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황인덕 시조집 『적도의 꿈』은 한 개인의 삶이 “자신이 가는 길”을 따라 어떻게 환희와 성찰의 언어로 정련되는가를 보여준다. 시인은 서시조에서 “흙 속에 갇힌 어둠 박차고 맞은 광명”이라 말하며, 견딤의 시간 끝에서 비로소 터지는 생의 통성을 예고한다.
작품들은 일상의 노동과 관계, 역사와 공간을 횡단하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특히 표제 시조 「적도(赤道)의 꿈」에서 “지구의 허리에는 남북풍이 없습니다… 천연의 고요가 사는 비무장 땅”이라 노래할 때, 시조는 단순한 여행의 기념이 아니라 분열과 극단을 넘어서는 ‘균형의 윤리’로 확장된다. 이어 마리나베이샌즈의 “욕망의 고삐”와 보타닉가든의 거목의 “끝을 모르는 / 지구촌 저 우듬지”는 현대 문명의 찬란함 뒤에 숨은 불안과 과잉을 비판적으로 비춘다.
출판사 리뷰
황인덕 시조집 『적도의 꿈』은 한 개인의 삶이 “자신이 가는 길”을 따라 어떻게 환희와 성찰의 언어로 정련되는가를 보여준다. 시인은 서시조에서 “흙 속에 갇힌 어둠 박차고 맞은 광명”이라 말하며, 견딤의 시간 끝에서 비로소 터지는 생의 통성을 예고한다.
작품들은 일상의 노동과 관계, 역사와 공간을 횡단하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특히 표제 시조 「적도(赤道)의 꿈」에서 “지구의 허리에는 남북풍이 없습니다… 천연의 고요가 사는 비무장 땅”이라 노래할 때, 시조는 단순한 여행의 기념이 아니라 분열과 극단을 넘어서는 ‘균형의 윤리’로 확장된다. 이어 마리나베이샌즈의 “욕망의 고삐”와 보타닉가든의 거목의 “끝을 모르는 / 지구촌 저 우듬지”는 현대 문명의 찬란함 뒤에 숨은 불안과 과잉을 비판적으로 비춘다. 이처럼 시조집은 자연과 도시, 개인과 공동체, 과거와 미래의 긴장을 한 편 한 편의 정형 리듬 속에 묶어 두며, 독자에게 ‘흔들리지 않는 자리’가 무엇인지 되묻는다. 결국 『적도의 꿈』은 멀리서 찾은 낙원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을 절제와 사랑으로 다시 세우려는 시적 결단의 기록이다.
북리뷰
『적도의 꿈』― 삶의 중심을 찾는 시조 여행
황인덕 시조집 북리뷰
황인덕 시조집 『적도의 꿈』은 “견딤”의 시간에서 길어 올린 생의 환희를, 정형의 리듬으로 단단히 묶어낸 시집이다. 시인은 서시 「매미처럼」에서 “흙 속에 갇힌 어둠 박차고 맞은 광명”을 말하며, 막혔던 목청을 틔워 “허공 찢는 통성”으로 삶을 다시 시작한다. 이 첫 울림은 단순한 감상적 고백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한 존재만이 갖는 ‘언어의 힘’을 선명히 보여준다.
시집의 백미는 표제작 「적도(赤道)의 꿈」이다. “지구의 허리에는 남북풍이 없습니다… 천연의 고요가 사는 비무장 땅”이라는 진술은, 자연의 질서가 지닌 균형의 철학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 여기서 적도는 여행지의 풍경이 아니라, 인간이 끝내 회복해야 할 ‘중심’의 은유로 작동한다. 응달과 양달이 모두 “정답”이 되는 세계는 극단과 분열에 길든 현실을 비껴가며, 독자에게 삶의 태도를 조용히 교정한다.
흥미로운 점은 시인이 자연 찬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마리나베이샌즈」에서 “욕망의 고삐”로 생명의 덩굴이 ‘봉우리’로 맺히는 장면은, 도시 문명이 자연의 에너지를 어떻게 전유하는지 압도적인 이미지로 드러낸다. 또 「보타닉가든의 거목」의 “두렵다 / 끝을 모르는 / 지구촌 저 우듬지”는, 성장과 확장의 찬란함 속에 잠복한 불안을 정확히 짚는다.
『적도의 꿈』은 한 편 한 편이 단정한 문장성과 명료한 비유를 바탕으로, ‘삶을 견디는 기술’과 ‘세계를 바라보는 윤리’를 함께 제시한다. 조용히 읽다가도 어느 순간 마음이 단단해지는 시집—시조가 오늘의 언어로 충분히 깊어질 수 있음을 증명하는 성실한 첫 걸음이다. (초판 발행: 2026.1.15)
해설
삶을 긍정하는 충만한 마주침
송기섭
(충남대 교수)
1
인간적인 것의 토대를 탐색하는 데 진정 필요한 것은 각자 마주해온 체험으로서의 삶이다. 현장에서 신체의 행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겪어온 삶이지만 그 삶이 무엇인지를 묻고자 할 때, 그것은 여전히 모호하고 때로는 문제적이기조차 하다. 분명 물질적 현실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망각의 침묵 속으로 사라져 간다. 기억이 가지는 상기적 특권에 의존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유한성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경험으로서의 삶이 그 물질성을 자양분으로 삼아 인간적 미덕을 지닌 미래로 던져지기 위해서는 어떤 보존의 수단이 필요해진다. 이러한 욕구 때문에 우리는 재현의 형식들을 만들어 사용해 왔다. 시조 또한 그러한 방법의 하나임을 황인덕 시인은 여기 시쓰기를 통해서 온전히 보여주고 있다.
삶의 본질적 진실은 날 것 그대로는 결코 전달될 수 없으며, 그건 오직 문학적 형식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단순히 재현되어 기록으로 보존되는 게 아니라 삶을 벌거벗겨 시인 자신의 의미로 만드는 지성적 사유라는 고된 작업이 수반되어야 비로소 완성된다. 문학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고행의 지대에서만 가능한 도저한 정신적 산출의 귀결이다. 시인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음이 이러한 정신적 주형을 거쳐야 하는 까닭이다. 황시인은 작가의 배타적 특권이자 윤리적 임무에 속할 이러한 정신의 작업을 온전히 감당하면서 하나의 세계를 구현한다. 자기 삶 전체를 몽땅 견인하여, 그것이 가져올 가장 심오한 정신을 도출하고자 하는 이 숭고한 지성을 움직이게 만든 것은 고래로 이어져 온 시조 형식이다. 여기서 시조는 삶을 가장 순수하고 간결하게 내적 의미로 현실화하여 지금 여기에 있게 만들고, 아울러 그 삶을 미래로 이끄는 찬탄이자 유혹의 장치로 가동된다.
황시인에게 삶은 현존의 거기 있음이라기보다, 「서(序)-매미처럼」에서 말하듯이, “묵묵히 견딘 세월,” 즉 한 인생이 온몸으로 부딪쳐온 생애 전부이다. 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단지 실존하는 현실의 감각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울려 나오는 현상의 모방이 아니다. 그에게 그것은 켜켜이 감내해온 삶을 통째로 응축하여, “막혔던 목청을 튼,” 그래 “허공 찢는 통성”이다. 이 ‘통성’은 그 자체로 매혹당한 상태에서만이 가능한 절대적 울부짖음일 터인데,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짙은 어둠을 통해 숙성되고 성숙하여야만 비로소 외부세계로 발현될 찬란한 순간의 절규이다. 그에게 시쓰기는 인생이란 긴 여정을 응축하여 빚어내는 매미의 ‘통성’이다. 그는 매미와 다를 바 없이 “전신이 공명통되어 환희로 몸을 떤다.” 너무도 오랜 기다림이었기에 그것은 고통스러운 ‘환희’로 울려 퍼지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다. 삶을 긍정하는 정신의 심연에는 ‘사랑’이 내재되어 있다. 바로 이 사랑이 마주해오는 삶을 긍정할 응시의 권리를 보존한다.
삶을 응시하는 이 충만한 마주침에는 대략 세 가지 경로가 있다. 하나는 외부 사물이나 행위를 객체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진실 운동으로 사유하는 것이며, 남은 하나는 그 관념을 실천의 위상으로 바꾸는 것이다. 마주해오는 삶을 선순환으로 갈무리하는 이 미메시스의 원리에는 긍정의 윤리학이 기본적으로 전제된다. 황시인의 시쓰기에는 삶을 그렇게 긍정의 정신으로 전환하는 윤리적 포즈가 배치된다. 정신의 힘이 글쓰기의 동력을 불러일으키며, 그의 작품들은 삶에서 비롯되었으나 그것을 넘어서는 미래의 무한한 열림으로 다가온다.
2
너무도 평범하여 거의 드러나지 않는 일상에 삶이라는 진지한 의미를 부여하는 계기를 누군가는 맞이하기 마련이다. 지나온 삶에 대한 내면의 사유 작용을 통해서, 진실을 향한 내적 성찰을 통해서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서의 존재라 할 주체가 된다. 하찮은 대상들이 예술의 형상으로 변용되는 작품의 구현 과정에는 이러한 주체화 양태가 반드시 수반된다. 참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물론 이 사건의 삶이 만들어내는 진리의 절차를 따라감을 의미한다. 일상적 존재의 사소한 생활 세계는 이러한 미적 사건을 발견하면서 새로운 출발을 위한 정신을 생성한다. 경험의 실재성을 시조 형식으로 변용하는 황시인의 진실 찾기 또한 이러한 구조에 매개되면서 형상화된다.
임께서 선물하신 가죽 표지 작은 노트
고이 열어 펼쳐 보니 점선 무선 반반이다
걷던 길 희미해지고 새로 돋는 고운 길
점선을 세어가며 돌아보는 지난날들
한 장씩 넘기면서 다가올 날 가늠하면
지난 길 리셋이 되어 첫 클릭 새 문(門)이다.
-「새 문」 전문
체험 속에 담긴 ‘작은 노트’는 잊힌 시간을 되찾게 해주는 특정한 개별적 기호이다. 그것은 비자발적으로 우연하게 마주해왔으나 강렬하게 멈춰서면서 그것을 응시하는 자의 기억을 불러내고, 또한 그것에 대해 사유할 것을 강요한다. ‘선물’로 남겨진 ‘작은 노트’라는 시적 형상으로 재현되면서 그것은 의미 찾기의 심중한 표지가 된다. 그것은 시인에게 응시하라고 강요하는 마주침이 되면서 의미로 해석되고 가치를 찾아야만 하는 대상으로 섬광처럼 솟아오른다. ‘선물’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적 상황도 부여되어 있지 않기에 그 시적 형상은 더욱 애매하게 진실을 은닉하면서 과거를 향하여 포화된다. 그것의 현재 상태를 나타내는 풍부한 묘사들은 이 채집된 진실을 오히려 더 증폭할 뿐 속 시원히 드러내 줄 어떤 표시가 되기 어렵다. 그리하여 ‘작은 노트’라는 형상은 의미 혹은 진리 찾기의 과잉 속에 빠져버리면서 “돌아보는 지난날들”을 더욱 행복한 시간으로 만든다.
지나온 날들이 명료한 의미가 아니라 애매한 그것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은 어차피 그것이 순수 과거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세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황시인에게 작품들 속에서 재현되는 과거의 경험들은 모두 이 순수 과거에 고요하게 머무는 아련한 잠재태이다. 그것들은 ‘작은 노트’처럼 형상의 도움을 받아 무성하게 현실의 우리에게 던져질 잃어버린 세계이다. 그것의 의미를 찾는 고유한 모험은 과거를 그 자체로 해부하고 성찰하는 데서 주어질 사안이 아니라 현재의 사유 활동을 통하여 밝혀질 사건이다. 사건은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밝히는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리는 현실화의 순간에서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사건은 과거의 객체가 아닌 현재의 생성에 부여하는 주체의 활동에 해당한다. 「새 문」에서 황시인은 ‘작은 노트’가 환기하는 과거 경험을 단지 ‘지난 길’을 돌아보는 추억으로의 여행이 아니라 ‘새 문(門)’을 열고 나갈 미래의 사건으로 생성한다.
결국 삶이란 영원히 현재인 끊임없는 활동이라 규정해야 하는 것인가. 황인덕 시인은 과거를 불러내 그것이 영원히 현재일 뿐이라는 사유 활동을 통하여 시쓰기를 수행한다. 시조 형식이 선입견으로 품게 마련인 전통의 회고적 달성이라는 상투적 개념은 그 사유의 활성화에 의해 생생한 현재의 시간으로 바뀌게 된다.
열 가지 재주꾼 저녁 끼니 간 곳 없다
옛 어른 전한 말씀 맷돌 속에 새겨 두고
운명과 드잡이하며 소매 걷는 어머니
죽으면 흙 될 몸 삭신 아껴 무엇하리
허기가 목에 차면 허리 졸라 요기 삼고
온몸을 감아 돌리며 악문 이도 함께 간다
끝없는 밀당 속에 설움도 풀어내며
맷돌 틈새 억눌린 삶 들들들 갈아내면
하얗게 닦인 중수리 닳고 남은 뼈마디다.
-「맷돌」 전문
「새 문」의 ‘작은 노트’와 같은 방식으로 여기에는 ‘맷돌’의 형상이 엄청난 잠재적 이미지를 가지고 구축된다. 그것이 어머니를 가리키고 있다는 은유의 논리를 아주 쉽게 찾아내게 되지만 침묵으로 간직하고 있는 의미의 층위는 한껏 깊어져 오는 것이어서 그것을 추단하기가 쉽지 않다. 어머니의 삶이 형성하는 침묵하는 말은 맷돌의 형상으로도 모두 담아내기 벅찬 무게와 깊이를 가진 것이라고 우선 단정해 본다. 그것은 어머니를 하나의 형상으로 드러내기도 하지만 오히려 당신의 부재를 드러내며 공허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어머니는 그렇게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말할 때 저 그리움의 공백으로 사라져 버리는 한없이 애처로운 영혼이시다. 어머니의 절대성은 이 침묵의 이미지에 실리어 시적 자아를 포획하는 진실의 울림으로 피어오른다.
시적 질료로 사용되는 맷돌은 그것의 물질성을 어머니의 헌신하는 생애와 유비하면서 그것을 비물질성의 기호로 만든다. 강인한 맷돌의 무참한 노역은 어머니의 “온 몸을 감아 돌리며 악문 이”이자 ‘설움’이고 ‘억눌린 삶’으로 환치된다. 시조 작품의 형상 속에서 맷돌이라는 사물은 어머니의 운명으로 의인화된다. 어머니는 맷돌과 닮아있음이 주는 강렬한 인상 속에서 굳건한 정신의 화신으로 되살아난다. 맷돌이란 존재자의 존재는 이 정신의 현실성을 생산하면서 생생하게 고유화된다.
어머니의 진실을 담아내는 맷돌은 그것의 물질성을 방출하면서 그것이 어머니의 의미이자 가치로 새롭게 경험되어야 한다고 이 작품은 말하고 있다. 맷돌에서 배워야 할 진실은 어머니의 영혼이 간직한 헌신이다. 그렇다면 맷돌은 어머니를 향하는 절대적 표시일 뿐인가. 절대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먼저 알아차려야 한다. 맷돌이 표상하는 의미의 깊이에 도달해야 할 대상은 시적 주체이자 자아이다. 진정한 의미를 탐색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자아의 몫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황시인은 스스로 시적 주체이자 자아가 되어 그 형상이 지닌 진실의 힘에 다가서고자 한다. 이러한 지성의 작용은 그의 시 전편에 흐르는 것이기도 한데,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나 누이처럼 운명적 관계의 절박함에 밀착될수록 그것의 강도는 더욱 깊어진다.
삶을 돌아보는 기억의 입구에 그것들은 마치도 표석처럼 놓인다. 작은 노트나 맷돌의 자리에 매미, 큰 배미, 칠판, 감나무, 까치, 씨나락 독, 참꽃, 풀죽 등이 놓이면서 황인덕 시인의 문학행위는 고상한 자아 정체성을 구현해 나간다. 사물의 실재성은 물질적 속성을 지니고 작품 속에 구성되는 게 아니라 시적 자아에 접촉되고 침투되고, 그리고 사유된다. 그것들은 물질에 대한 지각에서 비롯되지만 의식을 일깨우는 강력한 힘으로 마주쳐 온다. 그러한 마주침은 과거의 경험을 현재의 상태와 혼합시키는 마성과도 같은 힘을 자아낸다. 시쓰기를 유혹하는 사물들, 그것들이 하나의 형상으로 그려지면서 한편의 작품은 진실 찾기의 기호가 된다. 그것들이 찔러오는 강렬도가 없었다면 그러한 진실 또한 깊은 즐김의 대상으로 은닉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도래하는 사물들과 마주침에서 황시인의 표현에의 열정은 거의 자동으로 열리기 시작한다.
3
자기 삶을 작품으로 남기는 것은 문학이 지닌 본래의 기능에 속한다. 문학은 무엇인가의 재현임을, 그 실재적인 힘에 기대어 허구의 담론과 형식을 만들어낸다. 황시인의 시조들은 이러한 사실성을 기반으로 하여 고유한 자신만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물론 그것은 삶의 거기 있었음을 단순히 밝혀 드러내는 형식이 아니라 그것에 자신만의 질서를 부여하고 새로운 삶의 동력으로 현실화하는 형식을 고취하면서 구현된다. 현존하는 삶의 의미가 긴요해질수록 더욱 소중하게 맞이해야 하는 대상은 지내온 삶의 내력이다. 부서지고 소멸하여버릴 과거를 불러와서 풍요롭게 미래를 열어갈 정신적 유산으로 삼는다는 것, 그는 그것을 수행할 고상한 지성을 겸비한다. 그는 각인된 기억과 마주하면서 현재의 정신을 구현할 지성적이라 할 문학행위를 줄기차게 수행한다.
할머니 길쌈으로 마련한 큰배미 논
샘물 아래 마르잖는 검은 흙 문전옥답
도장방 쌀독 채워준 우리 집 화수분
다랑논 밟아 내려 때 벗고 번듯한 땅
할아버지 꿈에 그린 한 섬지기 부농 고개
온 골짝 일군 땀방울 쌓아 올린 금자탑
못자리 논 가멸어서 왕마구리 텀벙대고
돌 축대 구멍 깊어 먹구렁이 터를 잡고
아버지 살진 논두렁 흥 지핀 팔자걸음
-「큰 배미」전문
‘큰 배미’는 이 작품의 세계를 구현하는 신성한 장소이다. 이 장소가 인간 존재의 생명을 잉태하고 영유케 한 것이라면, 그것은 일상의 살아감을 넘어서는 초월성을 부여받는다. 생명의 태곳적 순간을 간직한 이 장소를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영원회귀를 꿈꾸면서 그 주체는 실존적 불안이나 고통을 망각해 본다. ‘큰 배미’가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환유에 의하여 하나의 완결적 구성을 지닌 장소로 새롭게 생성될 때, 이러한 장소성에서 진정 위안을 얻으며 생명의 동력을 끌어오는 것은 그것을 회고하며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자이다. 시조 「큰 배미」는 그렇게 시적 주체가 자신의 기원인 장소-세계로 돌아가는 길을 찾고 있는 작품이다.
혹독한 노동으로 엮어진 ‘큰 배미’는 한 가족의 생존을 담보할 그 공동체의 역사이다. 역사는 실증으로 자신을 보증하고 항변하듯이, 이 큰 배미는 허구로는 결코 구조화할 수 없는 진실한 그곳의 역정을 담아낸다. 할머니는 길쌈으로 문전옥답을 장만했고, 할아버지는 ‘다랑논’에서 벗어나 번듯한 땅에 땀방울을 흘렸고, 그리고 아버지는 여기에 터를 잡고 집안을 굳건히 건립했다. 가족의 생계를 견인했던 터전이 한 집단의 정체성을 구현할 장소감을 얻게 되는 것은 그곳에 부여한 정신에 있다. 장소 자체는 그곳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으면서 인간 유대의 가치를 부여하는 적극적인 정신 활동이 없다면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 작품 「큰 배미」는 아무것도 아닐 공터로서의 장소에 적극적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그곳의 얘기들을 가져와 그곳의 우월한 이미지를 만든다. 이 장소 이미지는 경험에 근거하는 실감을 가져오는 것이어서 이곳과의 친근한 유대감으로 얽힌 개인뿐만 아니라 이러한 내러티브와 공유할 다른 사람에게 전이되는 소통의 힘을 지닌다.
장소의 아우라를 품어내는 것은 그것의 지형이나 풍경이 아니라 그곳과 얽혀있는 사람이다. “십 리 골짝 아래위로 / 논두렁 휘돌면서 // 막힌 길 틔워 주고 / 마른 입에 물 대주며 // 봉천답 보듬어 안고 / 귀 기울이던 아버지”(「아버지」 전문)에 집중되어 있듯이, 어떤 장소를 만들어내는 주체는 사람이다. 그들은 그곳에 살아가며 그곳의 특질 지표를 형성한다. 황시인은 기억이 가지는 상기적 특성에 의지하여 과거지사가 되어버린 사건들을 가져와 장소의 상징을 구현한다. 이 장소 이미지의 한 가운데 머무는 존재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등 가족이다. 가족을 이루는 숙명적 인연들의 거처로서 장소는 시적 주체의 실존과 개인 정체성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영원 회귀할 고향으로 신생한다.
등불처럼 순한 눈빛 그늘로 드리우고
고백인 듯 소망인 듯 봄비 같은 목소리로
펼친 책 너울거리며 시 속을 날으셨지
불룩한 윗주머니 손을 자주 넣던 모습
넘치는 흥 고일 때면 감춰두던 쌈지였나
눈으로 전하지 못한 말 시(詩) 싹 틔운 둥지였네
금산천 둑길 위 물길 따라 십여 리를
자전거 두 바퀴에 시심도 굴리면서
물처럼
잔잔히 흘러
옹이 없는 생애였네.
-「금산천 둑길」 부분
고향에로의 기억은 마치 삶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강변하듯이 지칠 줄 모르고 흘러간다. 그것은 몸속에 저장된 무의식적인 잠재태이어서 무수하게 변주될 풍요로운 마주침을 예비한다. 옛일을 회고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때 그곳으로 돌아가서 그곳에 안락하게 거주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과거의 그곳은 단순히 안주나 몽상의 대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의미를 생산하는 적극적인 운동의 공간이다. ‘금산천 둑길’은 그렇듯 현실의 무대로 활성화되는 마주침으로 압도해 온다. 그것은 진실 찾기의 기호가 되면서 작품 「금산천 둑길」의 내포적 의미를 충만하게 채워버린다. 황시인은 자신의 시쓰기가 이 회상 속의 형상에 이미 감추어져 있음을 은밀하게 고백하고 있다. 현재의 자신을 이루는 욕망의 출구가 그렇게 봉인된 과거에 있음을 인식하는 순간, 그것을 꿈틀거리게 만든 오래된 일들과 그 매개적 존재는 절대적 위상을 부여받는다. 그때 우리가 만나는 것은 영원함이다. 무수하게 스쳤을 일들이나 인연을 영원하게 고정하는 황홀한 순간에 시조 「금산천 둑길」은 감미로운 몽상적 형상을 빗으면서 완성된다.
그곳의 여러 장소, 그리고 그곳에 깊게 각인된 사람들, 황시인의 시들은 그리 사무치게 기억되는 체험된 장소와 사람을 불러들인다. 그곳과 그 사람들은 현존의 삶에서도 여전히 마주해야 할 생명 존재의 기원이자 실존 그 자체의 거울이다. 황시인은 이 거울과 대면하면서 자기 모습을 보고 나아가서 살아갈 날들의 마음을 비춰본다. 한 인간 존재의 실존 범주 안에 있음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고향의 이것들은 시조의 형식에 재현되면서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오는 정감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발현되는 정신의 아름다움을 표출한다. 인생을 회고하는 한 사람에게 있어, 살아온 날들의 흔적은 존재의 근거이기도 하지만 새롭게 가동되어야 할 생명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고향을 소재로 재현된 시적 형상들은 기억이 지닌 이러한 이중성을 한없는 그리움을 담아 아련한 몸짓으로 보여준다.
4
흔적들이 기원의 우상을 만드는 게 아니라 현실의 풍요로움이며 앞으로 나갈 정신의 모험에 있음을 하나의 명제로 점검해 본다. 황시인에게 흔적들은 그러한 정신의 뼈대를 세우는 것이라고, 시조의 형식은 정신의 작용을 위한 장치로 사용되고 있는 바라고 정리하여 본다. 작품 「새 문」은 그렇게 흔적을 현실화하는, 도래하는 것들을 위한 사유로 구성된다. 흔적들이 황시인의 시조 형식에 있어 그것의 모델이 되는 재료라고 했을 때, 지금 마주하고 있는 삶 또한 그것에 포함된다고 할 것이다. 작품 전체의 비중으로 보자면 오히려 그것들이 더 압도적이라 말할 수 있다. 황시인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소한 생활 경험이나 여행의 감회를 시조 형식으로 담아내는데 또한 열정을 보인다.
길섶에 구르는 돌 차버리고 싶은 유혹
죄 없는 저 돌도 제 자유 있으련만
오늘은 눈 질끈 감고 지옥으로 쏘고 싶다
지붕 막힌 우물 속에 외눈박이 노닥꾼들
대낮에도 청맹과니 무리 지어 길든 싸움
샘 뚜껑
차내고 싶다
푸른 하늘 눈 뜨도록.
-「어떤 날」 전문
일상생활이란 흔하디흔한 삶의 건조함이고 그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그저 사소하고 지루한 순간들을 오직 포착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사유될 때이다. 문학은 그것을 포집하여 미학으로 만드는데 여기에 필요한 장치가 형식과 사유이다. 황시인은 시조 형식을 가져와 자신의 사유를 담으면서 일상의 무의미한 경험을 유의미한 정신세계로 일군다. 니체가 “인간은 언제나 자기 기쁨 속에서 동일자로 유지된다”(바그너의 경우에서)고 했는데, 이러한 작업에 몰입하면서 황시인은 자기 자신을 즐기며 자기 정체성을 확인한다. 오직 시조만이 삶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되려니, 그 순간 그의 실존은 오로지 시인으로서 유지된다.
‘길섶에 구르는 돌’에서 보아버린 ‘지옥’과 ‘샘 뚜껑’에 갇혀버린 ‘푸른 하늘’이 병치되는 「어떤 날」에서 우리가 찾아내야 할 진실은 작품에 제시된 ‘자유’라는 관념에 있다. 이 관념을 사유한다는 것은 자신의 실현을 향해 나갈 실천의 힘을 예비하는 행위가 된다. 도래하는 것에 자신을 투사하고자 하는 황시인의 이러한 정신은 「촛불」, 「은진미륵」, 「다짐」 등 대다수 작품의 내면성을 지배하는 근간이 된다. 「물을 끓이며」에서, 이는 “핏속에 / 설레는 열기 / 몇 도인지 짚어 본다”라고 더욱 가멸차게 목소리가 높아진다. 물을 끓이는 아주 평범한 일상의 순간에도 그의 사유는 가치 있는 진실을 찾아 생동한다. 아주 사소한 사물과 사건에도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성취가 될 터인데, 그것의 결과물로 주어진 게 황시인에게 「어느 날」이나 「물을 끓이며」와 같은 시조 작품이다. 공허한 일상어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가늠하는 이 문학행위에서 우리가 진정 만나는 것은 그 사유가 품은 정신의 윤리학이다.
“오늘도 / 밤을 기다려 / 등댓불 밝혀 간다.” 「내 가는 길」 3연의 종장에 해당하는 이 구절은 고결한 정신이 어떻게 작용하면서 무엇을 향해 있는가를 한마디로 표현한다. 이 구절은 그가 자기 삶을 성취해 나가기 위해 다짐하는 방법이자 그것을 선도하는 하나의 예언으로 다가온다. ‘내 가는 길’은 현재 살아가는 삶의 지평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살아온 날들의 흔적을 또한 간직한다. ‘젊은 눈빛’이 ‘미지의 섬’을 향해 반짝이던 ‘내’ 삶의 길은 여전히 ‘밤’을 밝혀 살아갈 것을 재촉한다. 그토록 충실하게 지켜낸 정신은 자신에게 도달하면서 현실을 살아낼 힘을 준다. 오늘을 살아가는 정신의 현실성은 끊임없이 단련해온 자기 자신의 산물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밤의 그림자가 몰려들 때만 날아오른다고 했는데, 황시인은 바로 그 “밤을 기다려” 세계에 대한 사유를 완성해 나간다. 잠시의 해찰이나 게으름도 결코 끼어들 여지 없이 자신을 질정하는 수도자와 같은 인생 여정이 압박해오는 이 순수한 삶의 궤적에서 시인 스스로 맞이하는 것은 절대정신에 대한 향락이다. 그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승화됨은 이제 사유를 벗어나 시적으로 감각되고 직관되는 정신의 심연을 이루기 때문이다.
찬바람에 떠나는 비행 몇 번이나 거듭했나
지구촌 다 밟았을 오지 탐사 반복 순례
아직도 갈 곳을 찾아 벼랑 끝에 몸 가누나
몸 작아도 뜻 높아서 가지 끝 잡고 서서
낙하산 고이 접어 염원도 품어 안고
북풍이 몰아칠 때면 문 박차는 자유 영혼
날다가 쉬다가 무한대 넓은 항로
생명 뜻 전하려는 약속 없는 미지 여행
날아라
마음 닿는 곳
사막으로 동토로.
-「순례(巡禮)」 전문
여기서 ‘순례’는 세계의 밤으로부터 ‘등댓불’을 밝히는 경이로운 바깥의 체험을 의미한다. 삶 전체를 들어 올려 도달한 정신, 그것이 만든 인륜적 자기의식은 세상을 끌어안을 긍정의 에너지로 충만하다. 앎의 장막을 씌운 어두운 ‘밤’으로부터 ‘자유 영혼’이 향유하여야 할 정신을 탐색하는 방법으로 여기 외유가 주어져 있다. “사막으로 동토로” ‘미지 여행’을 떠나는 주체는 ‘자유’를 전파할 ‘생명’이고자 한다. 간절한 영원이 담긴 ‘순례’의 행로에서 만나는 것은 휘황한 문명이 아니라 사막이고 동토이다. 반인륜의 형벌이 암울하게 드리운 그곳으로 향하는 정결한 정신이 진정 향하는 곳은 고통받는 타자들이다.
황시인의 시조가 지닌 창조 형식의 또한 부류는 국내외 무수한 여행들에서의 마주침을 재현한다. 그에게 여행이란 「순례」에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듯이 ‘반복’되는 ‘순례’이다. 이를 소박하게 받아들이자면, 여행은 정신의 자기 탐구이다. 여행이 주는 거대한 낯섦은 마치도 명저 매천집을 탐독할 때와 같은 융숭한 정신작용과 마주치는 일이다. 이때 일어나는 놀라움과 기쁨은 낯섦이 주는 외물에 매개되는 정신의 자기 발현이다. 새로운 마주침을 자기화하는 형식을 그는 ‘순례’라고 숭고하게 명명한다. 외재화된 자기 정신을 충만하게 긍정하는 ‘순례’에 깃든 의식은 그의 여행 시편들에 부단하게 증식되며 인간 존재의 풍요로움을 선사한다.
5
사람들은 종종 영점에서 다시 시작하기를 꿈꾼다. 황인덕 시인의 시쓰기는 바로 이 영도의 삶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삶을 재현하면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기존의 삶을 외면하거나 폐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시의 형식에 들여오면서 충만한 정신으로 거듭날 탈구의 힘을 부여한다. 그것은 기억과의 마주침으로, 때론 일상 생활과의 마주침으로, 그리고 때론 외유를 통한 마주침으로 방향을 달리하면서 삶의 모든 순간 속에서 진행된다. 질료로서의 그것들은 한 인간의 삶에 강렬하게 정신의 힘으로 마주해온다. 시조가 지닌 규범적인 형식은 그것을 새롭게 발현될 정신으로 빚어내는 데 유용하게 활용된다. 형식이 질료를 규정하듯이 삶이 시를 통해 규정된다. 시조의 리듬이 다른 문학 형식들에 비하여 지나치게 제약하는 통제와 예속의 수단을 그는 자신의 정신을 조직하여 질서를 부여할 안정성의 기제로 활용한다. 그것은 황시인이 ‘영혼’의 ‘자유’라 스스로에게 부여한 관념의 리듬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것을 관념의 리듬이라 지칭함은 그것이 지닌 형식적 통제를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시인 자신은 그것을 긍정하고 또한 향유한다.
긍정하고 향유할 수 있는 문학 정신을 가진다는 것은 적어도 예술 세계에서는 아주 드문 일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은사로부터 온 도덕감정이 그러한 절대정신의 토대를 이루고, 삶의 과정에서 부단히 자신을 검열하면서 닦아온 인륜적 정신이 함께 상호 작용하면서 그토록 행복한 정신을 만든다. 시조 형식은 행복하게 상승하는 긍정의 삶과 영혼을 표현하기에 너무도 적합한 양식의 전통을 우아한 규범으로 전승한다. 삶 속에서 가장 진부하고 덧없고 취약했던 시간을 정신의 윤리학으로 만들면서 시조 양식 자체는 형식적 체제와 리듬을 보수적으로 지속해 왔다. 황시인은 지나가 버린 낡은 형식으로 외면할 수도 있는 시조 형식을 사용하면서 그것이 가져올 형식적 잉여를 최고로 끌어 올린다. 형식의 실체는 정신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닐 터이다. 황시인은 시조 형식에 정신의 모험을 담으면서 자기 삶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고 자신만의 시조 형식을 창조한다. 그러한 형식을 얻는다는 것은 그에게 참된 삶을 구성하는 참된 자기의 발견. 곧 윤리적 정신의 구현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자기 삶에 충만하게 대면해 있는 황시인의 시조들은 참된 것의 효과를 구현할 참된 정신의 이미지들로 풍요롭게 현실화된다.
작가 소개
지은이 : 황인덕
전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충남대학교 교수 재직(1989.2〜2020.8.) (현) 명예교수, 어문연구학회 회장 역임중국 중앙민족대학 방문 교수(2006), 중국 화중사범대학 해외 석학 초빙 강연(2018)저서: 『부여 백제전설 연구』 외 8종, 구전설화집 : 《이몽득 구전설화》 외 11종 논문: 「에밀레종 전설의 발생과 전래」 외 130여 편. 《시조문학》 신인 등단 (2024.6), 《공무원문학》 신인 등단 (2025.6)
목차
•서序 – 매미처럼
1부 내 가는 길
어느 이별
먼 길
새 문
환희
또 다른 해방
농사
의례
비상飛翔
후회
물을 끓이며
버릇
여름 한낮
내 가는 길
시조의 길
비원悲願
종심從心
여정餘情
매미
지렁이
무지개
까치
기원
묵은 맛
2부 재 너머 고향
심심산골
맛
맷돌
큰재
어머니의 베 짜기
어머니
큰 누님
아버지
숙명
살포
큰배미
씨나락 독
장산長山
입향入鄕
칠판이 있던 자리
아버지 얼굴
감나무
인송忍松
무자수
벌초伐草의 계절
꽃타래
봄
3부 연륜의 숨결
동행
한마음
여운
생성
연륜
부부
광복절 아침
매천집梅泉集을 읽고
k-문곡성文曲星
기도
세모歲暮
맥박
역驛
흰둥이
소망
은진미륵
영국사寧國寺 은행나무
어떤 사랑법
금산천 둑길
촛불
어떤 날
가지안테프의 기적
다짐
선조의 유향遺香
4부 여행의 길섶
남도 여행
보길도 탐방
싱가포르에서
대만臺灣 여행
북해北海도 비에이美映
5부 내일을 꿈꾸며
허무한 꿈
지지향紙之鄕에서
저녁 길
본연本然
길 찾기
천둥
상황
유감
혁신
오천항鰲川港
서산 바다 외딴 민박
다누리호
순례巡禮
충청도
나침반
옥계폭포
승강기
완성
우수雨水
풍경風磬
수덕사 대웅전
동화사에서
하계 올림픽 2024
■ 해설: 삶을 긍정하는 충만한 마주침__송기섭
■ 저자 후기__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