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제171회를 맞은 일본의 대표적 문학상 나오키상, 낯선 작가에게 수상의 영예가 돌아가며 문학계 안팎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주인공은 이치호 미치. 동인지에 소설을 발표하다가 장르문학을 거친 뒤, 일반문학으로 영토를 넓힌 지 삼 년 만에 나오키상을 거머쥔 작가다. 미우라 시온, 미야베 미유키, 아사다 지로 등 심사위원들은 이치호 미치가 ‘실제 타인의 삶을 사는 듯한 압도적 몰입감을 선사하는 이야기꾼’이자 ‘문장에 군더더기가 없고 인물의 내면을 문학적으로 써내는 드문 작가’라며 극찬을 남겼다.
나오키상 수상작 《창궐》은 원인 불명의 전염병이 번진 도시를 배경으로 여섯 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소설집이다. 중학생 때 죽은 친구를 스무 살이 되어 마주친 남자, 잘생긴 배달원을 만나고자 배달 앱에 집착하기 시작하는 가정주부, 자신이 왜 죽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고향을 떠도는 유령, 전염병으로 삶이 망가진 사람들의 자살 클럽……. 다양한 문학적 경로를 거친 작가의 이력처럼 《창궐》은 미스터리, 스릴러, 범죄, 추리, 판타지, 순문학의 경계를 넘나든다. 현대소설로 구현 가능한 모든 재미를 극대화하며 재난 상황에서의 욕망, 죄의식, 사회적 윤리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출판사 리뷰
제171회 나오키상 수상작
“이것 봐, 세상은 한 꺼풀만 벗겨내면 추악해.”
전염병의 도시에서 시작된 기이한 균열
환상, 범죄, 욕망이 뒤섞인 여섯 개의 이야기
전염병이 퍼진 도시, 이자카야 호객원 유토는 인파 틈에서 전단을 돌린다. 그러다가 화려한 금발의 여성을 만난다. 그녀는 중학생 때 죽은 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같이 술을 한잔하자고 한다. 골목 틈의 어두운 바에서 그녀는 오래 감춰온 비밀, 그리고 욕망으로 꿈틀대는 밤의 세계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첫 번째 단편소설 〈날개가 다른 새〉는 기이한 환상을 드리운다. 분명 죽었는데 내 앞에 살아 돌아온 친구. 이야기는 사실과 거짓, 현실과 환각의 경계가 의도적으로 흐려진 채 흐르다가 끝내 독자를 현실의 밖으로 이끈다. 이어지는 〈로맨스☆〉는 가정주부의 이야기. 우연히 만난 잘생긴 배달원을 다시 보기 위해서 배달 앱에 집착하기 시작하고, 그를 만나고자 점차 불법적이고 위험한 수단까지 쓰게 된다. 〈반딧불이〉에서는 환상성이 더욱 짙어진다. 유령이 된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 찾는 추리극을 펼쳐 보인다.
전염병의 시작, 고립된 인물, 그들에게 틈입하는 환상과 악몽을 다루던 《창궐》은 중반부를 지나며 사람들 사이의 애정과 위태로운 연대를 이야기한다. 네 번째 작품 〈특별 연고자〉는 직장을 잃은 요리사 교이치가 이웃 할아버지 밥을 해주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축복의 노래〉는 고등학생 딸의 임신을 시작으로 임신과 출산에 관한 주인공 주변 사람의 비밀이 밝혀지는 이야기로, 일본의 우생학 국가폭력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 예민한 주제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마지막 〈잔물결 드라이브〉는 전염병 때문에 삶이 궁지에 몰린 이들의 자살 클럽을 다루는데, 그들 틈에 숨어든 불청객을 도화선 삼아 예상치 못하게 폭발하는 서사를 선보인다.
미스터리와 스릴러, 범죄와 추리를 건너 순문학까지
가장 새로운 방법으로 써내는 최첨단의 문학
이치호 미치는 다채로운 스토리텔링을 선보이는 만큼 작가로서 다양한 영역을 거쳐왔다. 동인지에 작품을 발표하며 활동하던 중 편집자의 눈에 띄어 본격적 상업 출판을 시작했으며, 라이트노벨을 비롯한 장르문학과 일반문학을 넘나들며 공식 출간작만 칠십여 권에 이르는 폭넓은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다. 일반문학 데뷔작인 단편집 《스몰 월드》로 시즈오카 서점대상과 요시카와에이지 문학신인상을 수상했으며 야마다후타로상과 나오키상에도 후보로 오르며 파란을 일으켰다. 이듬해 장편소설 《빛이 있는 곳에 있어줘》로는 서점대상 3위 등극, 다시 한번 나오키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는 기염을 토한다.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에서 영감을 받은 《창궐》로 마침내 나오키상을 거머쥐며 천부적 이야기꾼의 저력을 입증해냈다.
미우라 시온, 미야베 미유키, 아사다 지로 등 나오키상 심사를 맡은 일본 문학의 거장들은 일제히 이 작품에 찬사를 보냈다. 장르적 코드의 적재적소 활용, 흡인력 있는 스토리텔링, 문학성과 함께 거론된 것은 첨예한 동시대성. 《창궐》의 원제는 ‘쓰미데믹’으로, 죄를 뜻하는 일본어 ‘쓰미’와 팬데믹의 ‘데믹’을 이어 붙인 것처럼 전염병 시대에 크고 작은 죄를 저지르는 인물과 그 여파를 조명한다. 코로나 팬데믹과 그 이후를 시간순으로 담아낸 건 물론이고 재난 상황 실직을 비롯해 여러 사회 현상을 문학의 한복판으로 끌어온 것. 트위터로 매개되는 성범죄, 젊은 여성이 중장년 남성과 만나며 돈을 받는 ‘파파카쓰’, 배달 앱 등 플랫폼으로 인한 범죄, 인터넷 마녀사냥까지. 한국 사회에서도 전혀 낯설지 않은 문제들을 미스터리, 스릴러, 범죄, 추리, 판타지 등의 코드를 섞어 독보적인 문학 작품으로 빚어냈다.
이치호 미치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소설을 쓰며 십 년 뒤, 수십 년 뒤에 남을 거란 생각은 거의 안 해요. 지금의 사회를 사는 지금의 내가, 우연히 나와 함께 지금을 사는 누군가를 위해 써요”라고 밝힌 바 있다. 그처럼 《창궐》은 거창한 미래를 예언하는 소설이 아니다. 대신 독자들이 외면해온 감정과 질문을 정면으로 호출한다. 전염병, 그리고 그 이후라는 상황을 무대로 당장 곁에서 살아갈 법한 인물들의 불안, 욕망, 연대를 능수능란하게 이야기로 녹여낸다. 휘몰아치는 여섯 편의 이야기를 맛본 끝에 독자는 다시 한번 묻게 된다. 재난을 통과한 우리는 이전과 무엇이 달라졌는지. 무엇을 잃었고, 잃었다는 기억마저 잊었는지. 《창궐》은 그 질문에 서둘러 답하지 않고 독자 앞에 조용히 남겨둔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 좋은 대학, 좋은 회사라는 인생의 선로를 순조롭게 걸어 저런 어른이 된다고 생각하니 머리를 막 헝클어뜨리고 싶었다. 고압적인 학원 강사, 특정 여학생을 끈적한 눈으로 보는 교사, 밥도 제대로 못 짓는 주제에 허세를 떠는 아버지의 얼굴이 머리에 떠오른다. 주위의 성인 남성을 경멸하고 나니 혐오감이 치솟는 한편 가슴이 후련해졌다. 이런 녀석들에게 무슨 말을 들어도 무섭지 않다는 마음이 커졌고 성적 고민도 별것 아닌 듯 마음이 가벼워져 오히려 공부가 잘됐다. 유토는 종종 ‘#가출소녀’를 검색했다. 그때마다 남자들의 빤한 감언에 소름이 돋으면서도 화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안에서 그로테스크하게 번쩍번쩍 빛나는 욕망을 증오하고 비웃으면서도 응시했다.
아이스커피 한 잔에 사람을 부린다는 죄책감은 곧 흐려졌다. 그러려고 만들어진 비즈니스이고 가벼울수록 배달하기 쉽지 않을까. 배달할 수 있는 지역 안에서 하루에 두세 번씩 주문할 때도 있었는데 여전히 그 미남과는 만나지 못했다. 아이콘이 뜰 때까지의 기다림에 가슴이 뛰고 온몸의 세포가 활성화된 듯 느껴졌다. 과장이 아니라 ‘살아 있다’라는 짜릿함에 가까운 실감이 들었다. 또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미래에 대한 희망은 남아 있다. 다음 주문에서는, 내일 주문에서는,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용해 긴 의자에 눕는다. 물건을 만질 수는 없는데 이렇게 누울 수는 있다. 그러나 좌석의 감촉은 없다. 죽는다는 거 신기하네. 머리카락을 잡아 눈앞으로 가져오니 갈라진 머리카락이 여러 개 보였다. 이런 건 살아 있을 때랑 똑같네. 몸을 일으켜 창밖을 본다. 국도와 도로변에 늘어선 중고 서점과 야키니쿠, 파친코 가게. 도쿄 도심까지는 전철을 갈아타고 거의 한 시간 반. 일본 어디에나 있는 어정쩡한 시골 풍경은 십오 년 전과 전혀 변함이 없어 보였다. 흘러가는 빛과 산의 실루엣. 하행선 전철과 스친다. 창에 내 모습은 비치지 않는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이치호 미치
오사카에서 태어나 간사이 대학 사회학부를 졸업했다. 동인지에서 팬픽 소설을 집필하던 중 편집자의 눈에 띄어 2007년부터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2021년 장편소설 《스몰 월드》를 발표하며 활동 영역을 넓혔고, 이 작품으로 제9회 시즈오카 서점대상과 제43회 요시카와에이지 문학신인상을 수상했다. 이어 2024년, 코로나 팬데믹 시기 인물 군상을 묘파한 소설집 《창궐》로 제171회 나오키상을 수상했다.《창궐》의 원제는 ‘쓰미데믹’. 죄를 뜻하는 일본어 ‘쓰미’와 팬데믹의 ‘데믹’을 이어 붙인 것처럼, 《창궐》은 전염병이 번진 세계에서 저마다 크고 작은 죄를 저지르는 인물과 그 여파를 조명한다. 그럼에도 이치호 미치의 집필 원칙은 “등장인물 중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라는 것. 선인이든 악인이든, 사랑의 대상이 누구든 간에 모든 인물에게 각자의 신념과 살아온 삶이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현재도 독창적 서사와 생생한 인물 조형, 날카로운 시선으로 왕성하게 집필 활동을 이어가며 일본 문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