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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마가지꽃
열린출판 | 부모님 | 202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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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황의수 시인의 첫 시조집 『길마가지꽃』은 자연과 계절, 가족과 삶의 노동, 그리고 시간이 남긴 성찰을 단정한 시조의 언어로 담아낸 작품집이다. 시인은 짧은 형식 안에 봄꽃의 기운, 고향의 정서, 부부의 정, 산장과 농장의 일상, 그리고 인생을 돌아보는 깊은 사유를 고르게 담아내며, 전통 시조의 미덕을 오늘의 감각으로 풀어낸다.

  출판사 리뷰

황의수 시인의 첫 시조집 『길마가지꽃』은 자연과 계절, 가족과 삶의 노동, 그리고 시간이 남긴 성찰을 단정한 시조의 언어로 담아낸 작품집이다. 시인은 짧은 형식 안에 봄꽃의 기운, 고향의 정서, 부부의 정, 산장과 농장의 일상, 그리고 인생을 돌아보는 깊은 사유를 고르게 담아내며, 전통 시조의 미덕을 오늘의 감각으로 풀어낸다.

이해설에서 드러나듯, 『길마가지꽃』의 특징은 자연·가족·노동·성찰의 소재를 다루면서도 과장된 감정에 기대지 않고, 장면의 제시와 문장 구조의 균형으로 설득력을 확보한다는 점이다. 특히 여러 작품에서 종장은 단순한 결론이 아니라, 초장과 중장에서 축적된 정서를 다른 방향으로 이행시키는 장치로 작동하며, 시조 특유의 압축과 절제의 미학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표제작 「길마가지꽃」은 봄을 앞두고 먼저 피어나는 꽃의 생명력과 환한 기운을 통해 만물이 들썩이는 회춘의 감각을 불러내며, 시집 전체의 정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절기와 산수, 가족과 고향, 부부의 정, 노년의 성찰, 산장과 농사의 일상, 궁궐과 역사 공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삶의 장면을 시조의 언어로 정제해낸다.

황의수의 첫 시조집 『길마가지꽃』은 자연과 계절의 변화, 가족과 삶의 노동, 그리고 인생을 돌아보는 성찰을 단정하고 절제된 시조의 언어로 담아낸 작품집이다. 짧은 형식 안에 담긴 시편들은 화려한 수사보다 삶의 결을 있는 그대로 길어 올리며, 읽는 이에게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을 전한다.
이 시조집은 표제작 「길마가지꽃」을 비롯해 자연의 순환과 생명의 기운을 포착한 작품들, 가족과 부부의 정을 따뜻하게 담아낸 작품들, 길 위의 사색과 산장·농장의 일상을 그린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시인은 자연을 단순한 배경으로 두지 않고 삶의 태도와 마음의 결을 비추는 대상으로 삼아, 계절의 변화 속에서 인간의 시간과 감정을 함께 읽어낸다.
『길마가지꽃』의 미덕은 무엇보다 절제에 있다.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정서는 선명하고, 장면은 소박하지만 그 안에 스민 의미는 깊다. 전통 시조의 형식미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오늘의 삶과 정서를 현재형으로 끌어안고 있어, 시조를 익숙하게 읽어온 독자뿐 아니라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도 편안하게 다가간다.
『길마가지꽃』은 자연의 숨결, 가족의 온기, 노동의 땀, 그리고 삶을 통과해 온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사유를 한 권에 담은 시조집이다. 짧아서 쉽게 읽히지만,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여운을 지닌 책이다.

■ 해설


『길마가지꽃』의 시적 세계와 서정의 윤리
— 자연·기억·노동의 주제군과 의미 구조 분석


1. 여는 글

“삶은 고통을 통과하는 일이고, 생존은 그 고통에서 의미를 길어 올리는 일이다.” 프랭클, V. E. (2020).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시형, 역). 청아출판사. (원서 출간 1959).


이 짧은 문장은 삶의 고통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그 고통을 통과하는 인간의 방식이 결국 ‘의미의 구성’이라는 점을 환기한다. 실존철학과 의미치료의 논의처럼 삶의 문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규범적 질문에만 환원되지 않으며, 상실과 불완전성의 조건 속에서 삶을 지속시키는 태도와 해석의 기술이 요구된다. 문학은 그러한 지속의 기술을 언어로 조직해 온 예술로 이해될 수 있다. 시조는 그 과정을 길게 설명하기보다 짧은 형식 안에서 핵심 전환을 집중적으로 제시한다. 초·중·종장의 제한된 구조 속에서 감각과 정서를 축적하고, 종장에서 의미의 방향을 꺾어 마감하는 순간, 시조는 삶의 태도를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한다. 따라서 시조의 완성도는 ‘무엇을 말했는가’뿐 아니라, ‘어떤 전환으로 끝맺는가’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황의수 시인의 시조집 『길마가지꽃』은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자연을 단순한 배경이나 감상의 대상으로만 두지 않는다. 여기서 자연은 계절 풍경의 나열이 아니라, 삶의 리듬을 다시 조정하게 하는 하나의 계기이자 기호 체계로 작동한다. 입춘의 빛, 동지의 붉음, 설악의 설경, 밭과 길의 장면은 모두 ‘보기에 아름다운 세계’를 반복 확인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독자의 생활 감각을 환기한다. 이는 자연의 의미를 단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연이 열어 놓는 감각의 문을 통해 주체가 스스로를 재정렬하도록 하는 전략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조집의 자연시조는 찬미의 수사로 완성되기보다, 종장에서 태도의 전환으로 수렴될 때 더욱 강한 설득력을 확보한다.
기억과 가족의 문제 또한 이 시조집에서 중요한 서정적 기반을 형성한다. 문학에서 기억은 종종 아름다운 회상으로 소비되지만, 기억이 강하게 잔존하는 이유는 대체로 그것이 관계의 구조와 역할을 함께 담기 때문이다. 즉 기억은 감정의 장식이 아니라, 관계를 유지하려고 감당해 온 노동과 책임의 흔적일 때 현재의 삶을 더욱 강하게 지탱한다. 이 시조집에서 고향과 가족을 다룬 작품들은 바로 그 지점에서 감상적 회고의 유혹을 절제한다. 누나의 삶과 고향의 물길, 부부 관계의 지속은 미화된 ‘따뜻함’으로만 재현되지 않고, 생활 속의 반복과 수고, 그리고 뒤늦은 자기 점검의 문장으로 구체화된다. 그러므로 이 시조집의 가족 서정은 감정의 과잉이 아니라 관계의 윤리를 통해 성립하며, 그 윤리는 종장에서의 결구 방식에 의해 더욱 분명해진다.
이 시조집이 “서정의 책”이면서 동시에 “태도의 책”으로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삶은 사건 자체로만 바뀌지 않으며, 사건 이후에 형성되는 습관과 리듬이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질병, 노년, 노동의 시간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것이 곧바로 비극의 결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현실을 어떤 언어로 정리하며, 어떤 자세로 통과할 것인가이다. 『길마가지꽃』의 성찰시조들은 거창한 관념을 선언하지 않고, 길·호흡·말 같은 최소 단위를 통해 삶을 다시 구성한다. 여기서 말은 관계를 형성하는 씨앗이며, 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자기 교정의 통로로 기능한다. 시조가 짧은 형식인 만큼, 설명이 길어지는 순간 시는 산문화될 위험이 있으나, 이 시조집의 강점은 상당수 작품에서 종장이 ‘요약’이 아니라 ‘전환’으로 작동한다는 점에 있다.
결국 이 시조집이 보여주는 세계는 중심의 화려함이 아니라, 가장자리의 현장에서 유지되는 삶의 진실에 가깝다. ‘길 마가지꽃’은 시선의 중심에서 비켜나 있지만, 오히려 그 비켜남을 통해 오래 버티고 다시 피어난다. 황의수 시인의 시조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생성되는 언어들을 채록한다. 따라서 이 시조집을 읽는 일은 단지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가족의 추억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 삶을 지속시키는 태도가 어떤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는지를 되묻는 과정이 된다. 그 질문의 끝에서, 시조는 오래된 형식임에도 여전히 현재형의 문학으로 남는다.


2. 절기·꽃·산수의 시학
― 자연은 배경이 아니라, “삶을 다시 쓰게 하는 신호”다

문학에서 자연은 흔히 감탄과 묘사의 대상으로 처리되거나 인간 정서를 비추는 배경으로 배치되어 왔다. 그러나 생태비평의 관점은 자연을 단순한 장식적 공간으로 환원하기보다,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과 감각의 질서를 재구성하게 하는 적극적 범주로 이해하도록 요청해 왔다 김욱동. (2003). 『생태학적 상상력』. 나무심는사람.
. 따라서 계절을 읽는다는 것은 풍경을 감상하는 차원에만 머무는 일이 아니라,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주체의 내적 리듬이 어떻게 변주되는지를 점검하고 삶의 태도를 재조율하는 과정으로 확장된다. 계절은 되풀이되지만 늘 같은 방식으로 돌아오지 않으며, 예년의 봄은 예년의 마음에만 속하고 올해의 봄은 또 다른 결핍과 기대를 끌고 온다. 그 차이는 자연을 단지 바라보는 대상으로 두지 않고, 오히려 삶을 다시 쓰게 하는 신호로 전환시킨다. 결국 자연의 변화는 외부 풍경의 변화가 아니라, 주체가 자기 삶의 방향과 감각을 새롭게 조정하게 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이 시조집 『길마가지꽃』은 그러한 ‘자연의 윤리’를 가장 정직하게 구현한다. 자연이 아름답다는 선언보다 먼저, 자연이 마음을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관찰이 앞선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입춘」이다.

구만리 내린 햇살
유리창 밀고 드니

마음도 활짝 열려
도홧빛 얼굴 피네

일어나
붓을 들어라
입춘대길 봄 마중.
-「입춘」, 전문

“구만리 내린 햇살 / 유리창 밀고 드니”라는 초장은 빛을 ‘부드럽게 들어오는 것’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햇살은 밀고 들어온다. 외부의 변화가 내부의 경계를 눌러 여는 순간이 시조의 사건이 된다. 그 결과로 “마음도 활짝 열려 / 도홧빛 얼굴 피네”라는 정서의 개화가 이어지고, 종장은 마침내 “일어나 / 붓을 들어라 / 입춘대길 봄 마중”으로 닫힌다.
이 종장의 명령형은 매우 중요하다. 자연을 ‘감상’에서 ‘행동’으로 돌려세우는 전환이기 때문이다. 봄은 오는 것이 아니라 맞는 것이고, 맞는다는 것은 결국 삶을 다시 쓰는 결단, 즉 붓을 드는 행위로 구체화한다. 시조의 종장 기능(전환·결구)이 여기서는 생활의 실천으로 재배치된다.

춘분도 오기 전에
서둘러 오셨는가

곱다시 꽃 피우고
향기를 날리시니

만물이 들썩이면서
임을 따라 회춘하네.
-「길마가지꽃」, 전문

표제작인 「길마가지꽃」은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에 ‘달력 바깥의 시간’을 끌어들인다. “춘분도 오기 전에 / 서둘러 오셨는가”에서 계절은 정확한 날짜에 맞춰 도착하는 사건이 아니라, 예감처럼 앞질러 스며드는 변화로 제시된다. ‘오셨는가’라는 경어적 물음은 봄을 단순한 기상 현상으로 보지 않고, 맞이해야 할 손님 또는 임으로 높여 부른다. 이어 “곱다시 꽃 피우고 / 향기를 날리시니”에서 봄은 ‘피어남’과 ‘향기’라는 감각적 징후로 먼저 자신을 증명한다. 즉 자연은 “아름답다”는 감탄의 대상이기 이전에, 삶의 감각을 깨워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촉발로 작동한다.
특히 종장 “만물이 들썩이면서 / 임을 따라 회춘하네”는 이 작품의 핵심 전환이다. 여기서 ‘회춘’은 한 개인의 젊음 회복을 뜻하기보다, 봄이라는 ‘임’을 따라 세계 전체가 다시 생기를 얻는 과정으로 확장된다. 만물이 ‘들썩인다’는 동사는 정적인 풍경을 깨뜨리고, 자연의 변화가 곧바로 공동의 리듬으로 번져 나가는 장면을 만든다. 따라서 이 시조에서 꽃은 젊음의 상징이라기보다, ‘임’의 도착을 알리는 첫 신호이며, 그 신호에 반응해 존재들이 스스로의 시간을 재가동하는 계기다. ‘회춘’이라는 단어가 다소 크게 들릴 수 있지만, 시적 맥락에서 그것은 되돌림의 기적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들이 다시 살아가려는 방향성, 즉 생이 갖는 최소한의 의지로 읽힌다. 결국 「길마가지꽃」은 자연을 배경으로 두지 않고, 인간의 심리적 시간과 세계의 리듬을 함께 교정하는 장치로 제시하며, 작은 꽃 한 송이를 통해 ‘새로 시작되는 시간’의 윤리를 설득력 있게 환기한다.

어둠이 내려앉아 하늘빛 짙어지면
겨울은 깊어지고 별빛은 초롱초롱
한 해를 마무리하며 / 온 누리가 잠든다.

정들인 새알 팥죽 선영께 제 올리면
집안을 감싸주는 붉은 온기 번져 나와
우리 집 안 사랑에도 따스함이 스민다.

햇살은 짧아져도 오늘을 다시 세워
한숨을 고르면서 긴 밤을 지내 오면
땅에서 / 온기 오르며 / 새날 빛이 열린다. -「동지」, 전문

그리고 「동지」는 자연의 서정을 ‘빛’의 언어로만 환원하지 않고, 겨울의 어둠이 오히려 삶을 재정렬하는 시간임을 설득한다. 작품은 “어둠이 내려앉아 하늘빛 짙어지면 / 겨울은 깊어지고 별빛은 초롱초롱”으로 시작해, 동지의 밤을 단순한 우울이 아니라 깊어지는 계절의 질서로 받아들인다. 이어 “한 해를 마무리하며 / 온 누리가 잠든다”에서 동지는 끝의 절기가 아니라, 잠잠한 정리와 휴지(休止)의 시간으로 확장된다. 둘째 수의 “정들인 새알 팥죽 선영께 제 올리면”은 동지 풍속을 호출하지만, 그 풍속을 박물관처럼 재현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의 진행이다. “집안을 감싸주는 붉은 온기 번져 나와 / 우리 집 안 사랑에도 따스함이 스민다”에서 ‘붉은 온기’는 악귀를 쫓는 주술적 효험보다, 가정 내부의 정서적 결속으로 옮겨온다. 민속은 설명이 아니라 감각의 매개가 되고, 팥죽의 붉음은 공동체의 체온으로 전환된다.
셋째 수는 이 작품의 결구를 단단하게 만든다. “햇살은 짧아져도 오늘을 다시 세워 / 한숨을 고르면서 긴 밤을 지내 오면”에서 화자는 동지를 견디는 태도를 ‘인내’가 아니라 ‘재정렬’로 표현한다. 오늘을 다시 세운다는 말은, 하루를 포기하지 않고 다시 배열하는 삶의 기술을 뜻한다. 그리고 종장 “땅에서 / 온기 오르며 / 새날 빛이 열린다”는 어둠의 끝을 단순한 반전으로 처리하지 않고, 땅의 온기가 먼저 오르는 과정으로 제시한다. 즉 이 시조의 회복은 하늘에서 갑자기 내려오는 구원이 아니라, 긴 밤을 통과한 뒤 서서히 올라오는 생활의 온기이며, 그 온기가 ‘새날 빛’을 연다.
결국 이 시조집의 자연은 ‘밝음’만이 아니라, 어둠을 품은 채 다시 따뜻해지는 회복의 리듬을 함께 담는다. 계절은 감탄의 대상이기보다, 한 해를 정리하고 마음을 다시 세우는 윤리적 계기로 작동한다.

하늘서 오신 손님
사뿐히 내려와서

행여나 보일세라
비경을 감추었네

억만년
신비의 계곡
봄이 오면 열겠지
-「설악산」, 전문

마지막으로 「설악산」은 자연의 웅장함을 찬미하는 대신, 감춤과 기다림의 미학을 선택한다. “하늘서 오신 손님 / 사뿐히 내려와서”는 설경을 손님으로 의인화해 친근하게 들이고, 이어서 “행여나 보일세라 / 비경을 감추었네”라고 말한다. 자연의 비경이란 보여주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감추어 때를 기다리는 데 있다는 관점이 새롭다. 종장 “억만년 / 신비의 계곡 / 봄이 오면 열겠지”는 단정 대신 추정형으로 여운을 남긴다.
이 ‘열겠지’는 자연의 시간에 대한 겸허이며, 동시에 인간이 서둘러 결론을 만들지 않는 태도다. 시조가 종장에서 교훈으로 굳어질 위험을, 이 작품은 ‘가능성의 결구’로 넘어선다. 자연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자연은 다만 기다리는 자에게 자신을 연다.

이 주제군의 핵심은 분명하다. 이 시조집에서 자연은 풍경이 아니라 삶을 다시 쓰게 하는 신호다. 계절을 감탄으로 읽지 않고 태도로 읽는 방식, 꽃을 감상으로 붙잡지 않고 자기 점검으로 끌어오는 방식, 그리고 겨울과 설산을 통해 ‘다시 열릴 시간’을 믿는 방식이, 시조집 전체의 윤리를 받쳐준다.


3. 가족·고향·부부의 기억
― 회상이 아니라, “관계의 노동”이 남겨놓은 삶의 근거

기억은 단순히 아름다운 과거를 되감는 장치가 아니라, 삶이 감당해 온 관계의 시간과 정서의 비용을 다시 호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특히 가족의 기억은 개인의 내면에 저장된 장면의 총합이라기보다, 서로를 지탱하고 유지하기 위해 축적된 감정의 노동과 책임의 흔적으로 남는다. 문학비평이 슬픔과 상실의 경험을 단지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이해하고 버티기 위한 사유의 과정’으로 다루어 왔다는 점에서, 기억은 회고의 미학이 아니라 삶을 지속시키는 해석의 기술로 이해될 수 있다 신형철. (2018).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 따라서 고향과 가족을 읽는다는 것은 추억을 미화하는 일이 아니라, 관계가 성립하기까지 작동했던 수고와 인내, 돌봄의 구조를 다시 점검하는 과정이 된다. 황의수 시인의 가족 시편들 역시 ‘그립다’의 정서를 앞세우기보다, 관계가 유지되던 생활의 장면을 먼저 세워 기억을 현재의 윤리로 환원한다. 그 구체성은 누나의 노동을 기록한 시편, 고향의 물길을 삶의 통로로 전환한 시편, 그리고 부부의 시간을 반성의 언어로 정돈한 작품들에서 뚜렷하게 확인된다.

괴뢰가 남침하니
평화가 풍전등화

확독에 보리 갈고
밥 짓고 학교 가는

어린 손
쉬지 않았던
어른 같던 누나야.
-「누나 생각」, 전문

「누나 생각」은 한 개인의 유년 추억을 넘어, 한 시대의 생존 방식을 응축한다. “괴뢰가 남침하니 / 평화가 풍전등화”라는 직접적 시대 표지는 회고의 배경이 아니라 삶의 조건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핵심은 다음 구절이다. “확독에 보리 갈고 / 밥 짓고 학교 가는 / 어린 손 / 쉬지 않았던 / 어른 같던 누나야.”
여기에는 ‘칭송’보다 ‘노동’이 있다. 누나의 위대함이 미덕의 수사로 과장되지 않고, 생활의 반복으로 드러난다. ‘어른 같던’이라는 표현은 어린이가 어른 역할을 대신해야 했던 시대의 폭력성을 은근히 드러내면서도, 그 폭력을 원망으로 확장하지 않는다. 시조는 그저 사실을 놓지 않는다. 가족 서정의 품격은 바로 이 사실성에서 나온다.
큰 냇물 들판 길로 산 너머 엄마네 집
누물 속 고난 세월 건너고 또 건넜지
행여나 넘어질세라 지켜보던 아버지.

시내 돌 긁어모아 걸쳐 놓은 까치다리
추워도 걱정 없이 건너왔던 우리 누나
이제는 세월을 묻고 눈물 어린 그리움.

여름날 큰비 오면 꼴 베며 강가에서
이마에 손을 얹고 살피셨던 깊은 정은
지금도 밀려옵니다! 부모 사랑 한없이.
- 「요천수는 누나의 강」, 전문

「요천수는 누나의 강」은 고향의 물길을 가족사의 통로로 만든다. “큰 냇물 들판 길로 산 너머 엄마네 집 / 누물 속 고난 세월 건너고 또 건넜지”에서 강은 단순한 지리적 배경이 아니라 고난을 ‘건너는’ 삶의 방식이다. 그리고 이 장면의 중심에는 “행여나 넘어질세라 지켜보던 아버지”가 있다.
여기서 가족은 감정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를 지켜보는 감시가 아닌 돌봄의 시선으로 성립한다. 둘째 수에서 “시냇 돌 긁어모아 걸쳐 놓은 까치다리 / 추워도 걱정 없이 건너왔던 우리 누나”는 생활의 질감(돌, 다리, 추위)을 통해 관계의 구체성을 세운다.
마지막 셋째 수의 “이마에 손을 얹고 살피셨던 깊은 정은 / 지금도 밀려옵니다! 부모 사랑 한없이”는 감탄이 아니라 ‘파도처럼 되돌아오는 빚’의 감각이다.
즉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떠받드는 근거로 환원된다.

마음이 허전할 때 머리가 복잡할 때
언제나 위로하고 든든히 지켜주고
때로는 철없는 아이 / 달래며 키우듯이

날마다 해가 뜨니 그 빛은 예사이듯
한평생 베푼 정성 무심코 받아 왔소
고마움 어이 갚을까 / 늙어가는 정든 임.

지난 일 돌아보니 불평등 남존여비
온갖 일 고생하며 집안을 키웠으니
고맙소 그대 위해서 / 남은 시간 살겠소.
- 「고마운 아내」, 전문

부부를 다룬 「고마운 아내」는 이 시조집이 가족 서정을 ‘미화’가 아닌 ‘반성’의 자리로 끌고 가는 대표작이다. “한평생 베푼 정성 무심코 받아 왔소 / 고마움 어이 갚을까 / 늙어가는 정든 임”에서 화자는 감사의 고백을 먼저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음 연에서 “지난 일 돌아보니 불평등 남존여비 / 온갖 일 고생하며 집안을 키웠으니”라고 구조적 현실을 언급한다는 점이다.
이 대목은 부부 서정이 감상적 칭송으로 끝나지 않게 하는 윤리적 장치다. ‘아내가 좋다’가 아니라, ‘내가 어떤 시대의 습관 속에서 무심했는지’를 먼저 드러낸다. 종장 “고맙소 그대 위해서 / 남은 시간 살겠소”는 감정의 마무리가 아니라 삶의 방향 재설정이다.
시조의 종장 전환이 관계의 새 계약으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이 주제군의 미덕은, 가족을 ‘따뜻한 기억’으로만 다루지 않는 데 있다. 가족은 시대를 통과하며 굳어진 노동과 희생의 집합이며, 그 집합이 오늘의 나를 지탱한다. 시인은 그 지탱을 미화하지 않고, 되레 그 무게를 정확히 인식함으로써 서정의 진정성을 확보한다. 그래서 이 시조집의 가족 시조는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가 스스로 자신의 관계를 돌아보게 만든다. 가족이란 결국 “사랑했다”라는 말보다 “살펴 주었다”라는 행위로 증명된다는 사실을, 이 작품군은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보여준다.


4. 삶의 성찰과 말의 윤리
― “길”을 사유하는 시조, “말”을 단련하는 시조

삶을 성찰한다는 것은 경험을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경험을 어떤 언어로 책임 있게 구성할 것인가를 묻는 과정이다. 말은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과 나의 무관심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고, 감정의 방향을 행동의 윤리로 전환시키는 매개가 된다. 손택이 ‘고통을 바라보는 방식’이 곧 윤리의 문제임을 강조했듯,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기억하는가는 감정의 소비가 아니라 책임의 형태를 결정한다 손택, 수전. (2007). 『타인의 고통』(이재원 역). 이후.
. 그러므로 ‘말의 윤리’는 예쁜 말의 선택이라기보다, 말이 관계를 손상시키거나 지탱하는 힘을 가진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데서 시작된다. 황의수 시인의 성찰 시편들은 이 자각을 거창한 관념으로 선언하기보다, 길과 호흡, 웃음과 후회의 문장 같은 일상적 단위에서 조용히 구축한다. 따라서 대표작들은 ‘삶의 의미’를 단정하기보다, 말이 남기는 흔적과 삶이 요구하는 태도를 종장의 전환으로 수렴시키는 방식에서 미학적 특징을 드러낸다.

광속의 세월 타고
한참을 달려왔다

오늘도 모르면서
내일을 알 것처럼

뜬구름
따라 흐르다
돌아보며 웃는다.
- 「웃는다」, 전문

「웃는다」는 이러한 미학을 단번에 증명한다. “광속의 세월 타고 / 한참을 달려왔다”로 시작되는 초장은 노년의 시간 감각을 과장 없이 제시한다. 그리고 “오늘도 모르면서 / 내일을 알 것처럼”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 착각을 담담히 적는다. 종장은 “뜬구름 / 따라 흐르다 / 돌아보며 웃는다”로 마감된다.
여기서 ‘웃는다’는 승리의 웃음도, 체념의 웃음도 아니다. 그것은 모르면서도 살아온 자신을 인정하는 표정이며, 삶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화해의 태도다. 시조의 결구가 ‘교훈의 선언’이 되지 않고 ‘표정의 남김’으로 처리되면서, 독자는 오히려 깊은 공명을 얻는다. 웃음은 결론이 아니라 계속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자세다.

「길에서」는 이 시조집의 존재론적 메타포를 가장 간명하게 보여준다. “한평생 걸어 보니 / 세상엔 길도 많아”에서 삶의 선택지가 무수함을 인정하고, “수 없는 미로 속을 / 출구 찾아 헤매었네”에서 인간 조건의 불안을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종장은 “어디를 / 돌고 돌아도 / 마침내 한 길인걸”로 귀결된다.
이 ‘한 길’은 운명론적 단정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길을 지나온 뒤에야 알게 되는, 자기 삶의 고유한 궤적에 대한 인정이다. 길이 많다는 말은 불안을 주지만, 결국 한 길이라는 말은 그 불안을 견딜 근거를 준다. 시조의 구조로 보면, 초·중장에서 경험의 복잡성을 충분히 누적하고, 종장에서 단번에 인식의 중심을 잡아준다. 성찰 시조가 갖추어야 할 균형, 즉 복잡성과 단순성의 공존이 성립한다.

생각을 알리려니
입으로 대신 한다

그 속에 뜻이 있고
가슴도 숨어있다

씨 뿌려
꽃을 피우듯
예쁜 말을 가꾸자.
- 「말의 씨」, 전문

이 주제군의 핵심은 결국 ‘말’로 이어진다. 「말의 씨」는 언어의 윤리를 시조적 압축으로 뽑아낸 작품이다. “생각을 알리려니 / 입으로 대신 한다”는 진술은 단순하지만, 곧바로 “그 속에 뜻이 있고 / 가슴도 숨어있다”로 확장되면서 말이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마음의 은닉처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종장은 “씨 뿌려 / 꽃을 피우듯 / 예쁜 말을 가꾸자”로 닫힌다.
여기서 “예쁜 말”은 유약한 미사여구가 아니라, 관계를 파괴하지 않는 최소한의 윤리이며 공동체를 유지하는 실천의 기술이다. 말이 씨앗이듯, 한 번 뿌려진 말은 어디선가 자라난다. 그래서 시인은 말의 결과를 두려워하고, 말의 책임을 강조한다. 이는 이 시조집의 성찰 시조가 개인적 철학을 넘어 사회적 윤리로 확장될 수 있는 지점이다.

이 작품군은 삶을 거창하게 정의하지 않는다. 대신 삶을 걷는 방식, 말하는 방식, 돌아보는 표정 같은 작은 태도들로 삶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리고 시조라는 형식은 그 태도를 단련하기에 더없이 적합하다. 시조는 길게 설명할 수 없으므로, 결국 중요한 것만 남겨야 한다. 이 시조집의 성찰 시조는 바로 그 ‘남김’의 기술을 통해, 독자에게 관념이 아니라 생활의 철학을 건넨다.


5. 길·노동·공동체의 서정
― 가장자리의 현장에서 세계는 다시 배치된다

노동은 생계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삶의 형식을 만드는 과정이다. 반복되는 일의 리듬 속에서 인간은 몸의 감각을 익히고, 관계의 책임을 학습하며, 공동체의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태도를 축적한다. 세넷이 ‘장인’의 노동을 단순한 기능 수행이 아니라 몸과 생각이 결합된 실천적 인식으로 설명했듯, 노동은 결과물의 생산을 넘어 삶의 질서를 조직하는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세넷, 리처드. (2010). 『장인』(김홍식 역). 아르테.
. 따라서 길과 밭, 산장과 농장의 장면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삶의 리듬을 다시 세우고 관계를 유지하는 기술이 형성되는 현장이다. 황의수 시인의 현장 서정은 노동을 미화하거나 비극화하기보다, 노동의 반복 속에서 태도가 정렬되는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공동체적 삶의 감각을 확보한다. 이후의 대표작들은 길 위에서 자만이 꺾이고, 밭에서 계절이 앉아오며, 산장에서 마음이 먼저 도착하는 장면들을 통해 ‘살아가는 기술’이 어디에서 형성되는지 보여준다.

저 강물 지구 나이 그대로 간직한 채
벼랑도 가지각색 하늘빛 흘러가니
이 경치 비할 바 없어 세상 사람 몰린다.

잔도는 아슬아슬 발아래 하늘인데
볼수록 감탄하며 별천지 들어서니
물소리 목청을 높여 푸른 꿈을 알리네.

발걸음 난간 위에 가슴을 조여 가니
거드름 사라지고 속마음 콩알 되어
내 마음 나를 붙잡고 하늘길을 걸었네.
- 「한탄강 잔도를 걷다」, 전문

「한탄강 잔도를 걷다」는 이 시조집이 길을 다루는 방식의 정점을 보여준다. 작품은 먼저 경관의 압도감을 세운다. “저 강물 지구 나이 그대로 간직한 채 / 벼랑도 가지각색 하늘빛 흘러가니”는 자연의 장엄을 과시가 아닌 사실의 진술로 붙잡는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순한 여행 시조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길의 체험이 곧바로 ‘자기 교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잔도는 아슬아슬 발아래 하늘인데”라는 위태로움 이후, 종장은 “발걸음 난간 위에 가슴을 조여 가니 / 거드름 사라지고 속마음 콩알 되어 / 내 마음 나를 붙잡고 하늘길을 걸었네”로 전환된다.
길은 감탄의 장소가 아니라 자만이 꺾이는 장소다. ‘콩알’로 축소된 마음은 겸허를 뜻하고, “하늘길”은 물리적 잔도가 정신적 통과로 승화되는 지점이다. 시조의 종장이 수행하는 전환 기능이 가장 잘 발현된다.

노동의 서정은 「가을이 고추밭에 앉았다」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이 작품은 노동을 미화하지도, 비극화하지도 않는다. “풋풋한 생명들은 모두가 고개 들고 / 힘차게 솟아올라 춤추며 손짓인데 / 오롯이 한 해를 품고 품평회를 맞는다”는 대목은 농사를 ‘성장 경쟁’의 장면으로 잡아내면서도, 그것이 자연의 순리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오늘도 호미 들고 다가선 농장에서 / 속 열어 사랑하고 삶의 지혜 얻다 보니 / 어느새 더위 탄 가을이 고추밭에 앉았다”로 마감할 때, 계절은 달력 속 사건이 아니라 노동이 길어 올린 깨달음이 된다.
특히 “속 열어 사랑하고”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노동은 단지 몸을 쓰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여는 훈련이며, 삶의 지혜는 ‘생각’이 아니라 ‘현장’에서 얻어진다는 시인의 관점이 드러난다. 가장자리의 밭이 곧 세계의 중심으로 재배치되는 순간이다.

주말이 다가오면 마음이 먼저 가서
길 따라 개울 따라 숲길을 올라간다
산새가 / 인사를 하면 / 솔바람도 거든다.

계곡물 철철 천 리 흰 구슬 튕겨내고
버들치 어칠어칠 눈길을 쏟다 보면
별천지 / 따로 있나요 / 무릉도원 여기네.
- 「산장에 가면」, 전문

공동체의 서정은 「산장에 가면」에서 생활의 온도로 구현된다. “주말이 다가오면 마음이 먼저 가서 / 길 따라 개울 따라 숲길을 올라간다”는 구절은 산장이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마음이 먼저 도착하는 정서적 고향임을 말해준다.
이어지는 “계곡물 철철 천 리 흰 구슬 튕겨내고 / 버들치 어칠어칠 눈길을 쏟다 보면 / 별천지 / 따로 있나요”는 자연의 소리와 움직임이 공동체의 휴식과 맞물리며,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는 장면을 만든다.
여기서 산장은 고독의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일상의 피로와 노동의 무게를 다시 견디게 하는 연대의 자리다. 시조집 전체에서 산장·농장·길은 서로 다른 공간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은 윤리로 연결된다. “살아내는 기술”은 중심의 화려함이 아니라, 가장자리에서 반복되는 걷기와 노동과 돌봄에서 나온다는 인식이다.

이 주제군이 특별한 이유는 ‘현장’이 가진 인식론 때문이다. 길을 걷는 순간 거드름이 사라지고, 밭을 돌보는 순간 계절이 앉아오며, 산장으로 향하는 순간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 시인은 이런 장면들을 통해 세계의 순서를 바꾼다. 가장자리의 삶이야말로 삶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자리라는 것, 다시 말해 그것이 이 작품군이 시조집 전체에 부여하는 윤리적 무게다.


6. 닫는 글

『길마가지꽃』은 자연·가족·노동·성찰의 소재를 폭넓게 포괄하면서도, 그를 하나의 정서적 과잉으로 밀어붙이지 않는 시조집이다. 이 시조집의 미덕은 “무엇을 말하는가”에 앞서 “어떻게 말하는가”를 끝까지 견지한다는 점에 있다. 황의수 시인은 과장된 수사나 감정의 고조로 의미를 확보하기보다, 장면의 제시와 문장 구조의 균형을 통해 작품의 설득력을 확보한다. 결과적으로 이 시조집은 서정의 총량을 늘리는 방식이 아니라, 서정이 작동하는 방식, 즉 이미지의 배치와 종장의 전환으로 완성도를 세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종장 마감의 처리다. 여러 작품에서 종장은 단순한 결론 문장으로 기능하지 않고, 초·중장에서 축적된 정서를 다른 방향으로 이행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는 시조의 고유한 형식성, 즉 초장 개시, 중장 누적, 종장 전환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수행한다는 의미이며, 독자가 작품의 의미를 ‘듣는 것’이 아니라 ‘도달하는 것’으로 경험하게 한다. 종장에서 설명을 덧붙이기보다, 이미지의 회수나 시선의 이동으로 마감을 설계할 때 이러한 효과가 강화된다. 이 대목은 이 시조집이 시조를 단순한 전통 형식의 반복으로 소비하지 않고, 짧은 형식이 요구하는 압축과 절제의 윤리로 갱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시조집은 소재의 성격상 감상적 회고로 흘러갈 위험을 품고 있으나, 대체로 그 위험을 절제의 어법으로 관리한다. 가족과 고향을 다루는 작품들은 정서의 과잉을 피하고, 생활사의 구체를 통해 관계의 구조를 드러낸다. 부부 서정 역시 찬미의 언어를 앞세우기보다 자기 점검과 반성의 문장으로 기울어, 개인적 고백을 윤리적 성찰로 확장한다. 노년과 질병의 서사는 사건의 비극을 강조하기보다 이후의 삶을 지속시키는 방식을 제시하면서, ‘정서적 위로’보다 ‘삶의 재정렬’이라는 방향을 확보한다. 이처럼 다양한 경험의 층위가 단일한 문학적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시인이 감정을 목표로 삼지 않고 태도를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자연시편군의 경우에도 풍경은 감탄의 대상이기보다 시적 전환을 위한 계기다. 계절은 장식적 배경이 아니라 시간의 질서를 되묻게 하는 장치이며, 산과 들의 이미지는 주체를 과도하게 부각하기보다 주체를 교정하는 방향으로 쓰인다. 이는 자연을 ‘아름다움’으로만 처리하는 관습적 자연 시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자연의 의미를 확정하는 대신, 자연이 열어 놓는 감각의 문을 통해 주체가 자신을 스스로 조정하도록 설계하는 태도는 이 시조집의 미학적 기조를 형성한다.

다만 작품의 밀도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보면, 일부 작품에서는 주제의 직접 진술이 길어질 때 시조의 압축이 느슨해질 가능성이 있다. 특히 종장에서 의미를 요약하거나 교훈적 결론으로 서둘러 닫을 경우, 작품의 여백과 긴장이 약화할 수 있다. 이 시조집의 강점이 ‘전환의 종장’에 있는 만큼, 종장에서는 주제의 명명보다 이미지의 회수, 진술의 단정 대신 시선의 이동을 강화하는 방향이 효과적이다. 이는 작품을 난해하게 만들려는 전략이 아니라, 시조라는 형식이 요구하는 미학적 절제를 더 선명하게 확보하려는 선택이다.

결론적으로 『길마가지꽃』은 삶의 주변부에서 지속되는 시간의 윤리를 시조의 형식으로 정돈한 성과라 할 수 있다. 화려한 중심을 향해 달려가는 서사보다, 관계를 유지하고 생활을 감당하며 시간을 통과하는 방식에 더 큰 무게를 두고, 그 무게를 과장된 감정이 아니라 문장과 전환의 구조로 지탱한다. 황의수 시인의 시조는 독자에게 특정한 감상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장면의 누적과 결구의 전환을 통해, 독자가 자기 삶을 다시 배열하도록 한다. 이 시조집의 성취는 그 ‘조용한 설득’에 있으며, 그 설득이 쌓이는 지점에서 이 시조집은 충분한 문학적 완결성을 확보한다.
황의수 시인의 다음 시조가 어떤 계절을 품고 어떤 삶의 결을 더 깊게 드러낼지 기대한다. 이 시조집에서 마련한 단단한 리듬 위에, 더 넓고 더 먼 걸음이 이어지기를 기

  작가 소개

지은이 : 황의수
시인은 남원시 출생으로, 아호는 성보(省普)이다. 세종문학회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문예춘추 최남선문학상을 수상했다. 전 광림문학회 회장, 대동문인협회 고문을 지냈고, 현재 (사)한국시조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목차

■시인의 말
■축사: 잠든 영혼을 깨워주는 주옥같은 깨달음의 시혼詩魂 / 이광녕

1부 길마가지꽃
입춘立春
봄 향기
길마가지꽃
설중매 향기를 찾아
채송화의 미소
입추立秋
가을이야
코스모스
동백의 입주
동지
겨울 산행
설악산雪嶽山
설야雪夜
맨드라미
다육이의 미소
불손
박주가리
황촉규黃蜀葵
목천료木天蓼
들국

2부 고마운 아내
고향길
함미성
수리봉
옥녀직금혈玉女織錦穴
내 고향 이백면二白面
시제 時祭
우리 형님
누나 생각
요천수는 누나의 강
고마운 아내
부부싸움
목도리
보리 건빵
뇌경색
팔순 연
간월암看月庵
방장산方丈山
청안靑岸에 서서
용정龍井은 말한다
암서재巖棲齋를 찾아서

3부 길을 걸으며
웃는다
길에서
길을 걸으며
삶이란
정情
일어나라
석양
그리움
효자손
나이 드니
반추反芻
해후邂逅
살면서
사는 일
나의 길
낚시
말의 씨
무서운 말
시비是非
삼재일체三才一體

4부 산장에 가면
팔 남매 사랑舍廊
소우정消憂亭
산장의 아침
이렇게 살아가자
산장에 가면
산장의 밤
소나무 숲에서
산중신곡
겨울 산장
산바람
산장의 단풍
산길에서
냉이꽃
잡초에게
밭에서
5월의 농장에서
유월의 농장에서
옥수수
들깨 농사
가을이 고추밭에 앉았다
제야除夜

5부 청산은 가슴에
인연因緣
마음자리
묵은 정
한탄강 잔도를 걷다
집념
송호정松湖亭에서
청산은 가슴에
광풍狂風
겨울비
첫눈
하얀 능선의 숨결
삼전도비를 보며
창경궁 문정전에서
경복궁 근정전

■해설: 『길마가지꽃』의 시적 세계와 서정의 윤리_김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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