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시각은 거리를 필요로 하는 감각이다. 대상을 아주 가까이에서 본다고 하더라도 주체와 객체는 무조건 서로에게서 거리를 두어야 한다. 아주 짧은 거리라 하더라도 말이다. 이와 달리 후각이나 촉각은 아주 내밀한 과정이어서, 그 감각들로 인지되는 대상은 인지하는 주체와 결합한다.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긴 하지만, 그때 주체와 객체는 하나가 된다. 낯선 사상을 이해하고 파악하고 따라가는 것, 낯선 생각을 건드리는 것 역시 그만큼 내밀한 행동이다. 그것은 나와 저 낯섬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거리를 버리는 행위이며,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버리는 행위이다. 어디에 어떻게 착륙할지도 모른 채 저 아래로 내려앉는 일.
나는 안개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 할 일이 없었다. 보는 행위는 뚫어지게 보는 것으로 변형되었는데, 더 오래 뚫어지게 볼수록 귀가 더 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두 눈을 뜨고 자는 것 같았다. 이 안개는 눈이 더 발전한 것이었다. 안개도 눈처럼 세상을 뒤덮어 숨겼다. 이게 안개의 본성이고 목적이었다. 보는 걸 방해하는 일만큼 한결같이 계속할 수 있는 게 있을까? 관찰자의 눈 속에 있는 세계를 지워 버리는 것, 눈이 멀게 만드는 것, 수천만 개의 물방울을 통해서 말이다.
나는 가시성은 하나의 멍에라고 말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안나
1977년 대한민국 대전에서 태어났고, 1979년 독일로 이주했다. 빈대학에서 철학 및 연극학을 전공했다. 1999년부터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했다. 2004년에 『그림의 흔적Die Bilderspur』으로 데뷔했고, 이후 『얼어붙은 시간Die gefrorene Zeit』(2008), 『밤의 해부학Anatomie einer Nacht』(2012) 등을 발표하며 꾸준히 창작 활동을 이어 오고 있다. 현재 독일어권 문학계가 주목하는 작가로 엘리아스 카네티 장학금, 로베르트 무질 장학금, 오스트리아 문학 국가 장학금 등을 받았다. 『밤의 해부학』으로 유럽 연합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어느 아이 이야기Geschichte eines Kindes』(2022)는 독일 도서상과 오스트리아 도서상 후보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