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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속에서 보낸 마지막 오후
신생(전망) | 부모님 | 2024.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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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낯선 나라를 떠도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김 빛의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주제다. ‘소외와 단절’, 각각의 단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다양한 시공간과 소재를 아우르지만, 늘 같은 이야기를 다른 식으로 변주하고 있다. 호주는 죄수들이 세운 나라고,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은 전 지구상에서 가장 고립된 삶을 살아가던 인종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국인들이다. 범죄자들과 이방인들의 땅에서 써 내려간 글들이 작은 울림이 되어 한국의 독자들에게 온전히 전해질 수 있기를 바라는 저자의 마음이 담겨 있다.그곳을 ‘어둠의 속’이라고 부른다. 무슨 소설 제목을 따 온 것이라는데, 아무도 출처 따위에 신경 쓰지는 않았다. 누군가 외지인 다이버가 그럴듯해 보이는 이름이랍시고 가져다 붙였을 것이다. 지금은 현지인들한테도 그렇게 통한다.섬 주변 해저에는 수중동굴이 몇 군데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어둠의 속’이 있다. 남쪽 해안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쯤 북서쪽으로 가면 포인트가 나왔다. 지형을 잘 모르는 사람은 찾기도 어려운 곳이다. 무시무시한 하향조류가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기도 했는데, 막상 직접 겪어 본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그곳에 배를 대고 20m 정도 수심을 타고 들어가면 연안에서 가장 깊은 수직 동굴이 나온다. 동굴 입구는 좁은데 내부로 들어가면 상상 이상으로 넓어진다. 동굴 밑바닥에 외해로 통하는 통로가 나 있다. 헷갈리기 쉬웠다. 구멍 두 개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다이버들은 그걸 각각 화이트홀과 블랙홀로 불렀다.화이트홀이 외해로 통하는 문이었다. 블랙홀은 막혀 있다. 방향을 잃고 블랙홀로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블랙홀은 길고 복잡하기로 악명 높은 곳이다. 거기서는 한 번 방향을 잃어버리면 수중 전등이 있어도 출구를 찾기가 어렵다. 몇 번 인명사고가 나기도 해서, 노련한 다이버들 중에도 불길하다며 꺼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블랙홀의 막혀 있는 끝이 ‘어둠의 속’이다. 빛은 모두 차단되어 있고, 완벽한 어둠과 적막에 둘러싸여 있다.***“넌 거길 가 보기나 한 거야?”가을이 물었다.“아직.”“다이빙은 안 배우고, 꼰대들 구라 까는 것만 엄청 주워들었구나.”그리고 둘 다 한동안 별말이 없었다.“우리 돌아갈 수 있을까?”이번에는 제이가 물었다.가을이 뭐라고 대답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대답을 듣지 못하고, 제이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여린 미명이 창밖에서 흐릿하게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제이는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섬으로 내려왔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어디를 가든 요금이 평상시보다 두 배 이상이었다. 마닐라에서, 영어 공부를 하러 왔다는 한국 여자애와 잠시 사귀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데이트하기로 했는데, 사정이 생겨 연락도 하지 못하고 배를 탄 것이다.여자애 혼자 마닐라 베이에서 제이를 기다리다가 잔뜩 열이 받았을 것이다. 나중에 전화했지만, 여자애는 길게 통화하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자기한테는 최악의 크리스마스 이브였고, 제이가 최악의 남자로 기억될 것 같다고 말했다.제이는 섬에서 짧은 가을을 보냈다. 섬의 가을은 더웠다. 처음 한국을 뜰 때만 해도, 제이는 이런 동네까지 흘러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다. 필리핀에는 섬이 많았다. 제이가 일하는 곳은 마닐라에서 비행기를 타도 두 시간 정도는 내려와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고 다시 배를 타고 다시 한참을 들어와야 한다. 제법 큰 섬이었다. 20년 전에도 다이버들에게는 꽤 알려진 곳이었다고 했다.마닐라에서 섬으로 들어올 때만 해도 제이는 별다른 계획이 없었다. 섬에 도착하고, 제이는 이내 다이빙에 빠져들었다. 섬에는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다이브 숍이 몇 군데 있었다. 제이는 타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을 골랐다. 시간을 죽이기에 적당할 것 같았다. 몇 차례 벤즈로 고생을 하기도 했는데, 지난 몇 달 동안 내내 제이는 물속에서 살다시피 했다.처음 물속에 뛰어들 때는 별생각이 없었다. 이전에도 다이빙을 배워 본 적이 있었다. 섬이라고 특별할 것은 없었다. 역시 얼마 가지 못할 것 같았다. 손 때문일까 하고, 제이는 생각했다. 손이 조그맣고 볼품이 없어서 한 가지를 진득하게 오래 못 한다고 어머니가 늘 잔소리를 했더랬다. 아버지를 닮아서 그렇다는 것이다.어머니 손은 하얗고 길었다. 어머니는 고등학교 음악 선생이었는데 별명이 마귀할멈이었다. 가끔 피아노라도 칠 때면 마귀할멈의 손은 마치 건반 위에서 스케이트라도 타는 것처럼 매끄럽게 미끄러져 나갔다. 마귀가 시킨 것 중에 유일하게 제이가 좋아했던 게 피아노였다. 하지만 좀 큰 뒤로는 그것도 시들해졌다. 어머니도 그만 두는 게 낫겠다고 했다. 재능이 없다고 했다.그것도 아버지를 닮은 못생긴 손 때문일까? 어머니는 아무리 어려운 곡이라도 악보를 하나도 빼먹지 않고 모두 쳐 냈다. 건반을 짚는 손은 깊고 정확했다. 발은 아예 쓰지도 못하게 했다. 제이는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섬에서 좀 길게 있게 될지도 모른다. 조그만 손모가지를 비틀어서라도 말이다.제이가 일하는 다이브 숍의 사장은 제이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한국 여자였다. 뭐라고 한국 이름을 듣기는 했는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섬에서는 몰라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제이라는 애칭을 지어준 것도 몰라였다. 외국인 손님들이나 현지인 직원들이 부르기도, 기억하기도 쉽다는 이유였다. 제이의 본명에서 이니셜을 딴 거다.두 달짜리 중급 코스가 끝난 뒤에 사장인 몰라가, 가게 일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제이는 선뜻 받아들였다. 당분간 섬에 머물기로 마음을 먹고 있던 참이었다.제이는 섬이 마음에 들었다. 타운에는 한국 사람이 하는 중국집도 하나 있어서 언제든 자장면을 먹을 수 있었다. 게스트하우스도 겸하고 있어서, 간혹 타운에서 자야 할 일이 생기면 늘 들르는 곳이었다. 음식은 국적 불명에 정체불명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섬 자체가 한국 관광객들이 그리 많은 곳이 아니긴 했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지나치게 손님이 없는 곳이었다. 그 집은 뭐든 팔았다. 한국 음식, 한국식 필리핀 음식, 한국식 중국 음식, 필리핀 음식, 일본 음식, 미국 음식, 스페인 음식, 비싼 방, 싼 방.섬에 들르는 한국 사람들은 가격에 혹해서 한 번쯤은 그 가게에 들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무성의한 주인의 태도와 국적 불명의 음식 맛에 충격을 받게 되고, 섬에 가더라도 그 집만은 피하라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는 했다.하지만 자장면 하나만은, 적어도 제이에게는, 기가 막힌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늘 먹던 바로 그 맛이었고, 양도 충분했다. 주방장이 열아홉 살짜리 필리핀 여자애라는 걸 알면 또 한 번 놀라게 되는 곳이었다.섬의 규모에 비하면, 거주하는 한국 사람은 아직 많지 않았다. 한국 가게는 몇 있었다. 식당과 술집이 각기 다른 종목으로 서넛, 유학원이 하나, 미용실이 하나, 부동산이 하나, 여행사가 하나, 노래방이 하나, 나머지는 모두 다이브 숍이었다. 있을 건 다 있었지만, 하나씩이었다. 교통편이 불편해서 그런지 아직은 다이빙을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 같기는 했다.남자든 여자든, 첫눈에 배꼽이라도 맞출 작정이 아니라면, 한국 사람이라고 서로에게 불편한 관심을 두는 경우는 드물었다. 몰라 외에는 제이의 본명이 무언지, 나이가 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괜찮은 술집도 더러 있었고, 깜짝 놀랄 수준의 밴드들이 푼돈을 받고 밤마다 죽어라 연주를 해대는 곳도 몇 군데 알아 두었다. 그중에는 제이가 찍어 놓은 필리핀 계집애가 있는 집도 있었고…. 길게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어둠의 속에서 보낸 마지막 오후」 중에서

  작가 소개

지은이 : 김빛
서호주 만두라에 거주하며, 작가,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킬리만자로의 눈』(번역서), 『이 소설은 완벽하다』(경장편) 등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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