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아이고, 내 쌀자루
잡곡을 섞어서 먹다가 흰 쌀밥을 먹으려니 어쩐지 싱거운 듯 입에 붙지가 않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사람의 마음도 입맛도 참 간사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얀 쌀밥을 원 없이 먹고 싶었던 시절도 있었건만 아무 때나 먹을 수도 없었던 쌀밥을 맛이 없다고 불평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쌀이 귀해서 쌀밥은 곤밥이 되고 쌀로 빚은 떡은 곤떡으로 불렀던 시절. 제사가 끝나면 곤밥과 곤떡을 이웃에 돌려가며 나누어 먹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은 제사 음식을 나눠 먹으려고 해도 안 먹으면 어쩌나 망설여지니 참으로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 그래도 우리 마을에는 논이 있어서 제법 제사나 명절날, 소풍날 외에는 구경조차 못 했던 그 귀한 쌀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정미소에서 햅쌀을 도정하는 날은 근처에서 놀던 아이들이 정미소 앞에 줄을 서서 조금만 달라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더러는 매몰차게 저리 가라고 내모는 어른도 있었지만 인심 좋은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조금씩 쌀을 쥐어주곤 했습니다. 갓 도정한 쌀을 입에 넣고 씹다 보면 입안에 맴도는 그 구수함은 지금은 느껴볼 수 없는 추억의 맛입니다.
그 시절. 나는 시내에서 자취를 하며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차비를 아끼느라 매주 집에 갈 수도 없어서 한 달에 한 번쯤 집에 가서 반찬가지며 먹을 양식을 가져오곤 했습니다.
추수를 막 끝낸 가을 어느 날이었습니다. 토요일 오후에 집으로 갔더니 어머니는 정미소에서 갓 도정한 햅쌀을 한 달 양식이라며 싸주셨습니다.
이튿날 저녁.
한 시간을 기다려 겨우 버스를 타고 보니 이미 버스 안은 나처럼 보따리를 든 자취생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무렵 일요일 날 저녁 버스를 타고 보면 언제나 승객은 시골집에 왔다가 시내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야, 학생. 안 들어갈래?”
험상궂게 생긴 차장이 눈을 부라리며 등짝을 미는 바람에 보따리를 미처 챙기지도 못하고 문 옆에 서 있다가 점점 안으로 떠밀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 남자 차장은 왜 그리 소리를 질러대는지요. 무지무지 우악스러워서 무서웠답니다. 버스가 정류소를 지날 때마다 보따리도 사람 숫자만큼 늘어갔습니다. 손님과 짐짝으로 버스 안은 포화상태였지만 차장은 여전히 ‘들어가’를 외치며 안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 시절 시골 버스에 무슨 정원이라는 게 있었겠습니까. 시내까지 가는 동안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려고 차장은 소리소리 질러가며 안으로 들어가라고 악을 썼지요.
나중에는 문을 닫지 못하여 차장은 대롱대롱 매달려서 ‘오라이’를 외쳤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지만 그 시절에는 흔한 광경이었습니다.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 안에서 밟히고 눌리면서 천신만고 끝에 시내에 도착하였습니다. 오다 보니 차창 밖은 깜깜한 밤이 되었습니다. 엄청 많은 학생이 손에 보따리를 챙겨 들고 내렸습니다. 서둘러서 내 보따리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낯선 보따리만 한 개 남았을 뿐 승객이 다 내리기를 기다려 보아도 내 쌀자루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이고, 내 쌀자루.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듯했습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서 차장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저기요. 내 보따리가 없는데요?”
“자기 것은 자기가 챙겨야지. 내가 어떻게 알아?”
차장은 퉁명스럽게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기사 아저씨가 운전석 옆에 있던 보따리를 내주시면서 한 마디하셨습니다.
“누가 바꿔서 들고 간 모양이다. 이거라도 대신 갖고 가는 게 어때?”
도리없이 남의 보따리를 들고 낑낑거리며 자취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침에 밥을 하려고 자루를 풀어보았더니 이건 또 무슨 일입니까? 자루 속에는 하얀 쌀이 아니라 시커먼 보리쌀만 가득 들어있었고, 좁쌀이 들어있는 작은 자루가 또 있었습니다. 덕분에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햅쌀밥 대신 한 달 내내 지겨운 꽁보리밥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제 나이가 칠십 대에 막 들어섰습니다. 내 쌀자루를 들고 간 누군가도 내 또래였을 것이니 아마 지금쯤은 배도 나오고 머리도 허연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되었겠지요?
50년도 더 된 기억 속 한 장면이 느닷없이 떠오르고, 가끔 너나없이 못살고 못 먹었던 시절이 문득문득 그리워지는 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물질이 넘쳐날수록 가치는 전도되고 이웃에게도 함부로 마음을 열 수 없이 점점 메말라가는 세상 탓 아닐까요?
그날 얼떨결에 비슷한 보따리를 들고 내렸다가 횡재(?)한 학생이 남학생이든 여학생이든 누구였든지 간에 지금 만날 수 있다면 참 반가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며 풍족하지는 않았어도 아름다웠던 시절을 추억하고 싶습니다.
내 쌀자루 들고 가신 분, 그동안 잘 먹고 잘 사셨수?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정애
2004년 《아동문학평론》 동화 등단2019년 《어린이 시조나라》 동시조 등단2024년 《월간문학》 수필 등단[지은 책]- 장편동화『형제는 함께 달리는 거야』『소금바치』, 『새벽빛』(공저)- 동화집 『괜찮아 열두 살일 뿐이야』, 『기억을 팝니다』『또또의 붉은 조끼』, 『행복충전소』그림동화 『도깨비방망이는 어디로 갔을까』* 『괜찮아 열두 살일 뿐이야』는 2016 북토큰 청소년 우수도서, 문화포털 어린이 우수도서로 선정 후 번역되어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초등학교 도서관에 보급되었고, 『기억을 팝니다』는 2019년에 서귀포 시민의 책으로 선정됨.[수상]교원문학상, 성호문학상박정희 대통령동화 전국민 공모전 우수상한국해양문학상, 제주문학상전 제주아동문학협회장한국예총제주도연합회 감사 역임
목차
작가의 말 2
제1부 <수필 1>
그리움이 머무는 곳
아이고, 내 쌀자루 10
소멸의 길목에서 15
세월도 흐르고 나도 흐르고 18
바당 싸움 22
돌담, 그리움이 머무는 곳 27
내 역사의 기록들 31
그때 그 여름엔 36
제2부 <수필 2>
인생이라는 파도타기
퇴적된 시간 앞에서 46
인생과 견생 50
버난지와 제주어 57
베란다의 기적 62
바늘과 말주머니 67
최고의 음식 72
디지털 시대의 라디오 듣기 76
동행 80
나무가 좋은 날에 85
꽃무릇을 바라보며 89
제3부 <칼럼 1>
창문 밖 세상에는
손안에 있는 세상 94
키오스크와 서빙로봇 97
진짜 사나이 100
엉물의 추억 104
엄근진을 아십니까? 108
야자수에 관한 기억 112
세상이라는 벽 그 어디라도 붙어서 116
부메랑 120
대취타 하랍신다 124
노블레스 노마드와 제주 128
갓생겟생 131
제4부 <칼럼 2>
소용돌이 속에서
행정체제는 꼭 개편해야 할까? 136
함께 살아남기 140
평등의 덫 143
칼과 펜보다 강한 입 147
저 바당은 메울 수 이서도 150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나라 154
불공정의 바다에서 157
소진과 장의 160
디케 여신에게 164
대한민국은 아프다 167
제5부 <꽁트>
짧지만 긴 이야기
얻은 것과 잃은 것 172
아무나 하나? 180
버킷리스트 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