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노선을 모르는 오래된 버스가 와서 어느 시간과 공간으로 나를 던져놓는 것,
소설 속 장소는 낯설고 새로운 공간 속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오래된 기억의 공간에서 흩뿌려진 물방울들
현재라는 시간에 잉크처럼 스미는 이야기
정미형 소설가가 세 번째 소설집 『검은 밤, 영도』를 펴냈다. 2009년 봄 상반기 《한국소설》 신인상에 단편 「단신의 일곱 개의 가방」이 당선되며 등단한 정미형 소설가는 ‘제11회 현진건문학상’, ‘제25회 부산소설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검은 밤, 영도』는 “이중 혹은 다중시점으로 서사를 끌어가면서도 매끈하게 마무리했고, 세대를 달리하는 가족 구성원의 삶에 대한 정념과 의식을 인간학적 깊이로 이해했다”고 평가받은 「남원 어딘가에」를 포함해 2020년부터 2024년까지 집필한 7편의 단편이 담겼다. 실제 지명인 영도, 남원, 언양의 구체적인 장소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잊힌 시간에서 다시금 찬란하고 조용히 비추는 삶의 뒷모습을 담아내는 정미형 소설가 특유의 시선이 빛을 발한다. 소설이 할 수 있는 최고이자 최선의 위로가 독자들에게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소설들이다.
정미형 소설가는 이번 소설집을 “가방을 끌고 어딘가로 떠나면서 쓴 여행기”라고 표현한다. 노선을 모르는 오래된 버스를 타고 불시착한 낯선 공간에서, 독자들은 예기치 않은 삶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독자들은 예상치 못한 여행기를 통해 소설이 주는 정념과 관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번 소설집은 ‘시간’이라는 열쇠로 과거의 공간을 현재로 불러온다. 소설 속 영도, 남원, 언양은 단순한 배경을 넘어 실제와 상상의 이중 세계로 변모한다.
발문을 쓴 배이유 소설가는 “흰 천에 문장이라는 바늘로 촘촘히 수를 놓”는 “세밀한 자수 공예가의 시선”이라며, 정미형 소설가가 가진 섬세하고 다중적인 시선을 짚어냈다. 먼지처럼 바스러지는 삶과 희미한 유령 같은 사람들을 불러내어, 그들의 생에 새겨진 지문을 질긴 의지로 읽는다. 오래된 기억의 공간에서 흩뿌려진 물방울들이 현재라는 시간에 잉크처럼 번지며 스며드는 방식, 이것이 정미형 소설이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이다.
소설집을 관통하는 정서는 ‘검은 밤’ 같은 어둠에서도 기어이 찾아내는 은은한 온기다. 표제작 「검은 밤, 영도」에서 칠흑 같은 어둠 속 가난한 젊은 새댁에게 위안이 되어 준 이웃집의 비싼 전깃불처럼, 작가는 고단한 삶의 두려움을 헤쳐 나가는 힘을 포착한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잃어버린 것을 찾아 나서거나 지나간 기억을 더듬는 여성들이다. 그녀들은 막다른 길의 끝에서 “잘못 도착했다고 여겨지던 길이 어쩌면 진짜 찾던 길일지도 모른다”는 역설적인 희망을 발견한다. 죽은 자로서 생을 바라보는 연극 속 ‘에밀리의 시선’처럼, 소설 속 인물들은 지나가 버린 일상의 찬란함을 뒤늦게, 그러나 사무치게 깨닫는다. 정미형 소설가는 그 회한과 그리움의 정서를 중심으로 단단한 위안을 건넨다.
작품 소개
「남원 어딘가에」의 이효신은 시댁 제사를 위한 제기를 구하러 홀로 남원 운봉장을 찾는다. 손윗동서로부터 제사를 떠맡게 된 쉰 살의 이효신이 물푸레나무 제기를 마련하는 과정과 제기가 딸 은선에게 전해지기까지 삼대에 걸친 여성들의 삶이 교차한다. 정성 들여 차린 추석 차례상 앞에서 이효신이 기다린 것은 동서의 한마디 고마움이었지만, 정작 그 제기는 며느리들에게 거부당하고 택배 박스에 담겨 집집을 떠돈다. 작가는 제사와 제기라는 한국 전통 문화의 상징을 통해 여성들의 삶과 가족 관계의 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효신이 “남원 어딘가”를 배회하며 우연히 목기 장인을 만나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현대인의 은유다. 전통적 가족 제도와 여성의 역할이 급격히 변화하는 한국 사회에서, 제사 음식의 냄새와 제기의 질감 등 감각적 묘사는 독자를 그 시대로 생생하게 안내한다.
「산책하는 순간들」 속 도영은 낯선 원룸에서 한 달 살기를 하며 산책 중 우연히 블로그 ‘은빛토끼’를 발견한다. 지역 맛집과 카페를 검색하다 만난 이 블로거의 일상을 따라가며, 도영은 그가 추천한 식당을 찾아가고 같은 물건을 사면서 간접적으로 그의 삶에 개입한다. 애착 이불을 가져본 적 없고 어떤 것에도 깊이 집착하지 않았던 도영에게, 얼굴도 모르는 은빛토끼는 생애 처음 가진 ‘애착 대상’이 된다. 정미형은 SNS 시대의 관계 맺기, 익명성 속에서의 친밀감, 알면서도 모르는 관계의 역설을 탐구한다. 도영이 은빛토끼의 수술 소식을 걱정하면서도 댓글조차 남기지 않는 모습은 현대적 거리두기의 한 형태다.
표제작 「검은 밤, 영도」 속 혜주는 팔십 대 고모로부터 오십 년 전 영도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듣는다. 남편이 미군 배를 타러 떠난 후, 전깃불도 없는 낡은 집에서 세 딸을 홀로 키워야 했던 고모에게 유일한 위안은 밤새 켜져 있던 이웃 선생님 댁의 불빛이었다. “뒷집에 혼자 딸들을 데리고 살고 있는 젊은 여자가 전깃불이 없는 밤에 얼마나 무섭겠냐고” 일부러 불을 켜두었다는 선생님의 배려. 오십 년이 지나도록 감사를 전하지 못한 고모는 조카 혜주에게라도 그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 한다. 정미형은 ‘검은 밤’이라는 어둠과 ‘불빛’이라는 희망의 대비를 통해 고독과 연대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표현되지 못한 감사와 사랑이 어떻게 삶을 무겁게 하는지, 과거의 기억이 현재에도 여전히 생생하게 작동하는 방식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영도’라는 실제 지명을 사용하면서도 그곳을 거의 신화적 공간으로 재구성하여, 검은 밤의 영도를 공포와 고독의 장소이자 동시에 인간적 온기가 발현되는 곳으로 형상화한다.
「월내역을 지나서」의 문숙은 매주 무궁화 열차를 타고 태화강역까지 초크 아트를 배우러 간다. 열차 안에서 만난 목걸이를 한 두 늙은 여자는 친척의 비리 문제를 해결하러 가는 중이고, 친구 M은 이십오 년 전 직장 내 성추행 사건을 문제 삼으려 한다. 쉰을 넘긴 문숙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는 사람이고, 월내, 남창, 덕하역을 지나며 과거와 현재, 개인사와 사회적 이슈가 교차한다. M이 제기하는 황 차장의 성추행 문제는 미투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다. “아무것도 모르던 때”라는 문숙의 말은 과거에는 문제로 인식되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는 문제가 되는 시대적 변화를 보여준다. 하지만 가해자가 암 투병 중이라는 사실 앞에서 정의와 용서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는 지점이 현실적이다. 무궁화 열차라는 느린 이동 수단과 정차하는 역들은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상징하며, 목걸이에서 반사되는 빛, 콩떡을 먹는 늙은 여자들의 대화 등 사소한 디테일로 열차 안 풍경을 생생하게 구현한다.
「겨울, 언양」 속 요리 교실을 운영하는 훈정은 대학 시절 연일과 함께 언양 작천정을 다녀온 기억을 떠올린다. 대학 신문 취재를 위해 갔지만 대담자를 찾지 못하고 헤맸던 그 여행. 연일은 어머니를 찾고 있었고, 훈정은 무언가를 찾고 있었지만 정작 무엇인지 몰랐다. 겨울 작천정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낯선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받지 못한 연일의 편지. 그 ‘실패한’ 여행이 이십여 년 후 요리사가 된 훈정에게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는다. “이곳과 저곳, 막혔던 막다른 길의 끝에 또 다른 길이 열리는 것, 잘못 도착했다고 여겨지던 길이 어쩌면 진짜 찾던 길일지도 모른다”는 문장이 작품의 핵심이다. 작가는 인생의 우연과 실패, 잘못된 선택들이 실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형성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어머니의 방앗간 이야기, 훈정이 찾지 못했던 이름 모를 향신료, 현상되지 않은 사진 등은 모두 ‘찾지 못한 것들’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삶의 방향을 결정했다는 역설을 담고 있다.
「뼈 이야기」는 아흔한 살 시아버지가 화장된 후, 팔십 대 시모 술이는 뼈 항아리를 집에 가져오고 싶어 한다. “밥 한 공기 정도 되더나?”라고 뼈의 양을 묻는 술이에게, 남편의 뼈는 육십 년 결혼 생활의 물질적 증거이자 표현되지 못한 감정의 응어리다. 죽음 앞에서 한마디 작별 인사도 하지 않은 남편에 대한 서운함과, 그럼에도 뼈 항아리를 곁에 두고 싶은 애틋함이 공존한다. 술이의 회상을 통해 한국 여성의 이십 대부터 팔십 대까지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은행원 시절, 참물 아이라 불리던 새댁 시절, 제사 준비, 시댁 어른 봉양, 그리고 남편의 임종까지. 작가는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여성의 생애사를 뼈를 중심으로 재구성한다. 죽음과 제사라는 무거운 주제를 뼈 항아리라는 구체적 사물로 형상화하며, 술이가 뼈 항아리를 새장처럼 여기고 햇볕을 쐬게 해주는 장면은 기이하면서도 애잔하다. 여러 세대의 죽음들(시아버지, 시고모, 작은시아버지, 영미 엄마)을 겹쳐놓으며 죽음의 반복성과 각각의 특수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깊이 있는 작품이다.
「에밀리의 시선」 속 지은은 대학 시절 본 연극 <우리 읍내>의 에밀리 역을 맡았던 동기 주희를 잊지 못한다. 손턴 와일더의 이 연극에서 에밀리는 죽은 후 삶으로 돌아와 “너무 아름다워 그 진가를 몰랐던 이승”을 깨닫는다. 이십이 년 만에 우연히 건널목에서 주희를 본 것 같은 순간, 지은은 자신의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을 되돌아본다. 무대 위의 주희가 가졌던 ‘에밀리의 시선’, 즉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 가치를 깨닫는 시선에 대한 동경이 되살아난다.
K와의 이별, 발레를 그만둔 일 등 지은의 선택들은 모두 경제적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주희라는 기억, 에밀리의 시선은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가능성에 대한 그리움으로 남는다. 작가는 연극이라는 메타적 장치를 소설 안에 끌어들여 삶과 예술의 관계를 성찰한다. 무대와 객석, 과거와 현재, 실제 주희와 기억 속 에밀리가 중첩되며 복합적 시간성을 구현한다. 세실마을이라는 신도시의 일상적 공간(제과점, 백화점, 건널목)이 어느 순간 연극 무대처럼 변환되는 지점이 인상적이며, “우리는 함께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자주 만나서 밥을 먹어야” 한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형님. 남원 어딘가에 제기를 잘 만든다는 소문을 듣고 우연히 그곳으로 가보았지요. 어느 집이든 남원 운봉마을에 목기나 제기 만드는 숨어 있는 기술자가 있기 마련이니까.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것을 기다렸어요. 사람 사는 게 다 우연히 만나는 거니까.
― 「남원 어딘가에」
열세 살이던 도영이 갖고 싶던 것은 부드러운 꽃무늬가 있는 홑이불이었다. 자신에게 딱 맞는 이불. 크기와 두께, 감촉과 냄새까지. 식구 중 그 사실을 아는 이는 없었다. 그런 부드러운 애착 이불을 늘 가지고 싶었지만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산책하는 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