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17세기 동서양 교역을 휩쓴 슈퍼스타 인삼
서양은 왜 인삼의 역사를 숨겨왔을까? · 서구 학계가 외면한 ‘세계상품’ 인삼의 역사를 최초로 복원한 서양사학자 설혜심
· 최초로 공개되는 서구 문헌 속 인삼의 존재
· 개성에서 런던, 매사추세츠까지 시공간을 넘나드는 스펙터클한 인삼의 여정
· 틀을 깨는 집요한 연구로 세계체제론에 균열을 내는 역작 출간
· 지구사 영역에 새로운 족적을 남긴 기념비적 연구
한국인의 몸보신에 빠질 수 없는 것, 바로 인삼이다. 한국에서는 탕과 술 같은 음식에서부터 건강기능식품, 고급 약재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인삼을 섭취한다. 오늘날에는 한류 붐을 타고 아시아는 물론, 미국과 유럽에서도 한국인삼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고려인삼이 유럽에 첫발을 내딛고 유럽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1617년이니, 말하자면 ‘최초의 한류 상품’이라 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한국이 자부심을 가진 인삼의 역사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사실 인삼은 커피, 사탕수수, 면화 등과 함께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17세기 거대한 교역 네트워크의 중심을 차지했던 세계상품이다. 그런데 이 상품들과 달리 서양 역사에서 인삼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에 의문을 품은 서양사학자 설혜심 교수가 오랜 연구 끝에 역사에서 사라진 인삼의 존재를 되살려냈다.
설혜심 교수는 각종 서양 문헌 속 인삼에 관한 기록을 찾아내어 최초로 세계사적 시각으로 인삼의 역사를 복원했다. 하지만 단순히 인삼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서양과 인삼의 불편한 관계를 예리한 시선으로 추적하여 서구 문명이 인삼에 어떤 식으로 왜곡된 이미지를 덧씌웠는지 규명한다. 나아가 인삼을 둘러싼 범지구적 네트워크를 재구성함으로써 서구 중심의 세계체제론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오늘날 한국인삼의 위상을 다시금 살핀다. 동양의 신비한 약초에서 미합중국 최초의 수출품이 되기까지 인삼의 기나긴 여정 속 다채로운 이야기를 통해 서구 학계의 편향을 꼬집는 《인삼의 세계사》는 새로운 역사 속으로 독자들을 이끌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목적은 범세계적 차원에서 인삼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다. 이 거대한 틀은 크게 동아시아라는 핵심부와 그 외의 지역이라는 두 영역으로 나뉜다. 그런데 한국·중국·일본을 다루는 내용 대부분은 인삼과 관련된 굵직한 정책과 교역 상황 등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소개하는 데 그쳤다. 내 전공 분야가 아닌 탓도 있지만 다른 연구자들이 이미 훌륭한 연구를 많이 내놓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게는 서양 문헌 속에서 인삼의 흔적을 찾아내어 역사에 되살려놓는 일이 더 시급하고 중요했다. 의학 논고부터 약전, 동인도회사 보고서, 경제학 논고, 식물학서, 지리지, 여행기, 박물지, 신문 기사, 서신, 사전, 소설, 시, 광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가 동원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가급적 그 다양한 자료를 인용해 생생함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 연구가 시작된 시점부터 지금까지 나의 모토는 그런 자료들로 하여금 ‘서양 역사 속 인삼의 존재를 스스로 말하게 하라’였다. ―〈들어가는 글〉 중에서 (20~21쪽)
1. 서양이 반한, 서양이 감춘 인삼의 존재를 복원하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서양 문헌에서 찾아낸 인삼의 역사인삼은 언제 어떻게 서양에 소개되었을까? 고려인삼이 서양과 만난 첫 기록은 1617년 일본 주재 영국 동인도회사의 상관원이 런던의 본사에 인삼과 함께 보낸 통신문이다. 상관원은 “한국에서 온 좋은 뿌리를 보”낸다며 “가장 귀한 약으로 간주되며 죽은 사람도 살려내기에 충분합니다”라고 인삼을 설명했다. 한국에서 일본, 남아프리카(희망봉)를 거쳐 런던에 도착한 인삼의 여정은 인삼이 ‘대항해시대’의 결과물이었음을 오롯이 보여주는 사례다.
이 책에서는 이같이 서양 문헌 속 인삼에 관한 기록으로 역사 속 인삼의 존재를 드러내 보인다. 동아시아에 파견된 예수회 신부들이 인삼을 직접 경험하고 쓴 보고서와 중상주의 기치하에 인삼 연구에 매진한 유럽 지식인들의 논문들, 철학자 존 로크의 기록과 라이프니츠가 인삼의 효능에 대해 질문한 편지들, 실제 인삼을 치료에 사용한 의사들의 임상 사례 등 흥미로운 기록들을 통해 17세기 초부터 18세기까지 인삼이 서양지식체계에 편입되는 과정을 살핀다.
또 인삼이 세계상품으로서 동아시아라는 중심부와 유럽-북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주변부의 이중구조 속에서 유통되었음을 밝히며, 그 궤적을 추적한다. 북아메리카에서의 인삼(화기삼) 발견은 인삼의 역사와 교역 네트워크의 큰 전환점이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 후 미국은 인삼을 주력 수출품으로 삼고 중국과 첫 무역을 시작했고, 이로써 동아시아와의 인삼 교역 주도권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미국에서 인삼의 역사는 미국의 경제적 독립 과정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삼이 미국의 첫 수출품이자 수출 효자 상품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미국에서 인삼을 채취·재배하여 수출한다는 것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인삼 교역의 역사를 통해 한국인삼에 관한 서양의 인식도 확인할 수 있는데, 중국 사료에만 의존했던 탓에 한국인삼을 2등급으로 치부하다가 최고의 인삼으로 칭송하기도 하는 등 시대에 따라 인식의 변화가 나타난다. 조선의 대중국·대일본 인삼 교역의 역사는 물론, 19세기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다툼 속에서 드러나는 한국인삼에 대한 서양의 관심과 욕망, 일본에 대항한 개성 삼업인들의 저항운동 등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1617년 일본 히라도에 주재하던 영국 동인도회사의 상관원 리처드 콕스는 런던 본사에 통신문과 함께 작은 꾸러미를 보냈다. 그 꾸러미에는 고려인삼이 들어 있었다. 이 통신문은 고려인삼이 유럽에 상륙한 것을 증명하는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이다. “중개인을 통해 희망봉에서 어떤 뿌리를 받았는데, 이곳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너무 말랐고 아무런 성분이 남아 있지 않아서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온 좋은 뿌리를 보냅니다. 여기서 이 뿌리는 은과 맞먹는 가치를 가지는데, 너무 귀해서 보통 사람의 손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한국과 교류할 수 있는 쓰시마 번주에 의해 무조건 일본 천황에게 보내집니다. 이곳에서 이 뿌리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약으로 간주되며 죽은 사람도 살려내기에 충분합니다.”
―1부 1장 〈한국인삼의 유럽 상륙〉 중에서(25~26쪽)
1736년 2월 9일 파리의과대학에서는 유럽 최초로 인삼을 주제로 작성된 박사학위논문의 심사가 열렸다. 뤼카 오귀스탱 폴리오 드 생바스(Lucas Augustin Folliot de Saint-Vast)가 쓴 논문의 제목은 〈인삼, 병자들에게 강장제 역할을 하는가?〉였다. …… 그는 인삼이 질병의 치료뿐만 아니라 건강을 점진적으로 증진하는 식품으로서의 특징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 부분은 마치 오늘날 인삼의 활용을 예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큰 관심과 호응 속에 무사히 통과된 이 논문은 인삼이 강장제로서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린 서양 최초의 박사학위논문으로 기록에 남았다.
―1부 2장 〈영국 왕립학회와 프랑스 왕립과학원의 인삼 연구〉 중에서(84~86쪽)
1687년 루이 14세(Louis XIV)는 교황청으로부터 중국에 대한 선교권을 인정받아 다섯 명의 예수회 신부를 청나라에 파견했다. 이 들은 강희제의 궁정에서 천문학, 수학, 물리학, 지리학, 동물학, 식물학, 의학 등 다양한 학문을 연구하게 되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이들의 연구에서 인삼이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로 다뤄졌다. 특히 루이 다니엘 르 콩트(Louis Daniel Le Comte, 1655~1728)는 인삼의 외형적 특징과 복용법을 소개하면서 인삼이야말로 중국이 자랑하는 탁월한 강심제이자 만병통치약이라고 보고했다. 또 다른 신부 앙투안 토마(Antoine Thomas, 1644~1709)는 인삼을 복용하는 특권을 누리기도 했다. 1691년 앓아누운 자신에게 강희제가 인삼을 하사해 두 차례 복용했고 효험을 보았다는 기록을 자랑스러운 어투로 남겼던 것이다.
―1부 1장 〈한국인삼의 유럽 상륙〉 중에서(42~43쪽)
19세기 후반이 되면 서구의 신문 기사에서 한국 관련 기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영국도 한국에 큰 관심을 보이는데, 이는 한반도가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탓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은 영국이 향후 무역 대상으로 고려해야 할, 아시아에서 새로이 ‘발견되고 있는’ 국가로 조명되었다. 그런데 한국에 대한 소개에서 정치, 경제, 지리, 문화와 더불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인삼이다. 우선 인삼은 금과 더불어 한국에서 중요한 수출품으로 꼽힌다. 한국은 “아직은 대사나 군함을 파견할 필요는 없지만 교역 잠재력이 큰 나라”로, “한국이 수출하는 주요 상품으로는 금과 인삼이 있다”는 식이었다.
―2부 4장 〈동아시아 정세와 인삼〉 중에서(214~215쪽)
……[미국은] 인삼을 주력 수출품으로 준비해 중국에 보내기로 한다. 이 결정은 나름대로 정보를 수집해서 분석한 결과였다. 즉, 중국에 파견한 정보통이 중국에서 인삼에 대한 수요가 여전하다고 전해왔던 것이다. 미국인들의 입장에서 인삼은 뒷산에만 가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당장 실어 보낼 수 있는 물품이자 유럽 상인들에 비해 무역에서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는 미국의 특산물이었다. 미국 상인들은 좋은 반응을 얻을 만한 품목을 고르는 무역 경험은 일천했지만 과거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 시절 상품으로 출
시해 높은 이윤을 맛보았던 인삼에 대해서만은 확신이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독립국가 미국의 첫 해외 수출품으로 인삼(화기삼)이 선택된 것이다. 이 사실은 역사가들조차 잘 모르고, 미국 역사에서도 잘 다루지 않는 이야기다. 1784년 미국은 자국 상선을 이용한 첫 해외 무역을 성사하게 된다. 이 역사적인 항해를 담당한 배는 ‘중국황후(Empress of China)’호였다. …… 이 배의 가장 중요한 선적품인 인삼은 …… 물량으로 치자면 그 시즌 중국에서 수입한 전체 인삼량의 50%를 차지할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2부 3장 〈인삼, 미국 최초의 수출품〉 중에서(184~185쪽)
2. 서양은 왜 인삼을 은폐했는가?
―인삼, 오리엔탈리즘을 읽는 또 하나의 통로인삼의 매력에 푹 빠졌던 서양은 왜 인삼에 거리 두기를 시작했을까? 18세기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서구 의학계에서는 인삼의 의학적 가치를 폄하하고 약전(藥典)에서 퇴출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었다. 당시 인삼은 커피의 카페인이나 아편의 모르핀처럼 유효성분을 추출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식물이었다. 인삼은 서양의 근대 약학 시스템에 매우 더디게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양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동양의 의학적 전통에 기대어야 했던 인삼은 오히려 그런 특성 때문에 서구가 주도한 화학약품 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서양이 인삼을 멀리한 이유는 그 때문만이 아니었다. 근대 유럽과 미국은 의학의 영역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인삼을 경원시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로베르타 비빈스(Roberta Bivins)가 “의학 시스템의 지속성과 성공은 그것의 의약적 효능은 물론,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요인도 있다”라고 강변했는데, 이는 인삼에도 해당하는 말이다. 이 책에서는 서양이 인삼의 생산과 수출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음에도, 인삼을 ‘동양의 전유물’로 타자화하게 된 배경으로 경제적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인삼 가공 기술에 대한 열등감과 문화적 구별짓기에 있음을 지적한다. 서양이 인삼에 동양성, 전제성, 사치, 방탕, 비합리성과 불가해성 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우며 주류 문화에서 인삼을 소외해간 과정을 추적하며, 한국에는 생소한 미국 심마니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삼에 투영된 오리엔탈리즘과 서구중심주의의 민낯을 파헤친다.
중국식 가공법이 널리 알려졌음에도 미국에서는 결코 그처럼 정교한 방식을 적용하지 못했다. …… 사실 미국인들은 정교한 가공법을 개발하기보다 닥치는 대로 수출하기에 바빴다. 어찌 보면 가공법의 차이는 중국에서 낮게 형성된 화기삼 가격을 설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편리한 핑곗거리였다. 화기삼이 고려인삼보다 열등하다고 인정하기보다는 조악한 가공법 탓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 의약학계는 인삼의 유효성분을 추출하기 위한 균질한 샘플조차 추려낼 수 없었다. 화학자이자 동식물학자였던 라피네스크는 인삼에서 충분한 유효성분을 추출해내지 못한 것이 ‘자신들의 무지 탓’이라고 인정했다. 이 말은 이미 1713년 영국 왕립학회에서 논의되었던 ‘유럽의 의사들도 인삼의 성분을 정확히 알아서 정확한 양을 처방 한다면 큰 혜택을 볼 것’이라는 제안이 100여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현실화되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발언이기도 하다. 17세기 인삼과 조우한 유럽은 실제 의료에서 다양하게 인삼을 활용했지만, 유효성분 추출이라는 단계에서 실패했고, 이는 결국 인삼의 활용을 위축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3부 3장 〈약전의 개혁과 유효성분 추출의 어려움〉 중에서(281~282쪽)
인삼의 유효성분은 20세기 중반이 넘어서야 제대로 규명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18세기 초부터 중국에 인삼을 수출해야 했던 서구의 입장에서는 인삼의 효능을 둘러싸고 중국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즉, 서구가 인삼의 약성을 정확하게 몰랐기 때문에 오랜 세월 인삼에 열광했던 중국의 지식체계에 도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불활성 약재’로 퇴출당한 토복령의 사례와는 다르게 서구 의약학계는 북미삼이 계속 아시아삼과 동일한 효능을 지녔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원산지를 속인 채 중국삼인 척하는 일도 계속되었다.
―3부 4장 〈근대 약학 시스템으로의 더딘 진입〉 중에서(287~289쪽)
인삼은 서구 사회에 소개된 이후 오랫동안 실제적 수요나 사용량에 비해 훨씬 큰 문화적 가치와 상징성을 지닌 채 나름의 ‘사회적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인삼을 언급하는 문헌에서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은 ‘중국에서 엄청나게 높이 평가되는 인삼’이라는 말이다. 이 표현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인삼이 발견된 직후 그 정황을 기록해놓은 발견의 수사에서도 나타나며, 미국인들 사이에서 자랑스러운 국산품으로 홍보되고 수출되는 상황에서도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이 말은 원산지를 예우하는 것 같거나, 인삼의 효능을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중국의 권위에 기대어 설파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삼을 자신들과는 다른 세계인 ‘중국’이라는 이방의 영역에 온전히 묶어두는 수사일 수 있었다.
―4부 1장 〈유비와 배척〉 중에서(345~346쪽)
인삼이 18~19세기 북아메리카 대륙의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주류문화는 인삼을 철저히 중국의 아이템으로 규정해갔고, 그 과정에서 인삼에 의지해 살아온 사람들 또한 배척하고 소외해갔다. 채삼인이 캔 삼을 모아 수출한 수출업자와 투자자는 자본주의적 미국의 발전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로 기록되었지만, 그들과 인삼의 연결고리는 철저하게 은폐되었다. 미국의 역사 교과서에서 인삼을 찾기 란 매우 어려운 일이고, 심지어 오늘날 미국인들 중에는 미국에서 생산되는 화기삼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많다. 이런 맥락 속에서 삼을 캐는 사람들과 그들을 둘러싼 공동체는 경제적으로 낙후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다른 지역과는 전혀 다른 작동 방식을 가진 곳으로 표상되었다. 심마니들의 삶의 터전이 일종의 ‘내부 식민지(Internal Colony)’의 특성을 띠게 된 것이다.
―4부 4장 〈심마니의 이미지와 내부 식민주의〉 중에서(416~417쪽)
3. 서구 학계의 편향에 반격을 가하는 탁월한 저작
―세계 최초로 인삼의 지구사적 의미를 밝힌 설혜심 교수의 역작이 책은 설혜심 교수의 전작들과 달리 훨씬 더 넓은 공간과 긴 시간을 다룬다. 한 가지 주제에 대한 역사를 세계사적 차원으로 풀어내기 위해서는, 거대 역사뿐 아니라 넓은 공간과 긴 시간의 축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놓치지 않는 지구사적 시각이 필요하다. 인삼은 오늘날 한국이 세계에 내세우는 상품임에도 불구하고, 인삼의 역사를 지구사적 시각으로 살핀 연구나 저서가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삼의 세계사적 의미를 밝히고, 서양 역사에서 인삼이 은폐되어온 배경을 서구 중심의 세계체제론에서 찾아내어 서구 학계의 편향에 반격을 가한 이 책은 서양사학자의 집요하고 치밀한 연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설 교수는 이 책에서 “지구사적 관점으로 인삼의 역사를 되살려냄과 동시에 오늘날의 비대칭적 인삼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라고 말한다. 세계적으로 인삼 연구는 195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인삼 연구의 90% 이상이 인삼의 성분과 효능을 밝히는 연구에 집중되어 있고, 인문사회학적 연구의 비중은 매우 적다. 게다가 연구 대부분이 동아시아 출신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연구 대상도 동아시아에서 생산되는 인삼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오늘날 인삼 제품을 많이 소비하게 된 다른 지역에서 인삼의 위상이나 인삼에 대한 인식을 알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인삼의 세계사적 의미를 살핌으로써, 인삼 연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역사학적 시선으로 모색한다.
이 책은 인삼을 세계사에서 되살려내려는 실험적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특히 서양 문헌을 중심으로 인삼에 관한 기록을 찾아내어 서양 역사학이 은폐했던 인삼의 존재와 국제적 교역로를 복원하는 한편, 세계상품이었던 인삼이 역사학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원인을 규명하려는 것이다. 이 작업은 일방적 확산론에 근거한 유럽중심주의적 세계관을 교정하는 작업이자 근대 초 다수의 ‘세계체제들(World Systems)’이 존재했을 가능성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왜 20세기 말까지도 인삼의 소비층이 동아시아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도 찾아보려 한다.
―《들어가는 글》 중에서(19쪽)
인삼을 둘러싸고 서양이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없었던 상황은 역설적으로 인삼의 소비가 중심부인 동아시아에 한정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중국은 마치 ‘거대한 인삼의 무덤’처럼 전 세계의 인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과정은 단지 물류의 이동에 그치지 않았다. 인삼이 ‘중국의 전유물’이라는 배타적인 인식도 함께 창조되었던 것이다. 월러스틴은 근대세계체제를 효율적으로 기능하도록 하는 문화적인 틀로서 ‘지문화(geoculture)’라는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지문화의 두 기둥은 자유주의와 과학주의로, 이 개념을 적용해보자면 인삼은 서구중심적인 지문화가 결코 포섭할 수 없었던 대상이었다. …… ‘인삼의 세계사’는 의약학의 성패가 의약적인 효능뿐만 아니라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에서 좌우된다는 명제를 선명하게 증명하는 사례다. 과학이라고 불리는 제반 영역에도 문화적인 구별 짓기가 작동하며, 그런 구별 짓기의 심성은 이른바 ‘객관적인 실험 결과’로 쉽게 교정되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다. 오늘날 거센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제대로 균형 잡힌 세계관을 만들기 위해 인삼 같은 상품의 ‘사회적 삶’을 ‘약리작용’과 ‘현재적?상업적 효과’를 넘어 인문사회학, 특히 역사적 관점에서 연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맺는 글》 중에서(426~428쪽)
1617년 일본 히라도에 주재하던 영국 동인도회사의 상관원 리처드 콕스는 런던 본사에 통신문과 함께 작은 꾸러미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