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전쟁은 책을 만들고 책은 전쟁을 만든다?
전쟁과 독서. 총과 책. 그 유구한 공모의 역사아르테 출판사 ‘필로스 시리즈’ 42번째 책. 전쟁 수행에 필수적 요소이자 전쟁의 ‘적극적 행위자’로서 책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한다.
책에 관한 낭만적 통념을 넘어, 전시의 책이 군사 전략의 보고이자 사상 전쟁의 무기로서, 주요 군수품이자 대중 동원의 도구로서 활약했음을 보인다. 이를 통해 책과 전쟁이 결코 피해-가해의 단순한 구도로 환원될 수 없음을 밝히고, 문자 문화가 전략·정보·병참·선전 등 전쟁의 전 과정에 다층적으로 개입해 왔음을 드러낸다.
소녀의 일기 같은 사적 기록에서부터 대중 소책자와 잡지, 선전용 전단(삐라)과 포스터, 군사 기밀 문서에 이르기까지 전시에 쓰이고 읽힌 방대한 텍스트를 추적하며, 사회의 여러 층위에서 책과 전쟁이 맺어 온 복잡한 공모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복원한다.
책과 전쟁이라는 장엄한 두 세계를 아우르며 문자 문화의 심층을 새롭게 비추는 현대 인문학의 역작.
“책이란 본질적으로 평화로운 것이며
전쟁의 비극적 희생물이기 쉽다는 가정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다.”
사상 전쟁의 무기이자 이데올로기의 온상,
군사 전략의 보고이자 대중 검열의 도구,
전쟁을 견디게 한 군수품이자 포로수용소의 필수품……
우리가 미처 몰랐던 방식으로 세계 전쟁사에 관여해 온 책에 관한 뜻밖의 기록영국 세인트앤드루스대학교의 역사학자 앤드루 페테그리(Andrew Pettegree)의 『전쟁과 책(The Book at War)』이 아르테 출판사의 ‘필로스 시리즈’ 42번째 도서로 출간되었다. 출판·미디어 문화사 분야의 세계적 대가인 저자는 책을 전쟁의 선량한 피해자이자 문명의 보루로 바라보는 오래된 통념을 뒤집는다. 책은 군사 전략의 보고이자 선전의 무기, 병사와 민간인을 지탱한 필수 군수품으로서, 전략·정보·병참·심리전의 모든 영역에서 ‘적극적 행위자’로 기능해 왔다는 것이다. 『전쟁과 책』은 책이 전쟁의 피해자인 동시에 그 역사를 움직인 주체였다는 역설을 통해, 전쟁과 책이 맺어 온 복잡한 공모의 역사를 새롭게 드러낸다.
***
책의 역사에서 전쟁은 늘 악역으로 묘사된다. 책을 불태우고 지식을 말살하며 문명을 파괴하는 야만. 우리는 책을 지성과 평화의 상징으로, 폭력의 선량한 희생자로,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끝끝내 살아남은 문명의 보루로 재현해 왔다. 그러나 영국 세인트앤드루스대학교의 역사학자 앤드루 페테그리는 신작 『전쟁과 책』에서 이 오랜 통념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책은 전쟁의 무고한 희생자가 아니라, 전쟁을 만들고 개입한 ‘적극적 행위자’였다는 것.
전쟁의 역사에서 책은 전략과 정보, 선전과 심리, 병참과 대중 동원의 영역을 넘나들며 다층적으로 활약했다. 지도책, 과학서, 군사 전략서, 첩보 문건은 전투의 방향을 결정했고, 정부가 보급한 각종 읽을거리는 병사와 시민 들의 애국심을 북돋우며 적국에 대한 증오를 부추겼다. 특히 전쟁의 양상이 전술전과 정보전, 과학전으로 진화한 20세기에 책은 전쟁의 핵심 동력이 되었다. 도서관은 작전 수행의 주요 거점으로 활약하며 “폭격을 받아 마땅한 표적”이 되었고, 출판 산업은 국가 동원의 체계를 뒷받침했다. 독서율이 높고 출판이 활발하며 도서관이 잘 갖추어진 나라들이 20세기 주요 전쟁의 중심에 섰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마오쩌둥이 젊은 시절 사서였고, 스탈린이 문인이었으며, 히틀러가 열렬한 애서가였다는 사실은 그 상징적 단면이다.
『전쟁과 책』은 전쟁의 모든 측면에서 다층적으로 활약한 책의 역사를 촘촘히 추적한다.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사상의 무기’로서의 책(1부), 정보전과 전략 수행의 핵심 ‘군수품’으로서의 책(2부), 검열과 통제 속 전시 시민의 일상을 지탱한 ‘위안품’으로서의 책(3부), 전선과 포로수용소에서 군인들을 위로한 주요 ‘보급품’으로서의 책(4부), 전시의 주요 ‘폭격과 약탈의 대상’이자 동시에 ‘수호의 대상’이 된 책(5부), 전후 이데올로기 경쟁 속에서 재건되고 다시 통제된 ‘냉전의 도구’로서의 책(6부). 여섯 부에 걸쳐 펼쳐지는 서사는 책과 전쟁이 맺어 온 입체적인 공모의 관계를 생생히 드러낸다.
책이 전쟁의 심층 구조에 스며든 방식을 밝히기 위해 ‘책’의 범위를 문자 문화 전반으로 확장한 점 역시『전쟁과 책』의 차별점이다. 페테그리는 소녀의 일기 같은 사적 기록물부터 당대 대중이 열광한 소책자와 잡지, 전단(삐라)과 포스터 같은 선전물, 기술과 과학 논문, 군사 기밀 문서에 이르기까지 전시에 쓰이고 읽힌 다양한 텍스트를 추적한다. 그가 포착한 것은 전쟁의 구조 속에서 책과 총, 지성과 폭력, 문명과 파괴가 맞물려 작동하는 복잡한 공모의 역사다. 글은 무기이자 논거였고, 파괴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평화를 설파하는 수단이었다.
이로써『전쟁과 책』은 책을 선량한 피해자로 그려 온 낭만적 신화를 걷어 내고, 폭력에 결탁해 온 문자 문화의 모순과 이중성을 응시하게 한다. 동시에 그 모든 모순 속에서도, 책이 인간 문명을 지탱해 온 지적 토대였음을 다시금 일깨운다. “전쟁”과 “책”이라는 두 장엄한 주제를 풍부한 통찰과 유려한 문체로 엮어 낸 이 책은, 문자 문화의 심층을 새롭게 조명하는 현대 인문학의 역작이다. 여기에 전시 출판물과 선전물, 기록 사진 등 사료적 가치가 높은 도판 90여 컷을 수록해, 시각적 체험과 역사적 현장감을 더하며 독서의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책은 사상의 전쟁을 위한 무기다”
정보전과 이념전의 열쇠가 된 책
무기화된 사상과 지식의 원천“교전 중인 나라들은 책, 팸플릿, 과학 정기간행물, 잡지, 신문, 전단, 대형 게시물 등 모든 종류의 인쇄물을 남김없이 동원했다. (...) 인쇄물이 없다는 것은 권력이 붕괴했음을 뜻했다. 1945년 4월 폐허가 된 베를린에서 살아남은 시민들은 ‘히틀러’와 ‘괴벨스’라는 서명이 깔끔하게 손으로 쓰인 벽보 두 장과 대면했다. 벽보는 명령에 불복하면 처벌하겠다고 협박했지만 아무도 겁먹지 않았다. 인쇄기가 아닌 손으로 쓴 벽보는 권위를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고 애처롭고 어처구니없어 보이기만 했다.” - 『전쟁과 책』 본문 11쪽
책은 총력전의 필수 조건인 이데올로기의 확산 수단으로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 ‘작은 빨간 책’이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마오쩌둥의 어록 등이 보여 주듯, 국가 지도자들은 애국심과 적개심을 조율해 국민의 사고와 감정을 동원하기 위해 책을 활용했다. 그 밑바탕에는 하나의 신념이 있었다. 글이 국가의 명운을 결정할 수 있다는 신념. 사상을 무기화하려는 시도는 선동의 차원을 넘어 현대전의 새로운 형태로 발전했다. 적국의 하늘에서 쏟아진 선전 팸플릿, 병사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전단과 잡지는 문자 그대로 심리전의 화약고였다.
또한 전시의 책은 기술 및 과학 지식을 실질적으로 축적하고 발전시키는 데 가장 핵심적인 동력이기도 했다. 지극히 실용적인 목적으로 생산된 기술 서적, 과학 논문, 매뉴얼 등은 신형 무기와 훈련 체계 개발의 토대가 되었다. 각국은 학자와 사서, 심지어 스파이까지 동원해 적국의 기술이 담긴 책을 수집하고 해독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저자는 특히 제2차세계대전에 집중하며, 연합국과 추축국 모두가 이런 인쇄물을 어떻게 전략적으로 활용해 전쟁의 향방을 바꿨는지 생생하게 재구성한다.
무엇보다 책은 군사적 결정을 내리고 외교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각국 지도자들은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책에서 찾아냈다. 예컨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노르웨이 해안을 점령한 독일군을 몰아내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며, 가장 중요한 참고 자료로 다름 아닌 관광객을 위한 여행 안내서를 선택했다. 이 사례는 군사적 목적에서 타국의 지리 정보를 수집하고 축적하는 연구가 미흡하던 시기, 책이 단순한 여흥거리가 아니라 실제 전황을 뒤집는 전략적·지적 자원으로 기능했음을 보여 준다. 각국의 외교 정책과 군사 작전을 좌우한 핵심 수단이 곧 책이었던 것이다.
“군인에게 책을 공급하라!”
전장과 후방을 잇는 정신적 보루이자 희망
전쟁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은 ‘읽는 인간’의 존재전쟁터에서 책은 병사들을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지켜 주는 방어막이자, 절망 속에서 인간성을 되찾게 하는 위안의 원천이었다. 『전쟁과 책』은 총알이 빗발치는 참호 속에서도 책을 손에 쥔 병사들의 수많은 기록을 소환한다. 그들이 읽은 책은 고전부터 자극적인 대중 연재소설, 모험담과 시집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책은 병사들로 하여금 잠시나마 전장의 잔혹함과 공포를 잊게 하고, 전쟁 이전의 삶과 기억을 되살리게 했다. 책은 적군의 총칼과 대포를 물리적으로 막아 내는 보호막만큼이나 심리적 방어막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병사들에게 책을 공급하는 일은 곧 중요한 임무가 되었다.
후방의 민간인과 포로 들에게도 책과 도서관은 귀중한 피난처였다. 폭격으로 일상이 쑥대밭으로 변해 버린 가운데 책은 심신이 지친 이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제공하고 문화와 문명의 기록을 보존할 수 있게 해 줬다. 『전쟁과 책』은 특히 포로수용소의 독서 풍경을 세밀히 그려 낸다. 수감자들은 감시 아래에서도 독서와 교육을 이어 가며 무너져 가는 자신과 타인의 존엄을 붙잡았다. “포로수용소보다 책이 더 귀한 대접을 받는 곳은 없었다.”(429쪽) 그들의 독서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지탱하는 마지막 행위였다.
한편 『전쟁과 책』은 책이나 인쇄물에 국한하지 않고, ‘글’ 자체를 탐구 대상으로 확장한다. 일기 같은 사적 기록에서부터 여행서, 과학 논문에 이르기까지 전쟁과 관련된 거의 모든 문헌에 주목한다. 이러한 포괄적 접근은 전시의 독서가 군인과 민간인, 지도자와 시민을 아우르며 얼마나 깊고 넓은 의미를 지녔는지를 보여 준다. 폭력과 파괴의 시대에도 결코 꺼지지 않은 ‘읽는 인간’의 힘을 복원하며, 독자들에게는 전쟁의 한복판에서도 꿋꿋이 피어난 인간적 독서의 진면목을 생생히 일깨운다.
책은 언제나 다시 시작하려는 인간이 손에 쥔 첫 번째 도구였다
책과 도서관을 향한 전쟁의 무자비한 폭격
그럼에도 재건된 독서 문화의 생명력“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책과 도서관에 대한 전쟁이 아무리 가차 없었다 할지라도 인쇄 기술 발달로 역사의 매 순간 책은 파괴되는 양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출판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전쟁의 경제에서 유래가 없는 일이다.” - 『전쟁과 책』 본문 596쪽
『전쟁과 책』은 영국과 독일의 개인 서재에서 소실된 장서의 규모를 구체적인 수치로 추정하며, 전쟁이 초래한 문화적 파괴의 규모와 실체를 생생하게 드러내지만, 결코 파괴의 기록에서 멈추지 않는다. “불로 책을 없앨 수 없다”라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말처럼, 책은 변함없이 생동하는 매체로서 지속되리라는 굳건한 믿음을 내비친다. 값이 싸고 튼튼하며 복제가 용이한 책은 다른 매체가 무너진 자리에서도 지식과 문화를 지탱해 왔다. 세계대전의 광풍 속 분서갱유 같은 극심한 탄압에도 살아남아 저항의 상징으로 거듭난 책의 역사는, 그 자체로 인간 문명의 회복력을 증언한다.
이 회복력은 전쟁 이후 재건의 역사로 이어진다. 『전쟁과 책』은 약탈, 파괴, 검열의 암울한 역사를 넘어, 책이 평화를 위한 무기로 재탄생한 순간들을 포착한다. 종전 이후 무너진 도서관과 출판사를 복원하고, 대규모 독서 캠페인을 전개해 지식과 문화를 되살리려 했던 움직임들은 책이 단순한 기록물을 넘어 문명을 재건하는 토양이었음을 보여 준다. 『전쟁과 책』은 그 생생한 복원의 역사를 통해, 책이야말로 인류가 가장 어두운 시대마다 다시 손에 쥔 유일한 희망이었음을 되새기게 한다. 군사화한 국가, 무기화한 지식의 세계에서 이 점만큼 우리를 위안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책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책과 문예적 전통이 사람을 가르치고 계몽하며 역사의 진보라는 대의를 뒷받침하며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나치는 폴란드의 유대인 도서관들을 불태워 그들의 문화적 유산을 깡그리 지워 버리려 했고 실제로 대체 불가능한 책 다수를 앗아 갔다. 문예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책에 대한 이 고의적인 모욕이 책을 존중했던 독일인들에 의해 자행됐다는 사실에 가슴 깊이 상처를 입었다. 이 책은 이런 잔혹 행위를 인식하고 되새기려 한다. 그러나 또한 이 책은 도서관을 폭격하고 책을 훼손한 일이 늘 비극이기만 했는지도 질문하려 한다.
이데올로기 전쟁은 언어의 힘에 정치 생명을 걸었던 지도자들에 의해 벌어지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