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애들아, 아버지 먼저 출발하셨다
- 고향 찾아 4천 리 길, 8·15의 기억두 아들과 딸 그리고 젖먹이 막내딸을 등에 업은 순옥이는 칭얼대는 아이들을 달래었다. 만주 땅 중앙에 있는 하얼빈시에서 사는 동안 2차 대전이 갑자기 끝났다. 1945년에 미국의 원자탄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며 8월 15일에 일본은 항복하고 말았다.
우리 가족은 전남 순천 고향길을 재촉하였다. 애들 아버지 최갑수는 단둥시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먼저 떠났다. 애들 엄마 순옥이는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이웃집에 팔고 금 조각들을 사서 아이들의 외투 속에 감추어 꿰매었다.
두 아들은 앞에 걷고 딸의 손을 잡고 어머니의 등에 업은 두 살배기 딸, 다섯 사람은 열차에 올라 단둥으로 떠났다. 만주에 살던 모든 한국 사람은 한국의 신의주를 향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단둥역 앞에 광장에서 아버지와 재회하였다.
압록강은 소련군이 국경을 봉쇄하고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갑수는 압록강 건너는 나룻배를 찾아서 교섭하였다. 안개 낀 새벽 어두움 속에 여섯 식구는 나룻배 바닥에 엎드리고 천막을 위에 덮었다. 짐을 실어 나르는 모습으로 위장하였다. 배가 강 중앙에 이를 무렵 소련군의 따발총 소리와 장총 소리가 딱콩딱콩 들리기 시작하였다. 총알이 머리 위로 지나는 소리, 총알이 물에 튀는 소리가 빈번했다. 갑수와 순옥이는 가끔 하늘을 올려보며 기도만 하고 있었다. 배가 신의주에 접근하며 총소리는 잠잠해졌다. 삼엄한 국경선을 넘어 신의주 여관에 들어 여섯 식구는 드디어 안심하는 듯했다.
다음날 가족은 기차에 몸을 싣고 평양을 향해 움직였다. 평양역 광장은 조용했다. 부근에 학교 광장이 있고 다음날 아침 소련군과 북한군 사이에 축구 시합을 개최하고 있었다. 가족이 여관에 머무는 동안에 용성, 용완, 신자는 축구 구경을 하러갔다. 소련군과 북한군 사이에 경합이었다. 응원하는 열기 중에 누군가 신자를 넘어지게 하고 신자는 소리 내어 울었다. 어디선가 소련 헌병이 달려와서 신자를 울린 북한 청년의 뺨을 때렸다. 용완이는 한국 사람을 함부로 다루는 소련군에 화가 났고 소리지르며 대들고 싶었지만 어린 나이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가족은 개성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발을 디딜 곳 없는 초만원이었고 기차 꼭대기 위에도 사람들이 올라앉아 있었다. 열차가 달리는 중에 누군가 하얀 보자기를 창밖으로 던졌고 아기 엄마의 외쳐 우는 소리가 들렸다.
죽은 아기를 안고 울기만 하는 모습을 보다 못해 사람들이 죽은 아기를 빼앗아 창밖으로 버린 일이었다. 기차는 혼신을 다해서 남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기차는 가던 길에서 멈춰 섰다. 철길이 끊겨 있었다. 그곳에서 개성까지는 며칠을 걸어야 했다. 아버지는 다시 큰 짐을 등에 메고 형과 나는 외투를 입고 앞을 걸었고 어머니는 딸의 손을 잡고 젖먹이를 등에 업고 뒤를 따랐다. 하루 종일 걷고 해가 지면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밤을 새웠다. 하루 종일 걷고 다음날 다시 걷기를 거듭했다.
개성에 도착한 즉시 가족은 삼팔선을 넘는 길을 물어 찾아갔다. 개성 남쪽으로 흐르는 임진강이 남과 북을 나누는 경계선이었다. 우리 일행은 인민군 경비군에 체포되었다. 부모님은 우리 일행을 다시 돌려보내는 트럭에 태울까봐 걱정스런 눈빛이었다. 구치소에서 하룻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어머니는 가족과 고향 찾아가는 난민임을 이야기하고 경비군 장교에게 어머니 손가락에 금반지를 빼주는 듯했다. 장교는 우리 가족을 인솔하고 골짜기를 내려갔다. 계곡에 강을 건너는 다리를 가리키며 잘 가라는 손짓을 하고 떠났다. 계곡의 다리 건너편에 남조선 경비병들이 보였다. 일행은 조심스럽게 다리를 걸어 넘었다. 한국군과 미군이 섞인 경비대는 우리를 반기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하얀 방역가루(DDT)를 뿌려서 우리 가족은 모두 눈사람이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눈사람이 된 채 처음으로 웃어 보였다.
만주에 살던 때 순천에 사시는 할아버지(최양섭)가 다녀가셨다. 할아버지는 개성에서 우리 가족이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경비군의 연락으로 할아버지와 다시 만났다. 열차는 개성에서 서울까지 그리고 순천까지 우리 가족을 무사히 옮겨 주었다. 하지만 8월 중순에 만주에서 떠나 2달 후에 고향 순천에 도착했을 때 두 살배기 막내는 엄마 등에서 영양실조로 고생 끝에 숨을 거두었다. 기쁨과 슬픔이 겹친 귀향길을 마치었다.
순천 할아버지 댁은 큰길 위에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지은 큰집이었다. 계단을 올라 정원에 들면 감나무가 있고 현관은 현대식으로 지었다. 할아버지가 젊으셨을 때 일본을 오가며 순천에서 처음으로 백화점을 차려서 운영할 때 지은 집이다.
용완이는 이곳 할아버지 댁에서 출생하였고 자라는 동안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용완이가 서울대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건축사무실을 운영하는 때까지 어려서 본 할아버지가 사업하는 모습을 자주 기억했다.
길 건너에는 순천의 갑부 성씨의 저택이 있었다. 순천의 가을 하늘은 맑고 여수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우리가 어렸을 때 추억을 돌려주었기에 고향은 평안하고 아름다웠다. 갑수와 순옥은 광주로 이사하여 아이들 학교(서석 초등학교) 옆 서석동에 무등산을 바라보는 경관을 갖춘 새집을 지었다. 철봉대를 세워 아이들이 운동할 수 있도록 했다.
1945년 세계 2차 대전을 마칠 무렵에 이집트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나누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의 주도권 지역으로 정하였다. 소련은 북한을 김일성을 수령으로 독재 정부를 수립하였고 남한은 이승만의 책임 아래 민주주의 체제를 갖추었다. 1950년에 소련의 스탈린 공산당 체제는 6월 25일 일요일 아침에 남침을 시작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유럽은 아이젠하워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하여 독일을 동독과 서독으로 나누어 동독은 소련이 서독은 미국이 주도권을 이루었다. 한반도에서는 김일성 공산군이 소련 탱크를 앞세워 쉽게 서울을 함락하고 호남을 지나 낙동강 경계에 이르러 치열한 공방을 이루는 중에 미국의 태평양 제독 맥아더 장군은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하여 공산군은 철수를 시작하고 빠르게 삼팔선을 지나 평양에 이르렀다가 평안북도까지 철수하였다. 한반도에서 공산국이 사라지려는 절박한 상황에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서 남침을 시작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중국을 공격하는 작전을 세웠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퇴역시키고 맥아더 장군의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진다”는 은퇴 연설을 남기고 사라졌다. 아이젠하워는 트루먼을 이어 미국의 3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중국과 미국은 한반도에서 휴전협정을 맺고 임진강을 경계선으로 남과 북을 나누어 한반도의 정세는 오랜 세월이 흘렀다.
전쟁 중에 광주 서석동에 서석초등학교는 박기병 대령이 지휘하는 육군 연대가 있었고 무등산에는 아직 후퇴하지 못한 빨치산 유격대가 숨어 살고 있었다. 한밤에 유격대가 내려와서 육군 연대를 공격하고 쌀을 훔쳐 도망쳤다. 우리 사는 동네에 가족과 함께 사는 젊은 병장은 총소리를 듣고 급히 무장하고 부대에 가려고 대문 밖으로 나오는 순간 삘치산의 총에 맞아 숨졌다. 빨치산의 뒤를 따라 공격한 육군은 아홉 명의 포로를 체포했다. 박기병 대령은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처형하였다.
초등학교에 국군 부대가 주둔하고 무등산에는 후퇴하지 못한 공산군 빨치산이 숨어 살고 있었다. 총성이 요란하고 수류탄 폭음과 화염에 잠을 깬 새벽, 치열한 살인의 절규, 목숨의 마지막 비명, 창밖에 보이는 지옥은 12살 된 나에게는 너무나 눈물겨웠다. 아침 길에 군인들의 시체를 치우고 포로 열 사람은 끈에 묶여 무등산 기슭에 이르렀다. 헌병은 포로에게 삽을 주어 땅 구덩이를 파게하고 불 뿜는 총 끝 연기에 한 사람씩 목숨이 사라졌다. 자리를 파고 그 자리에 쓰러진 시체들을 흙으로 덮고 헌병들은 떠났다. 잠시 후에 가족인 듯한 사람들이 찾아와 소리 내어 울며 흙속에서 찾은 시체를 등에 메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은 최춘배 선생님이었다. 다음날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상공회의소 운동회가 있다고 알려 주셨다. 나는 달리기 대회에 나가고 싶어졌다. 운동장을 3바퀴 돌며 연습해 보았다. 뛰겠다고 마음을 다짐했다. 운동회에서 가장 큰 행사는 올림픽 정규 마라톤 거리를 달리는 거였다. 광주에서 송정리를 다녀오는 경주였다. 아버지는 나를 격려하고 내가 달리는 뒤를 자전거를 타시고 따랐다.
지금 돌이켜 보면 막내 누이를 잃었지만, 그때 부모님의 용단으로 우리는 자유의 나라, 이승만 정부 대한민국으로 돌아왔음이 얼마나 감사한 운명이었는지. 6·25전란을 겪으며 학교 다니고 4·19혁명을 거치며 대학을 마쳤다.
서울 남대문 종수공사를 마친 후에 1966년에 미국 미네소타 주립개학에 유학을 왔다. 어려운 이민 생활의 건축가 세월이 지날 무렵 2008년에 남대문이 불에 타서 다시 찾아가 재건을 도왔다. 부모님들마저 20년 전에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우리의 어린시절 8·15 해방의 파란만장했던 기억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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