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하두자 시인은 1998년 문예지 『심상』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한 이후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한국 현대시의 시인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일상의 소소한 장면 속에 깃든 미시적 감정과 존재의 잔잔한 울림을 투명하게 응시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삶의 일상적인 풍경을 마주하면서도 단순한 서정에 머물지 않고, 그 너머에 자리한 내면의 결핍과 관계의 심연을 조심스럽고도 세밀하게 포착하는 점이 그의 시의 특징이다.하두자 시인은 『물수제비 뜨는 호수』, 『물의 집에 들다』, 『불안에게 들키다』 등의 시집을 발표하며 내면 지향적이고 고요한 시적 사유를 펼쳐왔다. 초기 시집에서는 존재론적 응시와 정적인 내면 세계가 중심을 이루었다면, 『불안에게 들키다』에서는 불안이라는 정서를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감정의 미세한 떨림을 언어로 포착해내는 능력을 보여주었다.2020년에 출간된 시집 『프릴 원피스와 생쥐』에서는 이러한 그의 시세계가 한층 더 깊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집에서 하두자 시인은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정서의 층위를 탐색하고, 결핍과 부재의 정서를 담담하면서도 날카롭게 드러낸다. 그의 언어는 과잉되지 않으면서도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따라가며, 때로는 수학적 은유나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찰나의 심리적 동요를 드러내기도 한다. 황정산 평론가는 이 시집을 "결핍과 부재의 언어들"이라는 말로 평하며, 그가 펼쳐 보이는 관계와 존재의 심연에 주목한 바 있다.이런 하두자 시인이 이번에 도서출판 '여우난골'에서 자신의 네 번째 시집 『이별 뒤에 먼 곳이 생겼다』를 냈다.그날우리는 모두 교복을 입고 동원되었다줄을 맞추어 부산항 제3 부두로 걸어갔다애국 소녀가 되어 월남전에 참전하는 맹호부대를 향해 당신들의 안녕을 위해끝없이 함성을 지르며 깃발을 흔들었다장병들과 어깨동무한 당신의 군가 소리가 바다보다 더 높았다맹호부대 용사들아 살아서 돌아오라태극기를 흔들며 외치는 소녀들의 함성에군인들은 주소를 적은 쪽지를 던져주었지울컥거리며 올라오는 용암처럼 던져주던 쪽지에서 옅은 폭탄 냄새가 났다거기엔 당신들의 막막한 주소가눈물처럼 번져 있었다전장에 자식을 보내는 어미의 눈물이 번져있었다배가 출항하자뱃고동 소리가 조문 행렬처럼 길게 울렸다나는 이별 뒤에 먼 곳이 생겨난다는 걸그때 처음 알았다제3 부두를 걸으면야자수 나무가 정글처럼 훌쩍 자라나곤 했다포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부산항 제 3부두어쩌다 신문에 탱크 사진이 실리는 날이면비석같은 파도가 우뚝 솟구치곤 했다― 「제3 부두, 하노이」 전문
지난밤이 하얘나는 좁은 숲을 지나 길고 깊은 부활의 숲을 지나우리라는 관계 속으로 빠져들었다눈이 내려보이는 곳과 지워지는 곳을 낯설어하며무심하게 ‘함께’라 말하며 걸었다사방이 고요했고 허무했고 눈발은말의 수천 수만의 조각으로 솔솔 날려갈라터진 발자국을 덮어주었다손바닥을 비비듯 움푹 패인 귓바퀴 속으로 나는 배신이 한 문장 속에서 오래 맴돌았다‘함께’라는 말은누구도 모르는 사이가 되어은박지처럼 혼자서 창백하게 표백되는 것이었다눈 위에 찍힌 발자국마다 보르헤스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모래의 제국이 자꾸 무너져 내렸다말줄임표 같았다― 「말줄임표」 전문
집은 견고하다 이것은 나의 집착 엉겅퀴 꽃은 동물적이다 이것은 나의 편견비의 손톱이 유리창을 긁어도 저녁은 조용하다 이것은 나의 오독 부드럽거나 둥근 것에 대한나만의 논리가 없으므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린다 거울이 눈동자만 남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난 생각하는 식물로 정의될까 빈말을 욱여넣는 도도새로 정의될까 아무도 없는 밤확, 하고 뜨거운 영혼이 치밀어 오를 때또 다른 궤도로 진입하는 나는 너의 사전에 없는종족 나는 처음부터 나의 밖에 있었으므로너와는 맞아떨어지지 않는나는 자신의 운명을 매단 그물 밖으로독을 뿜는불온한최초의― 「유령거미」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하두자
1998년 《심상》으로 등단하여 시집으로 『물수제비 뜨는 호수』 『물의 집에 들다』 『불안에게 들키다』 『프릴 원피스와 생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