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삶의 비의에 지치지 않고 존재의 의미를 탐색해나가는 힘차고 또렷한 목소리의 시인 이근화가 신작 에세이 『작은 것들에 입술을 달아주고』를 창비 에세이& 시리즈로 펴냈다. 이번 에세이에는 시 쓰며 아이들을 키우고 노모를 간병하며 또 학생들을 가르치는, 삶과 시라는 두가지 땅에 동시에 발 디딘 채 매일을 일구어나가는 중견 시인의 풍부한 경험과 사유가 차분한 문장에 담겼다. 특히 비상계엄과 포스트코로나, 기후변화와 인공지능 등 지금 가장 주목받는 주제에서 발원한 고민과 성찰은 사회적 진동과 공명하며 동시대인의 마음에 깊은 파문을 남긴다. 동료 여성, 시민, 시인 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써내려가는 필치 역시 예리하고 유려하다. 다양한 주제를 자유롭게 드나들면서도 작가는 자신의 주변과 내면을 관찰하고 돌보는 일을 잊지 않는다. 일상의 소박한 조각에서 작은 행복을 발견해내는 명랑한 어조가 지친 마음에 활기를 보태듯 경쾌하다.캠퍼스 한바퀴는 계속되고 있다. 뜻하지 않게 크고 탐스러운 솔방울을 만나기도 하고, 조그맣고 귀여운 솔방울을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벌레들의 집이자 흙으로 돌아가야 할 솔방울을 이제는 줍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만나기만 한다. 솔방울은 저 혼자 자연의 순리와 질서에 기대어 있다. 국가를 유린하고, 국민을 기만한 자들은 지금 어쩌고 있는가. 상식과 규범에 기대어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솔방울은 평범하고 다정하고 말이 없다. 아니, 종종 말을 한다. 거칠고 뾰족한 말을. 순하고 다정한 말을. 솔방울이 아니었다면 지난겨울부터 올봄까지 아주 힘들었을 것이다.―「솔방울 접사」
웃게 만드는 것,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조금 어루만질 수 있게 하는 것. 그것 또한 비유의 힘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라면 비유 없이 건강하게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굳이 시를 읽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다들 얼마간 조금씩 아픈 곳이 있다. 그래서 상처를 봉합하고 치유할 만한 이미지를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 심호흡하며 머릿속을 비우는 일이 어렵다면, 무엇인가 하나쯤 떠올려봐도 좋을 것이다. 커다란 갈색 항아리, 검고 무거운 피아노, 거칠고 단단한 바윗돌…… 어디 멀리 날아가버릴 것 같은 위태로운 나를 붙잡아줄 것들이 나는 필요하다. 너무 무겁게 가라앉는다면 가벼운 것을 떠올리는 것은 어떤가. 처마 끝에 매달린 물방울, 돌돌거리는 냇물 소리, 곰 모양의 알록달록한 젤리 같은 것.―「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것」
잠깐 샛길을 걷는 일이 내 삶에 꼭 필요하다. 멋진 비유만큼이나 시에도 그런 여유와 헛걸음이 필요하리라. 거칠게 불쑥 솟아오르는 말들, 뜬금없이 튀어나온 생경한 언어들을 쳐내느라 젊음의 에너지를 쏟을 때도 있었으나 이제는 가만히 나를 좀 내버려두곤 한다. 지쳐서 못난 말들이 쏟아져 나올 때 그것이 그대로 시가 되지는 않지만 나답고 익숙한 언어 뒤에 숨어 시인 행세를 하고 싶지는 않다. 시는 나의 자연이기에 내가 그 안에서 끊임없이 나를 솟아오르게 할 수 있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드러누워 나는 시라는 베개에 고개를 고인다. 엄마의 고통 앞에서 아직 나는 어둠과 침묵을 베고 누운 것 같다.―「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것」
작가 소개
지은이 : 이근화
2004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와 산문을 즐겨 쓰고, 그래서 여러 책으로 독자들과 만나 왔다. 그동안 시집 『칸트의 동물원』, 『우리들의 진화』, 『차가운 잠』,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 『뜨거운 입김으로 구성된 미래』, 『나의 차가운 발을 덮어줘』, 동시집 『안녕, 외계인』, 『콧속의 작은 동물원』, 산문집 『쓰면서 이야기하는 사람』, 『고독할 권리』, 『아주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 등을 냈다. 김준성문학상, 현대문학상, 오장환문학상, 상화시인상, 지훈문학상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