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마지막을 알기에 더 충만해지는 삶,
죽음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되는
살아 있는 오늘의 시간에 대하여
“어떻게 더 잘 살 수 있을지만을 이야기해온 내게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준 책.”
- 『자존감 수업』 저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윤홍균삶의 엔딩에서 당신은 어떤 장면 속에 있을 것인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마지막을 쓰고 싶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라는 말로 죽음을 눈앞에 맞닥뜨린다면, 당신은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안녕히 계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작별 인사’를 하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죽음을 똑바로 볼수록 삶은 더 선명해진다.” 20여 년의 시간 동안 말기 암, 파킨슨병을 주로 치료해온 신경외과, 방사선종양학과 전문의 박광우 교수는 이 책 『죽음 공부』에서 더 의미 깊은 오늘을 위해 우리가 죽음을 더 많이 생각하고, 상상하고, 고민해야 할 이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건강할 때는 알지 못했던, 병과 죽음의 시간을 통과하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자신의 죽음의 장면을 그려보고, 그렇게 다시 죽음을 알기에 충만해지는 오늘의 평범한 하루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이야기한다.
일상에 치여 우리는 이 삶의 ‘맺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닥친 질병과 죽음에 환자들은 실망하고, 절망하고, 비관하고, 낙담한다. 죽음 앞에 각기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저자는 과연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삶의 마지막 장면을 써 내려갈 것인지를 질문한다. 가족의 모든 돈을 탕진하고서야 치료를 중단한 남자, 대체 의학만 고집하다가 흉추 12번 뼈가 주저앉은 30대 암 환자, 길어지는 치료에 ‘아버지를 죽여달라’던 아들….
그러나 누군가는 평소 생각해온 죽음에 대한 정의, 늘 그려왔던 상상에 따라 삶의 마지막 장면을 쓴다. 치료 중단을 결정하고 가족에게 둘러싸여 유언을 남기고 영화처럼 떠나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결과가 올지 알면서도 ‘가족과의 마지막 식사 한 끼’를 위해 집으로 돌아간 말기 암 환자도 있다.
“죽음은 실재하며, 모두에게 똑같이 찾아오고, 멀리 있지 않다. 나는 이렇게 우리의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하다 보면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무지를 벗어나, 어느 순간 현재의 삶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삶의 기쁨을 더욱 밀도 높게 느낄 수 있고, 곁에 있는 이들에게 더욱 친절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죽음을 직시함으로써 나 자신의 삶을 좀 더 선명히 인식하고 풍요롭게 살기를 바란다. 내게는 이것이 웰빙이자 웰다잉이다.” -‘들어가는 말’
두려움과 나아감 사이, 다양한 죽음의 장면 곁에서 저자는 명멸하는 순간에도 또렷하게, 나로서 살고 죽을 수 있도록 죽음을 좀 더 똑바로 보는 ‘죽음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죽음이 전하는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고 여명을 명징하게 직시하고, 잡다한 일상의 혼란을 걷어내고, 생의 시간 동안 살피고 보듬지 못했던 것들에 집중하여, 흩어져 있던 삶의 의미를 그러모으는 것이 저자가 생각하는 ‘존엄한 죽음’을 그려나가는 방법이다.
이 책은 저자가 진료를 마치고 환자들과 보호자 곁에서 보고 느끼고 배운 것들을 복기하며 쓴 ‘비망록’이다. 통제할 수 없는 마지막 순간에서, 삶과 죽음의 밭은 경계 사이에서도 우리가 자기 자리를 존엄하게 지킬 수 있도록, 죽음을 알기에 더 의연하고 단단해지는 삶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삶과 죽음의 밭은 경계선에서
마지막까지 나 자신으로 살아 있는
‘웰다잉’을 이야기하다
말기 암, 파킨슨병 명의 박광우 교수가 전하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오늘의 죽음 상상삶의 한끝에는 죽음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없는 듯이 산다. 죽음은 어둡고, 슬프고, 아프고, 우울한 것,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가 된다. 하지만 우연의 삶 끝, 필연의 죽음을 사유하지 않는다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신경외과, 방사선종양학과 전문의인 저자 박광우 교수는 20여 년간 현장에서 의사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삶과 죽음의 ‘경계의 시간’을 관찰했다. 사람들은 모두가 다르게 이 시간을 대했다. 허둥대거나 두려워하거나, 혹은 담담하고 의연하게 생의 남은 시간을 살아나갔다. 환자와 보호자, 죽음을 먼저 대면한 이들을 도우며, 저자는 그 스스로도 죽음의 관점에서 다시 정렬되는 삶의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후회 없는 하루를 살고, 그리하여 후회 없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죽음의 다양한 장면들에 대해 써 내려갔다.
“죽음은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한 뒤에 편안하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한 일과 안 한 일이 있을 뿐, ‘하려고 한 일’은 없다. 한 사람의 죽음 뒤에 오는 산 사람들의 ‘하려 했던 일’에 대한 후회는 영원히 바로잡을 수 없다. 다양한 죽음의 장면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봐왔던 나는 좋은 죽음이 무엇인지 늘 고민한다. 그래서 나는 죽음 후에 다가올 것들을 잊은 이들에게, 그들이 ‘하려고 한 일’들을 할 수 있도록 말을 건넨다.” -213쪽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는 죽음
모두의 죽음 준비는 이 생각에서 시작된다말기 암, 파킨슨병, 치매 등의 질병을 주로 돌봐온 의사로서 저자는 건강할 때 알 수 없는 삶과 죽음의 다양한 사연을 전한다. 그리고 삶의 주체이자 병의 주체로서 환자가 ‘병이 있는 일상’을 꾸릴 수 있도록 구체적인 의학 지식을 함께 전한다. 존엄한 죽음을 어렵게 만드는 의료 현실을 함께 살펴 더 나은 죽음을 위해 같이 고민해봐야 사회적 조건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던진다. 삶과 죽음의 혼란 속에서, 어려운 결정 앞에 길을 잃은 환자들의 최선의 결정을 돕겠다는 의사의 다짐도 써 내려간다.
살아 있는 오늘, 죽음의 자리에 나를 놓다
나에게는 어떤 죽음의 ‘정의’가 있는가 사랑하는 가족, 친구, 친지들이 누워 있는 나의 곁에 빙 둘러 서 있다. 점점 사그라지는 의식을 붙잡고 마지막 목소리를 낸다. ‘그동안 미안하고 고마웠다, 잘 지내다 간다.’ 그렇게 자는 듯이 천천히 눈을 감는다…. 우리가 ‘죽음’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이지만, 저자는 이런 영화 같은 죽음은 없다고 말한다. 엄습하는 고통은 바로 누워서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하고 날카롭고, 의식은 온통 아픔에 쏠려 있다. 누군가는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누군가는 검증된 치료가 아닌 미지의 위험한 희망에 매달리고, 누군가는 온 힘을 다해 마지막 인사를 전하려 한다. 대체로 ‘완치’보다는 통증의 ‘완화’를 치료의 목표로 삼는 말기 암, 파킨슨병 환자들의 곁에서 저자는 다양한 선택들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존엄 있는 마지막 순간, 즉 ‘웰다잉’을 “‘안녕히 계세요.’ 같은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는 죽음”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독자에게 질문한다. 죽음 다음에 남을 사람들에게 어떤 기억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죽음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품고 있는가? 어떤 ‘정의’를 내릴 것인가?
죽음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가 있을 때 우리의 죽음은 그것에 좀 더 가까울 수 있다. 여러 환자들의 죽음 이야기, 그리고 ‘생전 장례식’, 의사의 관점에서 최대한 가까이 관찰한 죽음의 실제 등 죽음을 다른 관점에서 보는 저자의 글은 독자를 생의 마지막 순간으로 가까이 불러들인다.
“체력이 급격히 약해진 환자는 모든 치료를 거부했다. 힘들게 오래 사느니 건강하게 짧게 살고자 한 그의 평소 삶의 철학이 반영된 결정이었다. 오랜 투병 기간 동안 췌장암에 대해 공부하고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이해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혹은 그가 겪어온 통증이 삶을 지속하지 못할 정도로 견디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 나는 환자의 의식이 점차 희미해져갈 때 보호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렇게 10여 명이 넘는 가족 친지들이 환자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그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았다. 마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그는 아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20~22쪽
“어지럽다. 몸이 침대 안으로 쑥 꺼지는 것 같다. 조금씩 눈앞이 깜깜해져온다. 어지럽고 기운이 없으니 눈을 뜰 힘조차 내기 힘들다. 힘들게 실눈을 떠서 바라본 풍경에는 다행히 가족들이 보인다. 나의 죽음을 슬퍼하고 아쉬워할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 조금씩 어두워진다. 의식이 흐려지며 세상이 깜깜해져 온다. 무서운 마음에 ‘죽고 싶지 않아. ’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조금씩 나를 옭아매는 어둠 속에는 극도의 고요함이 묻어 있다. 깜깜해져가는 세상 속에 소리들이 들리지 않는다. 완벽한 어둠과 완전한 무음이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편안함에 다다를 수 있었다.” -207~208쪽
팩트 위에서 삶의 방향을 찾는 것
연명의료결정제도, 그리고 ‘암 상담’ 2020년 한국의 사망자 통계는 77%가 병원에서, 16%가 집에서 생을 마무리했음을 보여준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집이 아닌 곳에서 죽는 것을 객사라 하여 다들 꺼려했고 대부분 사람들이 집에서 삶의 마지막을 준비했다. 그러나 의료 기술이 발전하며 아이러니하게도 병원은 사람을 살리는 장소이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죽음을 맞이하는 곳이 되었다. 2008년 세브란스 병원 ‘김 할머니 사건’을 계기로 존엄사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고, 이는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지 않을 수 있도록 선택하게 하는 지금의 연명의료결정제도로 이어졌다. 그리고 2022년 기준 10만 4000건의 연명의료계획서가 등록되었다.
존엄한 죽음을 통해 존엄하게 완성되는 삶의 시간. 이 중대한 결정을 위해 우리는 병의 팩트를 알고 남은 생의 방향을 다시 잡아나가야 한다. 저자는 병과 싸우는 환자들의 분투를 전하는 곁에, 질병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해외의 암 상담 제도를 소개하며 죽음 앞에 고민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또한 상급 종합병원으로 쏠리는 한국의 의료 현실, 5분 남짓의 진료를 받고 궁금증과 불안을 묻어둔 채 집으로 돌아오는 환자들의 고민, 치료받을 곳을 찾아 헤매는 고충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본다.
좋은 죽음을 위한 거듭되는 고민 사이에서
의사의 역할을 묻다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엄습하는 통증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은 ‘좋은 죽음’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의사를 ‘내비게이션’으로 활용하라고 말한다. 이른바 ‘빅5’ 병원으로 환자들이 몰려드는 상황에서 진료 시간은 턱없이 짧고, 의사와 환자는 깊이 교감하기 어렵다. 어려운 환경이지만 의사는 언제나 진심으로 치료에 임한다. 짧은 진료 시간 안에 환자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정보를 가장 정확하게, 최적의 방식으로 전하고자 노력한다고 저자는 다시금 강조한다. 암 치료는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암의 종류와 병기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대부분의 암 치료는 장거리 경주이다. 경기 중 다양한 변수가 발생할 수 있으며, 이에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따라 완치라는 결승점을 통과할 수도, 혹은 재발과 전이라는 진흙탕 속에서 헤맬 수도 있다. 결승점에 닿기 위해서는 목표를 명확하고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내비게이션이 필요하며, 그 존재가 바로 의사다.
환자나 보호자들이 어려운 판단을 할 때마다, 저자는 의사가 ‘걱정인형’이 아닌지 자문한다. 베개 밑에 넣고 자면 걱정을 대신 해준다는 인형처럼, 어려운 결정이 있을 때마다 더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 더 나은 판단 쪽으로 환자와 보호자의 등을 밀어주는 존재이다. 생물학적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노화라는 질병 앞의 환자, 그리고 조금씩 나빠져가는 환자를 옆에 두고 두려움과 죄책감에 빠지는 보호자들에게, 의사는 그들이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그리고 감정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그들의 고민을 안고 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수많은 죽음을 곁에서 보아왔다. 항상 죽음을 가까이 하다 보니 때로는 오늘의 햇살을 내일 다시 만끽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그럴 때면 모든 일상적인 풍경들이 생경해 보인다. 그렇게 새롭게 마주한 일상의 풍경은 더 이상 나에게 그냥 당연한 것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매일 새로운 하루하루를 지내는 것이 나에게 ‘잘 죽는 법’이다.” -72쪽
죽음을 상기하며 익숙했던 오늘 하루는 좀 더 낯설고 새로워진다. 막연한 공포와 무지를 넘어, 죽음을 나의 것으로 가까이 끌어안을 때 우리는 죽음까지 포함한 더 완결된 삶의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다. 이 삶에 언젠가 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오늘의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 때 우리의 하루하루는 더 다채롭게 꾸려지고, 더 깊은 의미들로 채워질 것이다.
“웰다잉은 ‘편안하고 행복하게 잘 살자’는 웰빙과는 다르게, ‘편안하고 행복하게 잘 죽는 것’으로 정의된다. 삶과 죽음의 밭은 경계선에서 환자들의 마지막 순간을 목격해온 의사로서, 나는 웰다잉이 웰빙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더 나아가 웰다잉과 웰빙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잘 준비하는 웰다잉이야말로 한평생 잘 살아온 웰빙의 정점에서 만나는 같은 가치이다.” (‘들어가는 말’)
“나는 내가 돌보아오던 암 환자의 삶만큼 남겨진 사람들의 삶도 살피려 한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할 뿐 아니라, 환자의 가족과, 가까운 이들이 건강한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자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 의사는 신이 아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늘 정답은 아닐 수 있다. 단지 비슷한 병을 앓았던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치료했기에 환자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 당사자보다 조금 더 많이 알 뿐이다. … 그 누구도 당사자의 고통을 온전하게 알 수 없기에, 환자들이 나의 의학적 지식을 발판 삼아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돕는 것이 의사로서의 내 진심이다.” (‘암에도 상담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