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내년이면 문학평론가로 활동한 지 60주년을 맞이하는 김주연의 시집. 신칸트학파와 낭만주의 정신에 깊게 영향받은 독문학자로서 반세기 넘는 시간 동안 한국문학과 함께해온 그가 틈틈이 시를 창작하며 고유의 세계를 구축해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무수한 시집의 해설을 쓰며 비평 활동을 펼쳐온 김주연의 고유하게 빛나는 생명력을 가진 시 세계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이 시집을 통해 처음 공개하는 쉰네 편의 시와 ‘자서(自序)’에 적힌 한 편의 시 형식의 문장들은 그간 그가 탐독했던 전체와 개인, 정신과 육체, 세속과 신성성, 역사와 문학 등 양단의 간극을 극복하는 여정을 은유적으로 응축해놓은 듯하다. 현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 속에서 피어나는 감정의 파고는, 이상과 현실을 조율하고 도달할 수 없는 곳을 흠씬 그리워하는 견자의 전언처럼 울려 퍼진다. 시에 특정한 형식이나 규범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간 우리가 읽고 느껴온 시의 형식과 음율에 지극히 맞닿아 있는 『강원도의 눈』은 “시집이라고 우기고 싶지는 않다”(‘自序’)는 말이 무색하도록 방황하는 화자의 서정적 리듬을 싣고 우리 곁에 당도했다.
출판사 리뷰
“눈 속의 물에 처음부터 빠지고 싶었다
맑은 그대 눈의 물속에
내가 있었다”
지극한 현실과 아득히 먼 그리움
그사이를 조율하는 나지막한 근원의 목소리들
“카페 플라츠”는 결국 모든 생각을 펼치고 또 생각을 접게 하는 공간인 것 같다. 그 “시간의 회전 의자”에 앉은 ‘강원도 파우스트’가 마침내 무념무상의 경지로 내려갈 때 우주의 주름 밖, 자연의 시간과 허허롭게 동행하게 된다. [……] 약동하는 자연과 들숨 날숨으로 교감하고 횡단하며 새로운 생성의 지평을 여는 ‘시인의 탄생을 헤아리게 된다. 그 생명의 소리, 생명의 바람과 함께 『강원도의 눈』은 우리는 응시하며 독자의 밝은 눈을 기다리고 있다.
―우찬제, 해설 「강원도 파우스트」(pp. 151~52)에서
내년이면 문학평론가로 활동한 지 60주년을 맞이하는 김주연의 시집 『강원도의 눈』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신칸트학파와 낭만주의 정신에 깊게 영향받은 독문학자로서 반세기 넘는 시간 동안 한국문학과 함께해온 그가 틈틈이 시를 창작하며 고유의 세계를 구축해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무수한 시집의 해설을 쓰며 비평 활동을 펼쳐온 김주연의 고유하게 빛나는 생명력을 가진 시 세계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이 시집을 통해 처음 공개하는 쉰네 편의 시와 ‘자서(自序)’에 적힌 한 편의 시 형식의 문장들은 그간 그가 탐독했던 전체와 개인, 정신과 육체, 세속과 신성성, 역사와 문학 등 양단의 간극을 극복하는 여정을 은유적으로 응축해놓은 듯하다. 현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 속에서 피어나는 감정의 파고는, 이상과 현실을 조율하고 도달할 수 없는 곳을 흠씬 그리워하는 견자의 전언처럼 울려 퍼진다. 시에 특정한 형식이나 규범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간 우리가 읽고 느껴온 시의 형식과 음율에 지극히 맞닿아 있는 『강원도의 눈』은 “시집이라고 우기고 싶지는 않다”(‘自序’)는 말이 무색하도록 방황하는 화자의 서정적 리듬을 싣고 우리 곁에 당도했다.
모든 길을 지우고 새로운 길을 예비하며
더 나은 세계를 꿈꾸는 신성한 눈[雪]
김주연의 고향이자 『강원도의 눈』의 원류(源流)라 할 수 있는 강원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온이 낮고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시집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눈’은 “이전의 풍경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치이기도 하다. 과거의 기억 위에 살포시 덮이고 스며들어 “이전에 보이던 것은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던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게”(해설, p. 140) 하기 때문이다. 눈이 애매하게 내리는 날이면 “새들의 비상도 운행도/애매하게 만”들고 화자의 “슬픔과 생각도/애매해”(「눈은 애매하게 내리고」)질 정도이니, 눈과 그리움은 이 시집에서 가히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1부의 마지막 다섯 편은 <강원도> 연작으로 꾸려졌는데, 그곳에 얽힌 저자의 슬픔과 그리움이 기억들 곳곳에 눈처럼 쌓인다. “명륜동에서 태어나 혜화 초등학교를 다녔고” 부산을 거쳐 서울로 적을 옮긴 화자는 “서울 사람이라는 막연한 의식”이 있었지만 “유황 냄새로 도배된” “흙 장판”에 “누워서 처음으로 생명을 마신다”(「강원도―늦은 나이의 여행길에서」). 물에 빠져 생과 사의 기로에 섰던 기억은 “맑은 그대 눈의 물속에” 빠진 “나를 건지고 싶었”(「경포 호수―강원도 2」)던 은유로 탈바꿈하는가 하면, 중학생 시절 서울과 강릉을 오가는 고속버스에 탑승했다가 버스가 전복되는 큰 사고로 부상을 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쓴 「평창군 대화면―강원도 4」는 반세기를 지나 “낡은 이별가까지 부”르는 “아가씨 차장”의 슬픈 곡조처럼 아련하게 다가온다. 이처럼 강원도가 화자의 기억과 닿아 새 풍경을 그려내는 방식은 「강원도의 풀―강원도 3」에서 “강원도의 풀이 온 누리를 덮고/지구의 들숨 날숨을 지켜”주는 이미지로 확장되며 그리움의 힘을 키운다. 분명 경험했으나 잊은 채 살아가다 시간이 지나 몸이 기억하는 경험을 해본 적 있다면, “오는 것 가는 것이 모두 그리움이”(「벚꽃 무덤」)라는 깨달음을 가져본 적 있다면 “시간의 회전의자”(「카페 플라츠」)에 앉아 “내가 나 밖의/나로 나갔다가/돌아오”(「나 밖의 나―강원도 5」)는 강원도의 설국에서 유영하게 될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기억의 원근법과
온몸으로 심연의 생명을 감각하는 눈[眼]
『강원도의 눈』 속 하늘에서 내린 눈이 만들어낸 정경은 안구에 맺힌 상(像)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제목 속 ‘눈’의 또 다른 의미인 눈[眼]은 “시간적으로 아득한 과거나 공간적으로 먼 장소를 가깝게 조망”(해설, p. 129)하고 보이지 않는 내면과 세계의 현상을 형상화한다.
어제오늘 본 얼굴들은
잿빛처럼 희미해지고
반세기 너머 먼 얼굴들이
가깝게 떠오르는
원근법의 뒤바뀜 안에서
세월도 뒤바뀌는
11월
―「11월의 원근법」 부분
이미 멀어진 기억 속 얼굴들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보이는 이 시와 같이, 시선을 담은 눈은 “먼 것과 가까운 것, 그 사이에서 시적 긴장과 새로운 인식의 계기를 마련하는 방법적 성찰”(해설, p. 129)의 과정을 보여준다.
3부에 수록된 <파우스트> 연작에서 볼 수 있듯, 시선을 통해 가장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빛과 어둠”이다. 화자는 “어둠이 남향의 대형 유리창을” 지배하는 곳에서 “빛은/짧은 일생을 마치고/서쪽으로 물러”가는 것을 바라본다. “패배”인지 “양보”인지 알 수 없지만 빛은 순순히 자리를 어둠에게 내어주다가도 “거실을 가득 채운/어둠 속에서/점점 밝아”(「밝은 빛―파우스트 1」)오듯 어둠을 동반하고, 화자의 눈은 바라본 것 너머를 투시한다. 이 명과 암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는「영원히 여성적인 것―파우스트 4」에서 “여성의 맞은편에/남성이” “남성의 맞은편에/여성”과 같이 남과 여의 구도로 옮겨 가기도 하고, 「학문인가 마법인가―파우스트 6」에서 “학문의 어둠은 인생의 어둠”이기에 “허세의 빛 대신 마법의 빛을 찾아 헤”매야 하는 모습에 빗대어 펼쳐진다.
세계의 현상을 바라보는 눈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과거 그가 유학하고 왕래하던 독일을 떠올리게 하는 「로덴부르크」는 “꿈 같은 사랑의 땀이” 나고 “시간의 사랑”이 아득하게 펼쳐지는 곳이다. 그 사랑 혹은 그리움을 “감당할 수 없어서 흘리는 땀”을 화자는 조용히 응시한다. 「다윗」의 화자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다윗 조각상을 바라보며 “엄청난 힘”을 품은 “아름다움이 죄일 수밖에 없”다고 느낀다. 이 시선은 “죄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는 철학적인 성찰로 뻗어나간다. 결국 “나는 어디에 있을까요?”(「시인 1」), “어디로 달려가고 있나요?”(「시인 2」)라며 자아로 회귀하는 이 물음들은 고독하고 “쓸쓸한 비상(飛翔)”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이 많아서 고독이 사라지는 행복한 나라”(「시인 3」)를 꿈꾸는 김주연은 멈추지 않고 ‘쓰는 사람’으로, 사막과 광야에서 지친 이들이 잠시 머물 수 있는 “신비의 로뎀나무”(「로뎀나무」)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자신을 모두 내어주는 밝은 어둠”(「로뎀나무」)처럼.
강원도의 풀은 풀이 아니다
돌이며 바위다
돌 이상이며 바위 이상이다
풀 없는 돌과 바위는 돌도 바위도 아니다
풀 아래서 돌도 바위도 숨을 쉰다
풀 옆에서 사람도 숨을 쉰다
풀은 사람이 되고
사람도 풀이 된다
강원도의 풀이 온 누리를 덮고
지구의 들숨 날숨을 지켜준다
―「강원도의 풀―강원도 3」 부분
부드러운 원형의 여인
청춘과 평화
빛을 점화시키는 물체
사랑과 성실
시가 품고 있는 이 아름다움도
계절을 따라 오고 가는 것인가
봄이 가면 가을로 이어져야 하는가
―「가을이 된 봄」 부분
햇빛은 바로 어둠이 되고, 마침내 둘은 한 몸이 되네
선한 어둠으로 거듭 태어나
자신을 모두 내어주는 밝은 어둠
어둠이 비춰주는 밝은 부재의 그늘 속에서
문명의 모습을 자랑하는 과잉의 욕망은
누추한 옷을 벗고 피를 흘린다
상심하는 자 위로받고 감사하네
모자 벗고 몸으로 받는 햇빛
―「가을 기도」 부분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주연
1941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버클리대학과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독문학을 연구했다. 『문학과지성』 편집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상황과 인간』 『문학비평론』 『변동 사회와 작가』 『새로운 꿈을 위하여』 『문학을 넘어서』 『문학과 정신의 힘』 『문학, 그 영원한 모순과 더불어』 『사랑과 권력』 『가짜의 진실, 그 환상』 『디지털 욕망과 문학의 현혹』 『근대 논의 이후의 문학』 『미니멀 투어 스토리 만들기』 『문학, 영상을 만나다』 『사라진 낭만의 아이러니』 『몸, 그리고 말』 『예감의 실현』(비평선집) 『그리운 문학 그리운 이름들』 등의 문학평론집과 『고트프리트 벤 연구』 『독일 시인론』 『독일문학의 본질』 『독일 비평사』 등의 독문학 연구서를 펴냈다. 30여 년간 숙명여대 독문과 교수 로 재직했으며,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목차
自序 먼 가까움
1부
로뎀나무바람나무속으로나무십자가노란꽃삼총사가을이된봄가을기도가을여자단풍울림11월의원근법겨울나무겨울에서봄사이눈은 애매하게 내리고비도오고날씨도흐린데벚꽃무덤강원도경포호수강원도의풀평창군 대화면나밖의나
2부
간헐적파행감기오두방정열(熱)중독허리가 아프다예감시베리아나는어디에유리창쇼핑알수없네디아스포라
3부
인류세(人類世)민주주의밝은빛창세기서곡호문클루스영원히여성적인것다람쥐가 사라졌다학문인가 마법인가우정의 그림자어릿광대가 된 평론가
4부
시인1시인2시인3사이좋게사랑약속로텐부르크성소수자노벨문학상다윗카페플라츠
해설
강원도 파우스트·우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