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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58년 개띠의 세상살이
직지 | 부모님 | 2025.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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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나, 애증의 강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아버지는 힘이 셌다. 체구는 작았지만 아버지는 오른팔과 왼팔로 나와 여동생을 안고 마당을 오가기도 했다. 빛바랜 그때의 흑백 사진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부싸움을 많이 했다. 아버지는 종종 주사가 있었다. 어머니는 계속 참지 않았다. 참다가 한계에 이르면 지지 않고 말대꾸를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밥상을 뒤엎었다. 재떨이를 집어던지기도 하였다. 부부싸움이 시작되면 형들은 모두 집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에게 대드는 형들은 없었다. 방에는 어린 나와 여동생만 남아 울고 있었다.
아버지는 막걸리를 좋아했는데, 나는 어린 시절에 막걸리 심부름을 자주 했다. 당시 막걸리는 노란 양은 주전자를 들고 양조장에 가야 살 수 있었다. 양조장 주인은 작은 주전자에 가득 막걸리를 담아 주었다. 걸을 때마다 술이 찰랑거리며 조금씩 넘쳤다. 나는 이왕 넘쳐 버려지는 술이라고 생각하며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막걸리를 조금 마시기도 하였다.
술에 취하여 밤늦게까지 주사를 부린 아버지는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싸리나무 빗자루로 말없이 마당을 쓸었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나오지 않고 북엇국만 끓이고 있었다. 나와 여동생은 방구석에 가만히 옹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런 날 아침에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퇴직한 후 집에만 있었다. 그러다 증평에서 예비군 중대장을 잠시 했다. 아버지가 증평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예비군들을 모아놓고 뭐라고 훈시를 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아버지가 단상 위에 올라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던 모습이 멋있어 보이기도 하였다.
어느 날 국민학교 오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맛있는 고기반찬이 있었다. 오랜만에 고기를 많이 먹었다. 집에서 기르던 개가 없어졌다는 것을 안 것은 고기를 다 먹고 난 다음이었다. 강아지가 안 보인다고 했더니 “방금 네가 먹었잖아.”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나는 집 밖으로 나와 먹은 것을 모두 토했다. 그날 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거리를 돌아다니고 달빛이 흘러가는 개울가에 한참을 앉아 있다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갔다. 이 일은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나서 마음이 우울해진다.
아버지는 나이 80이 넘어서야 술을 끊었다. 밤마다 허리와 다리 통증으로 진통제를 먹어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담배는 끊었다 피우기를 반복했다. 의사가 “담배 계속 피우면 죽습니다.” 해도 며칠 지나면 담배를 피웠다. 내가 집에 있는 담배를 모두 감추거나 버리자 아버지는 불편한 허리와 다리로 담배를 사러 다녔다. 더이상 걷지 못하게 되자 나에게 담배를 사오라고 애원하다 나중에는 호통을 쳤다.
“이놈아, 왜 담배 안 사와. 빨리 사오라고!”
그래도 내가 담배를 사오지 않자 크게 화를 내며 나를 문쪽으로 세게 밀쳤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평택성모병원에 입원하였다가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요양병원을 거쳐 종국에는 요양원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나는 지금 후회한다. 그때 아버지에게 담배를 사주지 않은 것을.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을.

어머니의 삶과 나의 유년


재일동포 2세였던 어머니는 1947년, 여러 형제들과 함께 귀국선을 타고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의 아버지(나에게는 외할아버지)는 부인이 죽자 일본 여자와 재혼하여 딴살림을 차렸다. 어머니 형제들은 더이상 일본에 남아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도 해방의 감격과 기쁨은 잠시였다. 당시 사람들은 극심한 가난에 허덕이고 나라는 좌우 대립으로 아주 혼란스러웠다. 급기야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동쪽끼리 서로 죽이는 살육전이 벌어졌다. 그나마 어머니에게 다행인 것은 어머니 형제들이 경상남도 기장군의 바닷가 마을에 정착하여 직접적인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민군은 이른바 ‘낙동강 벨트’까지 진격하였지만,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다시 후퇴하게 된다.
어머니는 한국전쟁 와중(渦中)에 직업군인과 결혼하였다. 그때 어머니는 19살 꽃다운 시절이었고 아버지는 7살이나 많은 26살, 당시로서는 노총각이었다. 어머니는 2년 터울로 4남 1녀를 낳았다. 나는 1958년 1월, 어느 추운 겨울날 강원도 인제의 군인마을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군인들은 직업상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옮겨다녀야 한다. 내가 태어나기는 최전선 부대가 있던 강원도 인제군 한계리였지만 자라난 곳은 충청북도 증평이었다. 아버지가 증평의 37보병사단으로 전근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유년 시절을 증평에서 보냈다. 약골로 태어난 나는 몸이 아프면 사단에 가서 치료를 받고 약을 타왔다. 특히 피부병이 심해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아파도 돈이 없어 병원에 자주 가지 못하고 월사금을 내지 못해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아이들에 비해서는 유복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는 한국에 와서 몇 년이 지나도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 정착한 나의 외할아버지는 일본에서 생존을 위해 가정에서도 한국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일본인이 되어 일본의 중학교까지 다녔지만, 해방 직후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으로 건너와서는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해 한동안 바보처럼 살아야 했던 어머니의 슬픔을 나는 이해한다.
지금 어머니는 경상도 억양의 사투리를 자연스럽게 구사하지만 일본말을 하지 못한다. 한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부러 일본어를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 당시 일본인이라면 지구상에서 가장 미워하는 한국인들이 동포라 하더라도 일본말만 할 줄 아는 어머니를 좋게 볼 리가 없었을 것이다.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병약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나는 어린 시절 집에 틀어박혀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가 많았다. 어머니는 혼자 있을 때 혹은 나와 함께 있을 때 작은 목소리로 일본 노래를 불렀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다소곳하게 앉아서 노래 부르던 모습이 어렴풋하게 생각난다.
그런데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멜로디가 있다. 살아가면서 종종 나도 모르게 그 노래가 생각나 혼자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정확하게 그게 어떤 의미의 노래인지 알지 못하다가 한국방송통신대학 일본학과를 다니면서 그 노래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 노래의 1절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証、証、証城寺 쇼, 쇼, 쇼조지
証城寺の庭は 쇼조지 뜰은
ツ、ツ、月夜だ 달, 달, 달밤이다
皆(みんな)出て 來い來い來い 모두 나와 와, 와, 와
己等(おいら)の友達ァ 우리 친구들아
ぽんぽこ ぽんの ぽん 둥둥둥 둥 둥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이애숙 교수 번역)

싸리나무꽃이 환하게 핀 달밤에 너구리들이 깊은 산속에 있는 절(証城寺)의 앞마당에 찾아와 장단에 맞추어 흥겹게 노래를 부른다는 의미의 일본 동요였다. 이 노래를 어머니가 나에게 직접 가르쳐준 것인지 아니면 어머니가 자주 불러서 내가 기억하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의 기억은 선택적이다. 왜 나는 나의 어린 시절 어머니가 불렀던 여러 일본 노래 중에 이 노래만 기억에 남는 것일까? 어머니에게 유튜브에서 찾아 이 노래를 들려주었다. 어머니는 “일본 노래네? 그런데 내가 옛날에 불렀다고? 모르겠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
세월은 이처럼 무상한 것이다. 나도 차츰 어머니처럼 소중한 기억들을 하나둘 잃어가겠지.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


1960년대 중반 나의 국민학교 시절에는 사회 분위기가 비장하였다. 손에 갈고리를 끼우고 다니거나 한쪽 눈이 없거나 목발을 짚은 사람들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전쟁의 상흔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정신이상자들도 많았는데, 비 오는 날이면 벌거벗고 뛰어다니거나 길거리에 드러눕는 사람도 있었다. 정신이상자는 주로 중년 이상의 여성들이었는데 한국전쟁 중에 남편이나 자식을 잃은 여성들 일부분이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이 혼미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북한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공비들을 남파하여 남한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라디오에서는 공비가 출몰하여 군경이 합동으로 작전을 벌이고 있다는 방송이 자주 흘러나왔다. 괴산 쪽에 공비들이 침투하여 그들을 소탕하다가 경찰관이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다. 공비나 간첩을 신고하면 막대한 포상을 받는다고 하였지만 나에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수상한 사람이 마을에 나타나면 무조건 경찰서에 신고를 하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비렁뱅이들도 참 많았다. 그들의 숙소는 보강천 다리 밑이었다. 거지아이들은 깡통을 하나씩 들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구걸을 하였다. 시주하러 다니는 스님들도 많았다. 거지나 스님이 대문을 두드리면 어머니는 쌀이나 보리를 조금씩 퍼주었다. 그렇다고 매번 줄 수는 없었다. 그러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나는 어머니 몰래 부엌에 들어가 쌀독에 있는 쌀을 한 바가지 퍼서 거지아이나 스님에게 주기도 하였다.
그런 어두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사람들의 일상은 이어졌다. 나는 성탄절이 다가오면 여동생과 같이 집에서 가까운 증평 성당에 갔던 일이 생각난다. 어린 나에게 예수님은 관심이 없고 예배는 뒷전이었다. 예배 시간은 지루하였다. 마침내 예배가 끝나면 수녀님이 예쁜 카드를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맛있는 양과자와 캔디도 먹을 수 있었다. 나는 성탄절이 지나면 성당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착한 수녀님의 손길은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있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지금은 사라진 성적 우등상 제도가 있었다. 나는 매년 우등상을 타지는 못했지만 여러 번 탔다. 당시에는 ‘치맛바람’이라는 것이 있었다. 나의 어머니도 의상을 곱게 차려입고 학교를 자주 들락거렸다. 학교에 올 때는 항상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그 시절 어머니는 젊고 얼굴이 고왔다. 장교 부인답게 멋을 부렸다. 어머니는 한복이 잘 어울렸다. 내가 증평국민학교 시절에 우등상을 탄 것이 내가 공부를 잘해서인지 아니면 어머니 덕분인지는 잘 모르겠다.

가을운동회는 온 마을의 큰 잔치였다. 마을 사람들은 각각 한 자리씩 차지하고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커다란 솥단지를 가져와 고기는 조금 넣고 배추와 무, 파를 잔뜩 넣은 고깃국을 끓였다. 아이들은 틈틈이 와서 고기를 먹고 음료수도 마셨다. 당시 최고의 음료수는 환타였다. 운동회가 끝나면 증평의 중국집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아이들은 저녁에 짜장면과 다꽝(단무지)을 먹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은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 해도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짜장면을 사주었다.
꼬마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놀았는데, 아직 남녀가 유별한 시대라 그런지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은 섞여서 놀지 않고 따로 놀았다. 어릴 때 어른들로부터 자주 듣던 말이 ‘남녀 칠세 부동석’이었다. 여자아이들의 가장 큰 즐거움은 ‘고무줄놀이’였다. 학교에서는 윤석중이나 윤극영의 ‘반달’, ‘따오기’, ‘기찻길 옆’, ‘새신’ 같은 동요를 불렀지만, 동네에서 아이들이 놀이할 때 즐겨 부르던 노래는 ‘꼬마야 꼬마야 뭐하니’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일본풍의 노래나, ‘무찌르자 공산당(오랑캐)’ 같은 군가였다.
남자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같은 비장한 군가를 아무 생각 없이 부르며 놀았다. 그 가사가 지니는 벅찬 비장미가 아이들은 왠지 좋았다. 아이들의 주된 놀이는 일종의 전쟁놀이인 ‘땅따먹기’나 ‘오징어놀이’였다.
당시는 장애인 아이들이 종종 있었다.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거나 천연두를 앓아 얼굴이 온통 곰보인 아이도 있었다. 침을 질질 흘리고 콧물이 줄줄 흐르는 아이도 있었다. 그러면 나를 비롯한 주변의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에게 ‘비엉신’ 하며 놀려 댔다. 집이 가난하여 거지 행색을 하고 학교에 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면 냄새난다고 옆에도 오지 못하게 했다. 그 시절의 비정하고 무지했던 나의 행동을 지금에서야 반성한다.

증평국민학교 다니던 시절에 아이들은 옆 동네의 삼보국민학교 아이들과 이른바 패싸움(투석전)을 자주 하였다. 날을 잡아 해거름이 되면 아이들은 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여 조를 짜고 작전을 모의하였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면 아이들은 몰래 삼보국민학교 아이들이 사는 마을 근처에 가서 함성을 지르며 작은 돌멩이들을 던지고 돌아왔다. 며칠 지나면 이번에는 삼보국민학교 아이들이 우리가 사는 동네에 와서 일제히 돌멩이를 던지고 달아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행동들이었다. 이제는 두 학교의 아이들이 패싸움을 하지 않겠지.
지금은 증평초등학교와 삼보초등학교 사이에 건물들이 이어져 있지만 그 당시에는 집이 별로 없고 논밭과 야산이 있었다. 아이들은 마치 군사작전 하듯 논밭을 기어가고 야산을 넘어 투석전을 즐겼는데, 아마 이것도 한국전쟁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기성
1958년 1월, 강원도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을 증평에서 보내다.1968년 청주로 이사와 학교를 다니다.1981년 청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다.1983년부터 2012년까지 경기도에서 국어교사 생활을 하다.2012년 청주로 귀향하다.2013년부터 요양원과 주간보호센터에서 요양보호사로 일을 하다.2018년 《요양원 세대》를 발간하다.2022년부터 내수읍 형동리로 귀촌하여 살고 있다.

  목차

머리말__ 5

출생과 학창 시절
아버지와 나, 애증의 강__ 14
어머니의 삶과 나의 유년__ 17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__ 21
방송반 : 영희야, 간첩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니?__ 26
김삿갓 북한 방랑기__ 28
표어의 시대, 수상한 방들의 시대__ 31
증평에서 청주로 이사 가다__ 34
구멍가게 도둑질__ 38
중학교 시절 첫사랑 음악 선생님과 난숙이__ 42
루팡 전집을 사다__ 46
고교 시절의 흑역사__ 48

재수생과 대학생 시절
재수생, 젊음의 노트__ 60
술을 사랑한 친구와 술집 여자를 사랑한 친구__ 65
광복절과 포도__ 70
대학생이 되다__ 73
선유도 밤바다의 추억__ 77
여공과 국문학도의 사랑__ 83
문학소녀인 친구 여동생__ 86
구비문학 조사__ 90
청도극장과 남진__ 93
민주화의 봄 (1979.10. ~ 1980.9.)__ 98
광주민주화 운동(사북과 광주)__ 104

군인의 길
훈련병 때 부르던 ‘짝순이’ 노래__ 110
보고 싶은 황 병장, 목책 공사와 포상 휴가__ 113
삼청교육대 훈련장 경비__ 117
제대하고 보자!__ 119

경기도로 가다
1980년대 초반, 초임 중학교 교사 시절 이야기__ 122
1980년대 학교와 교무실의 풍경__ 127
아이들 단체 기합을 주고 몽둥이를 들다__ 131
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가 문제 교사__ 134
공립학교로 가다. 아이들을 너무 사랑하는 교사들__ 137
승진에 목을 매다__ 141
도둑이 된 아이__ 145
학교, 그들만의 소왕국__ 150
실상사 귀농학교, 명예퇴직__ 154

고향, 청주로 돌아오다
미원면 쌍이리로 귀농__ 158
귀농학교 다니고 미동산 수목원 잡부가 되다__ 162
요양보호사가 되다__ 164
내수읍 형동리 시골 풍경__ 166
어머니, 요양원 가다__ 182
내덕노인복지관 프로그램__ 184
사북에서의 하룻밤__ 187

청주의 어제와 오늘
맑은 고을 청주(淸州)__ 194
읍성에 대하여__ 197
청주읍성의 순교지와 대원군의 척화비__ 201
본정과 5정목__ 206
무심하지 않은 무심천(無心川)__ 211
상호나 지명에 ‘문화’가 범람하다__ 215
청주미래유산 덕성이용원__ 217

맺음말 : 자서전 도시를 만들자__ 221
부록 : 1958년 개띠의 연표 (1958~2025)__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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