 풍부하게 할 사료적 가치가 충분하게 들어 있다. 공식적인 기록과 연구를 통해 밝혀지지 않았던 한국 정치사의 전경이 이 평전의 군데군데서 드러난다. 특히 야당 정치의 풍경, 김대중·김영삼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모습들도 복원 소환한다. 1971년 신민당 전당대회 경선과 대통령선거의 풍경들, 1984년 전두환 독재정권 하에서의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과 2.12총선을 둘러싼 뒷얘기도 공개된다.
이 책은 이를 위해 주요 관련 생존 인물들의 인터뷰를 2년여에 걸쳐 수행하였다. 물론 그들의 증언을 곧이곧대로 수용하지는 않았고, 객관적 문헌 자료들과 여러 관련자의 증언을 교차 검증하여 신빙성과 타당성이 있는 소재들을 추려내 평전의 고갱이로 삼았다.
또한, 이 평전은 김상현의 정치적 삶에 얽힌 에피소드들도 많이 발굴하여 담았다. 이 일화들은 그의 휴머니즘이 듬뿍 묻어나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이다. 정치가 살벌하고 무미건조한 이익 계산의 공학으로 전락해 버린 오늘의 현실에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 주리라 믿는다. 특히 정치를 알고 싶거나 정치가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이 평전을 권한다. 김상현은 어린 꿈나무들에 대해서도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 최불암 등과 함께 한 천안 소년교도소 공연의 일화도 이 책에 소개되지만, 그가 청소년들에게 보인 애정은 남다른 것이었다.
각 챕터별 내용 요약
01_ 어린 시절
02_ 정치를 꿈꾸다
03_ 결혼 : 평생 동지를 만나다13살 때 아버지 사망, 한국전쟁의 초기 장남인 형 행방불명, 이어 어머니마저 빨치산에게 밥을 해주었다는 이유로 군경에 총살되자 16살의 나이에 가장이 되어 신문팔이, 구두닦이 등으로 동생들을 보살피는 한편,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만나 웅변 연습을 하는 등 정치가의 꿈을 키웠다. 그즈음 그의 영원한 '형님'이자 멘토 김대중을 만났고, 집요한 노력 끝에 부잣집 고명딸과의 결혼에도 성공하였다.
04_ 국회 입성
05_ 당찬 초선의원1965년 민중당 공천으로 서울 서대문갑구 보궐선거에 출마, 세간의 예측을 꺾고 29세 약관에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국회에 입성하기 위해서 다양한 전략을 연구하고 폭넓은 인간관계를 구축했으나, 당선 후 자신의 한계와 능력 부족을 절감, 많은 전문가와 교유하여 배우고 스스로 연구 노력하였던바, 이는 50여 년 후 정계에서 은퇴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햇병아리 초선의원으로서 대통령 박정희에게 면담 신청을 하여,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피력해 항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06_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07_ 3선 중진의원 : 더 넓은 정치의 바다로박정희는 제7대 대통령선거 출마를 위해 3선개헌을 감행했다. 야당인 신민당에서는 40대의 김영삼, 이철승이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야당의 소수파 비주류인 데다가 계파 국회의원이 달랑 김상현 한 명뿐인 김대중은 출마는 언감생심 꿈조차 꾸지 못했다. 김상현은 주저하는 김대중을 설득하여 대선 출마를 선언하게 하고, 기기묘묘한 전략으로 김영삼을 꺾고 경선에서 승리했다. 김대중은 71년 대선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 관권, 부정 불법 선거로 패배했지만, 이후 정치인을 넘어 민족의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08_ 유신선포 : 암흑의 시대를 열다
09_ 박정희의 죽음과 유신체제의 붕괴
10_ 전두환의 등장 : 더 쎈 놈이 왔다!
11_ 광주민주항쟁 : 민주주의에 바친 거룩한 피1972년 10월 박정희 유신 독재정권이 출범하고, 1979년 10월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숨짐으로써 유신체제는 무너졌지만, 1980년 수천 광주시민을 살살하고 등장한 전두환 군사독재로 김대중과 김상현은 줄곧 좌절과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두 사람 모두 연행, 구속, 고문, 추방, 가택연금으로 일관하여 공민권은 물론 시민적 권리조차 누리지 못했다. 평전은 그 고난과 극복의 이야기를 세세히 전한다.
12_ 민추협 : 김상현이 가장 빛나던 시절
13_ 2.12 총선 : 민중의 잠을 깨우다
14_ 김대중과 민한당 문제김상현의 정치 역정에서 가장 빛난 시절은, 공민권 박탈로 '정치'라는 이름으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을 때였다. 1980년대의 대한민국은 '동토의 왕국'이었다. 대학가와 재야는 줄기차게 반독재 투쟁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관제 야당은 전두환의 학정과 국민의 고통에 무기력할 뿐이었다. 김상현은 구 정치인들을 추동하여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 '정치투쟁'을 가동하는 한편, 1984년 총선을 맞아 재빠르게 신당을 창당,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켜 전두환 체제를 단숨에 흔들었다. 1987년 6월의 민주항쟁에서 야당의 역할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김상현의 그 기민한 판단력과 활동이 소설처럼 펼쳐진다.
15_ 만년 2인자 : 그 빛과 그림자
16_ 6월 민주항쟁 : 환희와 분열과 좌절1984년의 총선이 선명 야당의 대약진으로 귀결되자, 이후 정치판은 김대중과 김영삼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김대중이 미국에 망명해 있는 동안 그를 대신했던 김상현은 설 곳을 잃어버렸다. 1987년 6월항쟁이 민중의 승리로 끝나자 김대중과 김영삼은 차기 대통령 자리를 놓고 분열했다. 김상현은 어떻게든 두 사람의 분열을 막아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고, 명분을 찾아 통일민주당에 잔류했으나 김영삼 진영에 참여하는 모양세가 되었다. 그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동교동계의 '배신자 프레임'은 결국 김상현을 다시 형극의 길을 몰아넣었다.
17_ 다시 김대중 앞으로
18_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19_ 정치를 놓다
20_ 김상현, 황혼에 지다1997년 김대중은 천신만고 끝에 대통령이 되었다. 1971년 8대 대통령선거 이래 절치부심했던 김대중,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정치 인생 모두를 바쳤던 김상현 두 사람 모구목표를 이루었으나 그 환호의 잔치에 김상현의 자리는 없었다. 이후 애써 '킹 메이커'로 분식하며 자신의 정치력을 복원, 지속해 보려 했지만, 그가 형극의 길을 걷는 사이 그를 둘러싼 정치 환경은 이미 변해 있었다. 대한민국 정치사의 기린아 김상현도 그렇게 자기 시대를 마감하였다.
P25~ P26
김상현은 정치를 너무도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정치가 자신의 존재성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그는 생전에 “얻은 것만 있지 잃은 건 없습니다. 정치는 내 생활이기 때문이지요. 이 지상에서 떠날 때까지 정치할 겁니다. 감옥에 있을 때도 정치를 의식하지 않은 일이 없었고, 모든 사물을 정치적 감각으로 파악합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정치를 위해 자신을 즐겁게 던질 수 있었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었다. 그는 정치를 위해 자신이 가진 재능을 모두 썼고, 정치를 통하여 사회와 역사발전에 기여했다.
보통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된 정치의 모습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당위론이다. 하지만 김상현에게 정치란 선과 악이 서로 섞이고 소통하면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영역이었다. 그는 세속적인 인물 유형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점과 함께 평범한 사람들이 지닌 약점과 한계를 모두 갖고 있다. 그는 항상 사람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고 조정하는 방식으로 일했다.
- 「프롤로그」 중에서
그러나 우리는 김상현의 삶을 통해 다른 유형의 리더십이 수행한 한 국 민주화 과정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그의 리더십은 특히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세력 간의 중재를 위한 거래 협상 능력에서 돋보였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대회는 말할 것도 없고, 1980년대 전반기의 민추협 결성과정에서 서로 불신이 팽배한 김대중계와 김영삼계를 접합시키는 중재의 기술이라든지, 신민당 창당 과정에서 민추협과 비민 추협 세력 간의 반독재 연합전선을 이루어내는 과정은 주로 김상현에게 크게 빚진 것이었고, 이는 김대중·김영삼의 리더십만으로는 이루기 힘 든 결과물이었다.
결국, 그 국면에서 상반된 두 유형의 리더십이 서로 보완적 협력과 상 호작용을 통해서 민주화를 진전시켜 왔음이 명명백백했던 바, 우리는 이러한 발견이 대단히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김상현은 김대중계의 '불안정한 2인자'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그가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거대한 정치판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자질과 역량이 시 대적 요구에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 「에필로그」 중에서
작가 소개
지은이 : 김학민
연세대 재학시절 반 유신 학생운동에 투신한 이래 지금까지 민주화와 문화예술, 인문사회과학 출판에 천착해 왔다. 예원예술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장과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했고, 교육부 산하 한국사학진흥재단, 경기도 산하 경기문화재단 이사장을 거쳐 현재는 경기아트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재야 및 야당 지도자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각종 발언, 대담, 연설을 정리하여 『정책과 선택』(1987), 『1980년의 진실』(1988), 『평화를 위하여』(1989), 『민족의 내일을 생각하며』(1990), 『그래도 역사는 전진한다』(1991), 『공화국 연합제』(1991) 등 단행본으로 묶어 낸 바 있으며, 저서로, 문집 『564세대를 위한 변명』(1999), 청소년 독서 지침서 『길을 찾는 책 읽기 : 청소년에게 권하는 100권의 책』(2004), 먹을거리 문제를 사회문화적으로 다룬 음식 칼럼 집 『맛에 끌리고 사람에 취하다』(2004), 술 칼럼집 『태초에 술이 있었네』(2012), 북한의 밀사 황태성의 삶과 죽음을 파헤친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2015, 공저),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사건을 다룬 『만들어진 간첩』(2017), 서울의 술과 음주문화 소개서 『서울의 술』(2021) 등이 있다.
지은이 : 고원
사회와 정치 현실의 한복판에서 실천하는 정치학자의 삶을 살아왔다. 종종 시대 비평을 담은 글을 언론 지면에 발표했고, 현실 정치에서 변화가 요구될 때마다 정치 담론의 기획자로 활동했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서울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국제경제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대학 시절부터 10여 년 이상 민주화 운동과 사회운동에 헌신했다. 국회에서 몇 년간 일했고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노무현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 내가꿈꾸는나라 정책위원장 등 정치와 시민운동을 넘나들며 여러 대외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현실 정치에 관여하며 ‘가치정치’, ‘연합정치’, ‘혁신’ 등 정치 담론의 생산을 주도했다. 보수 진영에 유리하게 편재된 정치 구조를 뜻하는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 담론을 수년간 비판하며 2017년 체제 전환기의 도래와 그 준비를 역설해왔다. 최근에는 정치권에 진출해 세상을 바꾸는 지렛대를 구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맹자, 마키아벨리, 정약용, 그람시 등 세상을 바꾸려다 좌절했지만 가치 있는 족적을 남긴 사람들처럼, ‘정치는 가치’라는 평소 자신의 신념이 사회에 실현되도록 앞으로도 계속 열정을 갖고 노력하며 살아가려 한다. 『대한민국 정의론』(2012), 『한국의 경제개혁과 국가』(2005) 등 저서와 다수의 공저, 학술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