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보스토크 매거진 이번호에는 타인의 고통을 구경하지 않고, 대면하는 사진가들의 작업들을 모았다. 누군가의 고통을 사진으로 찍는 일은 구경의 혐의를 뒤집어쓰기 쉽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타인의 상처를 카메라에 담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구경이 아닌, 대면하는 일의 과정과 의미에 대해 물었다. 지면 곳곳에 물음에 답하려는 각자의 흔적이 담겼다.
서문보다 먼저 톰 칼멩의 작업이 보인다. 보이지 않는 것과 사진 매체의 관계를 탐색하는 그는 타인을 카메라에 담는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이를 지도 삼아 이후의 작업을 만나러 가면 좋겠다.
의심하고 또 의심할 것
하지만 계속 나아갈 것서문 뒤로 표면에 드러난 상처들을 담은 작업들이 소개된다. 라우라 호스퍼스는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자신을 묘사했다. 그는 여전히 엄습하는 삶의 곤란함과 외로움을 나누고 싶다. 소피 해리스-테일러는 흔하지만 가볍지 않은 피부 문제를 지닌 여성들을 찍었다. 그들은 ‘비정상적인’ 피부를 숨겨야 한다는 압박감을 토로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피부를 새롭게 바라보고 당당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매슈 L. 카스틸은 모겔론스병이라는 희귀한 피부병을 앓는 어머니와 가족들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의 목적은 모겔론스병의 특성과 특이성을 전달하는 것도 있지만, 자신과 가족들이 이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세 편의 글은 타인의 고통에 가까이 있는 직업인들의 이야기다. 방송기자 김인정은 누군가의 고통을 기사화하는 일의 어려움과 두려움을 말한다. 자칫하면 남의 고통을 무례하고 폭력적으로 소비하는 유해한 저널리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매번 고민한다. 어떤 고통을 보여줄지, 이 보여주기가 윤리적인지, 혹은 어떤 고통을 가릴지, 이 가림이 윤리적인지. 응급의학과 전문의 남궁인은 사고로 신체의 일부를 잃는 사람을 매일 같이 보는 자신이 ‘고통의 전문가’ 같지만, 어쩌면 ‘고통의 방관자’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한다. 진짜 팔을 잃어버린 고통은 도저히 알 수 없기에. 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고통은 자신을 직접적으로 찌른다고 그는 말한다. 사진비평가 김현호는 타인의 고통을 전시하고 그것을 놀이 삼는 사진들을 말하며, 윤리적으로 예민한 이들은 어떤 상처도 만들어내지 않기 위해 멈추어 버린다고 쓴다. 하지만 김사과의 서평을 인용하며 이런 멈춤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살피고, 우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항해하자고 제안한다.
다시, 사진 작업이 이어진다. 앞의 작업들이 상처를 둘러싼 당사자들의 감정이 짙게 묻어난다면, <Removals>와 <Car Crash Studies>는 감정을 배제한 채 고통의 원인이나 계기를 냉정하게 바라본다. 마이야 탐미는 뇌종양, 유방암 종양, 절제된 손과 발 등 수술로 제거된 신체의 일부를 찍는다. 언뜻 잔인해 보이지만 보는 이들에게 부러 혐오감이나 충격을 주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변화에 중심을 두고 생각하는 죽음과 질병의 관념에서 벗어나는 이미지를 구상하고 싶은 것이다. 니콜라이 호발트의 사진도 비슷하다. 실제 교통사고 현장인지 연출된 세트장인지 확실히 알 수 없게 작가는 적은 정보만을 제공한다. 그래서 관람자는 계속 생각해야만 한다. 이 사진을 그저 하나의 추상적인 이미지로 보아도 좋을지, 누군가의 고통이 담긴 무엇으로 대해야 할지. 두 작가의 사진 앞에서 우리는 판단을 머뭇거리고, 확신은 자꾸 미끄러진다.
‘타인의 고통’을 마무리하는 뒷부분에는 사회?정치적인 것들과 강하게 얽힌 고통을 담은 작업들이 소개된다. 박지수는 글에서 두 권의 책을 언급하는데, 하나는 일본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들의 유품들을 모아 찍은 이시우치 미야코의 사진집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이 남긴 흔적과 자국을 조망하는 소피 리스텔휴버의 사진집이다. 두 책 다 전쟁의 상흔이 담겨 있지만 그것을 대하는 방식은 다르다. 이시우치 미야코는 모두가 꺼리는 히로시마에 관해 개인적인 반응을 담았고, 소피 리스텔휴버는 ‘인간은 어떻게 파괴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표본을 수집한다.
윤성희는 물류창고 화재사고 희생자 영결식, 구의역 하청노동자 사망 현장,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오체투지 행진의 면면을 찍었다. 사진마다 달린 작가의 글은 담담하지만 아리다. 윤성희는 말한다. 자신이 이해하든 아니든, 이야기할 수 있든 없든, 이런 일은 어디에나 있다고. 자신에게는 다시 볼 것인지, 그만 볼 것인지에 대한 선택지뿐이라고. 그리고, 어쩌면 그래서, 그는 다시 보기 시작한다.
장진영의 작업은 원래 슬라이드쇼 형식의 영상물이다. 반복되는 노동자의 죽음과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을 기사 댓글에서 가져왔다. 고인을 애도는 하나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자는 태도의 댓글들은 일면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사진에 덧붙은 작은 크기의 글들을 함께 보고 있으면, 드러나는 악보다 감추어진 악이 더 무서운 것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김효연은 현재 한국 또는 일본에 살고 있는 여러 세대의 원폭 피해자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합천과 후쿠시마초에 주로 거주하는 그들을 만나 1세대 피해자뿐 아니라 그 이후 세대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물론 처음부터 가능했던 것은 아니고, 1년 정도 그곳에서 살다시피 한 후에야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카메라 앞에 선다는 건 원폭 피해자라고 커밍하웃하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쉬운 건 없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사연을 접할 때마다 고통스러워 그만두고 싶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김효연은 그만두지 않았다. 그 이유가 작가의 글과 덧붙은 인터뷰에 잘 담겨 있다.
이외에도 잡지와 엽서, 영화와 사진 등의 매체가 지닌 시차와 ‘장소’의 의미를 사유하는 유운성의 글과 신정식 작가의 『함께한 계절』을 ‘자기 이미지’라는 용어로 리뷰한 김신식의 글이 실렸다.
여기까지 읽으면 아마 탈진해 있을 것이다. 무거운 주제라 무거운 작업이 많은 탓도 있겠지만, 가볍게 소비되지 않게 하기 위한 작가들의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덕에 우리는 적어도 ‘구경’하지는 않을 수 있다. 어쩌면 ‘대면’은 탈진과 함께 온다.
사진에서 카메라와 피사체는 어떻게 대립하는가? 카메라는 어떻게 상황을 통제하고, 피사체를 자극하는가? 카메라는 무엇을 볼 수 있고, 또 무엇을 숨길 수 있는가?
- 톰 칼멩, 작가 노트 중에서
거울 대신 칼을, 칼 대신 카메라를 손에 드는 순간,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녀의 우울과 자기구원의 스토리가 아니다. 이 모든 과정이 ‘나’를 견디고, 또 견디지 못하는 예민한 감각에서 비롯됐다면, 자신의 고통과 대면하려는 시도라면, 이를 보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동참이다.
- 박지수, <나밖에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