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질병, 혼란, 고독, 파멸, 죽음 등을 테마로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한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대표 단편선. 현대 독일어권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이자 죽음, 절망, 고통, 파멸의 작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집 『모자』(김현성 옮김)가 새롭게 리뉴얼된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평범하지 않은 출생과 어머니와의 애증 관계, 고통스러운 가족사로 인해 죄의식과 저주 속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베른하르트는 죽음과 파멸, 고독과 절망, 정신착란 등 암울하고 음습한 어둠의 정서를 문학적 상상력으로 생생하게 구현해내며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모자』는 그의 단편소설 가운데 열 편(「두 명의 교사」 「모자」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 등)을 선별해 묶은 책으로, “한번 접하고 나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베른하르트만의 탁월한 작품 세계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출판사 리뷰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세계는 한번 접하고 나면 도저히 피할 수 없다”
질병, 혼란, 고독, 파멸, 죽음 등을 테마로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한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대표 단편선!
현대 독일어권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이자 죽음, 절망, 고통, 파멸의 작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집 『모자』(김현성 옮김)가 새롭게 리뉴얼된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평범하지 않은 출생과 어머니와의 애증 관계, 고통스러운 가족사로 인해 죄의식과 저주 속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베른하르트는 죽음과 파멸, 고독과 절망, 정신착란 등 암울하고 음습한 어둠의 정서를 문학적 상상력으로 생생하게 구현해내며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모자』는 그의 단편소설 가운데 열 편(「두 명의 교사」 「모자」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 등)을 선별해 묶은 책으로, “한번 접하고 나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베른하르트만의 탁월한 작품 세계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베른하르트는 1957년 첫 시집을 펴낸 이후 꾸준한 작품 활동을 통해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비평가들의 찬사와 더불어 중요한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초기 작품에는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따뜻한 정서가 표현되어 있기도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서정성은 모두 사라지고 불합리한 세계, 자연의 무자비함, 부조리한 인간 조건, 야만스럽고 냉혹한 인간성을 묘사하기 시작한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질병으로 죽어가거나 자살하거나 살인하거나 살해당한다. 그의 작품에는 줄거리나 플롯 없이 다만 누군가의 죽음만 주어져 있고, 그가 죽기까지의 정신적 혼란의 과정이 서술되어 있을 뿐이다. 그의 문장은 이 죽음과 광기에 대한 긴장을 고조시키기 위해 병렬과 대비로 과장하고 반복하고, 빠른 속도로 패러독스를 계속하며, 형용사와 부사는 언제나 최상급으로 사용한다. 그는 독일어 문장의 특징을 십분 발휘해 끝없이 이어지는 종속문의 사슬 속에 수많은 쉼표와 느낌표, 쌍점 등을 흩뿌려놓고, 동의어를 끝없이 반복하고, 때로는 구나 절뿐만 아니라 문장 전체를 반복하기도 한다. 주인공의 정신이 비정상적인 상태임을 나타내는 이러한 광적인 문장은 읽는 사람의 머릿속까지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한다.
베른하르트는 삶에 대한 어떤 기대도 환상도 갖고 있지 않다. 삶에 환상이 없기 때문에 그의 문학에도 환상이 없다. 베른하르트는 노발리스와 카프카의 관념적인 아들로 간주되지만, 그들과 달리 어둠과 죽음을 예찬하거나 구원의 빛을 찾아 헤매지 않는다. 베케트와도 자주 비견되지만,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다. ‘삶이란 결국 모두 미치고야 말 절망인데도 미래라는 과대망상 때문에 죽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옥 속에서 더듬대고 있을 뿐, 존재론적인 질문들엔 당연히 답이 없다. 같은 주제, 같은 질문의 부조리한 반복만 불가피하다. 이를 통해 베른하르트는 이 세상이, 인간이 처한 조건이 얼마나 잔인하고, 삶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집요하게 설파한다. 그의 절망적이고도 부조리한, 암울한 작품 세계는 독자를 괴롭히고 불안하게 하지만, 비평가 페터 함의 말대로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세계는 한번 접하고 나면 도저히 피할 수 없다.”
이 책에 실린 첫번째 단편 「두 명의 교사」는 두 사람이 산책을 하면서 나누는 대화의 구조를 띠고 있다. 그러나 베른하르트의 작품 대부분이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이 글에서도 한 사람이 자신의 불면증에 대한 보고를 하고 있다(“나는 평생 끔찍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끔찍한 삶을 사는 것은 나의 권리입니다. 그리고 이 끔찍한 삶은 나의 불면증입니다……”). 베른하르트의 작품에서 불면증은 질병, 고통, 광기의 기호로 자주 등장한다. 밤마다 그를 잠 못 들게 했던 창밖에서 울부짖는 짐승이 무엇이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고, 그곳을 떠나왔어도 여전히 불면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표제작인 「모자」에서도 예외 없이 두통과 정신착란과 어둠과 공포, 그리고 완벽하게 텅 빈 절망의 모티프가 작품 전체를 짓누르고 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는 어느 날 길에서 모자를 하나 줍는데, 그 모자를 버릴 수도 지닐 수도 없어서 주인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나’는 모자의 주인을 찾을 수 없다.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그와 똑같은 모자를 이미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쳐서 집으로 돌아와 모자를 쓰고 그 과정에 대한 글을 쓴다.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에서는 어떤 여자를 살해해서 옥살이를 하고 나온 미치광이가 자신이 죽인 여자의 옷을 기억처럼, 형벌처럼 뒤집어쓰고 겨울 거리를 돌아다닌다. 살인자의 삶이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자신은 극장에서 상연되는 연극이 비극인지 희극인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삶이 곧 연극이라는 오래된 비유대로 극장 안에서나 극장 밖에서나 연극이 상연되고 있다. 그리고 삶은, 세계는, 희극이라고 끝맺는다.
「야우레크」에 등장하는 채석장과 돌무더기는 시시포스나 강제수용소에서의 중노동을 연상시킨다. 주인공은 채석장으로 올 때 결심한 계획을 실행하지도 못하고 그곳을 떠나지도 못하는데, 그래서 채석장에서의 체류는 종신형이다. 소통 단절과 비인간적인 음울한 관계 속에서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 그는 무력감에 빠져 우스갯소리만 만들어낸다. 작품 속 주인공의 불행의 원인, 복수의 대상은 모두 수수께끼로만 존재하며, 그의 삶의 목표였던 복수극은 아무도 웃지 않는 코미디에 자리를 내주었다.
베른하르트의 작품에는 숲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거나 죽는 사람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러한 숲의 혼란은 곧 내면의 혼란을 상징한다. 「프랑스 대사관 문정관」의 등장인물도 숲에서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가 자살했는지 살해당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주인공과 독자 모두 숲의 어둠, 존재의 암흑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따름이다.
「인스브루크 상인 아들의 범죄」에 등장하는 무자비한 부모, 악의에 찬 가족 등 끔찍한 혈족에 관한 묘사는 베른하르트의 작품의 단골 소재다. 비극적인 유년의 기억을 가진 화자와 게오르크는 빈에서 만나 그들의 잃어버린 유년기를 되새긴다. 그들에게 빈은 유배지이며 거대한 묘지다. 게오르크는 유년의 기억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자살하지만, 가족들은 그의 슬픈 운명을 범죄로 단죄한다.
「목수」는 감옥에서 석방된 지 얼마 안 된 목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처음에 그는 난폭하고 공격적인 성향의 범죄자로 묘사되지만, 사실은 비정하고 굴욕스러운 상황의 희생자이며 삶의 조건 자체가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밝혀진다. 변호사는 세상 자체가 난폭하고 비열하기 때문에 범죄자는 환경의 산물이라고 생각하지만, 목수는 삶에 대한 어떠한 환상도 착각도 품지 않는다. 독자들은 앞으로도 목수가 사회적 소외 속에서, 절망 속에서,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계속 살아가리라는 예감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슈틸프스의 미들랜드」에 등장하는 슈틸프스의 상속인들은 이미 복구할 수 없게 되어버린 농장을 복구하지 않은 채로 일상을 살아간다. 고의적으로 예술적 유산인 가구와 그림이 썩어가도록 방치하고, 도서관을 폐쇄한 다음 그 열쇠를 강물에 던져버린다. 갖가지 자살 방법이 나열되고, 절망과 무력감에서, 자신들도 웃기는커녕 지겨워하는 음산한 유머를 되풀이한다. 그들의 삶은 자살이나 죽음으로 끝맺음 되지 않지만, 고통의 끝이 영원히 반복되는 미래로 연기되기에 더욱 절망적이다.
「비옷」은 아들을 두려워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오스트리아의 전통과 누대의 작업을 해체하고 파괴하는 아들, 해체와 파괴를 두려워하는 부모 세대,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 불가능성이 작품의 주제다. 또한 베른하르트의 작품에는 죽은 자의 유물을 가짐으로써 그 운명을 되풀이하는 인물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글에서도 투신자살한 사람의 유물인, 강에서 주워 올린 비옷이 그 옷을 입은 사람에게 운명이 된다.
「오르틀러에서」는 예술가와 과학자인 두 형제가 중년이 되어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부모의 유산인 오르틀러 농장으로 향하는 동안 일어나는 사건과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농장으로 올라갈수록 그들은 점점 더 유년기의 기억에 압도된다. 오르틀러는 부모의 무자비함에 쫓기던 유년기의 기억과 삶에 대한 비탄, 원한을 되짚는 도정이며, 그곳이 치명적인 장소임을 형제는 알고 있다. 형제는 온갖 불행을 상기시키는 곳을 마지막 도피처로 찾았으나, 오두막은 무너져 흩어진 채 돌무더기만 남아 있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나 돌아가는 길 모두 봉쇄되어 있다.
점심시간에 산책을 하는 것은 내겐 이미 습관이 되었다.
“나는 평생 끔찍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끔찍한 삶을 사는 것은 나의 권리입니다. 그리고 이 끔찍한 삶은 나의 불면증입니다…… 하지만 이제 내가 인스브루크 학교를 그만두게 된 이야기를 하지요. 나의 모든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이 이야기도 내가 잠을 자지 못한다는 사실로 시작됩니다. 나는 잠들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방법을 시도해보았지만 어떤 방법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북쪽 강기슭을 따라 여러 시간 동안 달렸습니다. 모두 피곤했죠. 책을 읽음으로써 불면증에 대한 생각을 잊어보려고도 했지만 그러지도 못하고 눈을 뜬 채 평생 불면증에 내던져져 한 가지 생각에만 맹렬하게 사로잡혀 계속 혼잣말을 합니다. 학생들은 잠잔다, 나는 잠자지 못한다, 저들은 잠잔다, 나는 잠들지 못한다, 나는 잠들지 못한다, 저들은 잠잔다, 나는 잠들지 못한다……” (「두 명의 교사」)
모자를 쓴 나를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그곳을 뒤덮은 어둠, 산골 전체에 깔린, 산골 전체와 호수의 물 위에까지 온통 뒤덮인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모자를 쓴 나를 본다면 내가 푸주한이나, 나무꾼이나, 농부인 줄로 생각할 것이다. 사람들은 옷차림, 모자, 외투, 신발 등을 보고 얼른 판단해버리고, 얼굴이나 걸음걸이, 머리를 움직이는 모양 등은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옷차림에만 주의하고, 입고 있는 저고리나 바지와 신발, 그리고 물론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쓰고 있는 모자만을 본다. 그러므로 이 모자를 쓰고 있는 나를 보는 사람에게 나는 푸주한이나 나무꾼이나 농부인 것이다. 그러므로 푸주한도 나무꾼도 농부도 아닌 내게는 이 모자를 머리에 쓰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이고 기만행위다! 법률 위반이다! (「모자」)
작가 소개
지은이 : 토마스 베른하르트
현대 독일어권 문학을 대표하는 문제 작가이며 세계 무대에서 브레히트와 더불어 가장 많이 공연되는 극작가다.1931년에 출생한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모국인 오스트리아와 특수한 관계에 있다. 이 관계는 베른하르트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시작되어 유년기에 형성된 자아와 이후 작가의 작품에서 뿌리 깊은 콤플렉스로 자리 잡는다. 1931년 미혼모였던 헤르타 베른하르트는 사생아 출산으로 부모에게 불명예를 안기지 않기 위해 고향 오스트리아를 떠나 네덜란드 헤를렌에서 혼자 아기를 낳는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이기도 했던 헤르타는 돈을 벌기 위해 출산 후에 바로 갓난아기를 탁아소에 맡기고 한 달에 한두 번 잠깐 짬을 얻어 아기를 보러 갔다. 이를 두고 훗날 베른하르트는 “어머니가 나를 버렸다” 하며 유아기 최초의 상처에 대해 언급했다. 한 살이 채 안 된 어린 베른하르트는 그 후 오스트리아에 사는 외조부모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1970년대에 출간된 그의 자전소설에서 베른하르트는 오스트리아 향토문학 작가인 외할아버지와 이야기꾼이었던 할머니에게서 사랑받으며 자란 유년 시절을 그의 삶에서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때로 기억한다. 어머니 헤르타가 독일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면서 일곱 살 난 베른하르트를 데려다 함께 살게 된다. 그러나 어린 베른하르트는 어머니의 새로운 가족과 다니던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고, 헤르타는 말썽만 피우는 아들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그를 부적응 아동과 청소년을 따로 합숙시켜 훈육하는 교육 시설에 보낸다. 이때 학교에서 받은 가혹한 체벌과 감금, 그리고 나치 소년단인 동급생들의 폭력에 시달린 경험은 그에게 트라우마가 되어 훗날 베른하르트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오스트리아 국가와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에 기저를 이룬다.베른하르트 문학이 오스트리아 사회에 일으킨 돌풍은 오스트리아의 나치 독일 합방 50주년과 빈 부르크테아터의 100주년 기념 공연작인 <영웅광장>(1988)에서 정점을 찍는다. 정치권에서는 그의 작품과 공연에 대해 검열과 금지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여론을 부추겼으며 당시 집권 여당인 자유당 대표였던 하이더는 수도 빈에서 베른하르트를 몰아내고 그의 작품을 금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989년 사망 이틀 전 직접 공증을 마친 유언장에서 베른하르트는 저작권법에 따라 오스트리아 국경 내에서 자신의 작품이 출판·공연되는 것을 일절 금지시켰다. 베른하르트의 이 처사는 나치 시대 때 문인들의 망명에 비견될 수 있는 일종의 “사후(死後) 문학적 망명”(한스 횔러)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목차
두 명의 교사
모자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
야우레크
프랑스 대사관 문정관
인스브루크 상인 아들의 범죄
목수
슈틸프스의 미들랜드
비옷
오르틀러에서 - 고마고이에서 온 소식
옮긴이의 말
작가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