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서울의 부유하고 유명한 가문에서 고르신다면 엄 승상 댁의 손녀만 한 이가 없고, 현명한 처자를 원하신다면 신성 지방의 사 급사 댁 따님이 마땅할 것입니다.”
이에 유 소사가 말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부귀가 아니라 여인의 현명함이다. 신성 지방의 사 급사라면 내가 아는 한 분명 높은 이름과 곧은 절개로 이름이 난 바로 그분일 것이다. 그 집과 혼인하는 것이 좋을 것 같으나 그 처자가 지혜로운지는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주 매파가 대답했다.
“쇤네의 사촌 동생이 바로 그 댁의 하녀입니다. 그 처자의 유모이기도 하지요. 사 급사의 장례 때 쇤네가 그 댁에 가서 직접 뵌 적이 있습니다. 그때 소저의 나이가 열셋이었는데도 벌써부터 얼굴에 온화하고 덕망이 넘치는 모습이 보였고, 그 자태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지요. 글공부도 깊고 글을 짓는 솜씨도 매우 뛰어나다고 들었습니다.”
유 소사의 누이인 두 부인이 이 말을 듣고 생각하다가 말했다.
“우화암의 여승 묘희는 이미 높은 도를 지녔고 사람 보는 식견도 갖춘 사람이지. 사오 년 전에 나에게 ‘신성현 사 급사 댁에 젊은 처자가 하나 있는데 국색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주 매파가 본 것을 고려하면 사 급사 댁 딸은 반드시 연수의 좋은 배필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혼사는 인륜지대사이니 함부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느 늦은 봄 음력 삼월이었다. 온갖 꽃들이 정원에 만발했다. 꽃을 감상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계절은 없을 것 같았다. 마침 한림은 천자를 모시고 서원에서 열린 잔치에 참여하고 없었다. 사씨 부인은 홀로 책상에 기대어 조용히 서책을 읽고 있었다. 이때 하녀인 춘방이 부인에게 말했다.
“화원에 모란이 만개했습니다! 부인께서 꽃을 감상하신다면 꽃들도 즐거워할 것입니다.”
사씨 부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하녀 대여섯 명과 함께 화원의 정자 앞으로 갔다. 버드나무 빛이 난간에 드리워져 있었고 온갖 꽃향기가 그윽하게 옷자락에 배어 들어왔다. 화려하면서도 아늑하여 참으로 아름다운 경관이었다. 부인은 하녀에게 차를 끓이게 하고 교씨를 불러 함께 꽃을 즐기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홀연히 바람결을 타고 거문고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부인이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곡조가 수심이 가득하고 처량하였다. 진주가 옥쟁반에 구르는 듯하면서도 이슬에 젖은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하였다. 부인은 마음이 심란해졌다. 부인이 거문고 소리를 듣다가 하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거문고 소리가 기이하구나. 누가 거문고를 타고 있느냐?”
“작은 마님의 솜씨입니다.”
부인이 말했다.
“전에는 내가 교씨 부인이 거문고 타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예전부터 저리 연주를 해왔느냐?”
“작은 마님은 항상 안채와 멀리 떨어진 백자당에 머물렀기에 큰 마님께서는 들으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작은 마님은 거문고를 지극히 사랑하시어 한가한 때면 저리 연주를 하십니다. 우리들은 여러 번 들었습니다.”
사씨 부인이 말을 멈추고 다시 거문고 소리를 묵묵히 들어보았다. 얼마 후 거문고 소리가 그치고 이어서 가느다란 목소리로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당나라 때에 지어진 구절들이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조금 가볍다 싶기도 하고 청승맞다 싶기도 하였다. 부인이 다 들은 뒤에 머리를 숙여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하녀인 춘방에게 말했다.
납매가 설매에게 말했다.
“큰 마님의 장신구가 담긴 무슨 상자 같은 게 있나?”
“그런 상자가 방에 있긴 하지만 자물쇠가 달려 있어. 열쇠 꾸러미가 있긴 한데, 근데 어디에 쓰려고?”
“네가 꼭 쓸 곳까지 알 필요는 없잖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이나 하지 마. 만약 이 일이 누설되면 우린 죽은 목숨이야!”
“알았어! 큰돈을 받았으니 그 값은 해야겠지.”
설매가 열쇠로 상자를 열고 사씨 부인의 옥가락지를 훔쳤다. 그리고 그것을 교씨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것은 한림의 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가보입니다. 큰 마님이 가장 아끼는 물건이랍니다.”
교씨가 또다시 설매에게 귀한 선물을 선사했다.
교씨는 뛸 듯이 기뻤다. 바야흐로 동청과 일을 꾸미는 데 있어서 첫 단추가 잘 끼워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무렵 사씨 부인의 모친상 부고가 전해졌다. 부고를 전해 온 사씨 부인의 하인이 교씨에게 사씨 부인의 당부를 전했다.
‘초상을 주관하는 공자의 나이가 어리고 가까운 친척도 없으니, 부인이 손수 장례를 모두 치른 뒤에나 집으로 돌아갈 것 같다. 집안일을 특별히 부탁한다.’라는 내용이었다.
교씨는 사씨 부인의 이런 부탁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면서 즉시 납매를 시켜 조문하게 한 뒤 곧바로 동청과 상의해 냉진을 한림이 있는 산동으로 보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만중
1637년에 태어나서 1692년까지 살았다. 명문가인 광산 김씨 집안에서 태어나 대사헌과 대제학 들을 지낸 문신이자 소설가다. 서인의 핵심 인물로 남인과의 당쟁에 휘말려 여러 차례 유배 생활을 했다. 기사년에 인현왕후가 궁에서 쫓겨나던 일로 남해에 귀양 가 그곳에서 쉰여섯 살로 죽었다. 유배 생활을 하면서 여러 문학작품을 썼다. <사씨남정기>와 <구운몽>도 이 시기에 쓴 것으로 보인다.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은 제 말을 버리고 남의 나라 말을 배우고 있는데, 그것이 제아무리 비슷하더라도 앵무새가 사람을 흉내 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 마을의 나무하는 아이와 물 긷는 아낙네들이 흥얼거려 서로 화답하는 소리가 비록 비속하다고 하나 참과 거짓을 따진다면 사대부들의 시부 따위와는 결코 같이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라며 우리말 우리글로 된 문학을 높이 쳤다. 그리고 진수의 《삼국지》를 읽고 운 사람은 없으나,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읽고는 사람들이 운다면서 소설의 힘을 역사책보다 앞세웠다. 한글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썼고, 악부와 가곡도 지었다면 전하며, 평론집 《서포만필》과 문집 《서포집》이 전한다. 한글 소설을 여러 편 썼을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안타깝게도 더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목차
머리말
주니어 사씨남정기
1. 선의 꽃이 이제 막 봉오리를 맺다
2. 선의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하자 악의 꽃씨가 출현하다
3. 선한 꽃이 피어나려는 순간 악의 씨앗이 뿌려지다
4. 악의 꽃은 봉오리를 맺어가고 선의 꽃은 위기에 처하다
5. 악의 꽃이 피어나고 선의 꽃은 서서히 시들어가다
6. 악의 꽃은 발톱을 드러내고 선의 꽃은 수렁에 빠져들다
7. 악의 꽃은 화려하고 선의 꽃은 잔인하게 짓밟히다
8. 구렁텅이에 빠진 선의 꽃에 한 줄기 빛이 내려오다
9. 악의 꽃에서는 악취가 풍기고 선의 꽃은 침잠에 들다
10. 악의 꽃은 만개하고 선의 꽃은 모습을 감추다
11. 악의 꽃은 끝까지 피어나고 선의 꽃은 겨우 살아나다
12. 선의 꽃은 생기를 되찾고 악의 꽃은 떨어지기 시작하다
13. 선의 꽃은 활짝 피어나고 악의 꽃은 모가지가 떨어지다
주니어 사씨남정기 해설
1. 원저자 서포 김만중의 생애
2. 주니어 사씨남정기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