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이돈형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이며, 이형권 교수의 표현대로 ‘내 안의 나, 혹은 진실을 찾아가는 고독한 여정’이라고 할 수가 있다. 자아 상실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게 하는 심각한 문제인데, 이 시집의 시편들은 이를 심각하게 여기면서 자아를 성찰하고 세상을 비판하는 자세를 취한다. “나”가 없으면 세상도 없고 우주도 없는 셈이고, “나”를 상실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상실한 것과 같으니, “나”를 찾아가는 일은 매우 유의미하고 소중한 일이다.
출판사 리뷰
나는 사람 새끼다
새끼라는 말이 좋아 맞아 죽어도 나는 새끼였으면 좋겠다 저 새끼보다는 이 새끼였으면 좋겠다
이 새끼는
눈앞에 서 있는 새끼라서
당장 한 대 줘 터질 수 있는 새끼라서 좋다
맞아도 좋으니 지금은 이 새끼에게 젖을 달라
조상 젖을 빨아 본 적 없어 세상 젖이라도 빨겠다는데 주는 놈이 없다 그러니 맞아 터져도 좋다 빨게만 해 다오
젖 좀 달라면 대뜸 나오는 말이 이 새끼가! 였다
맞다
이 새끼
굶어 죽는 새끼보다 맞아 죽는 새끼가 낫고 맞아 죽는 새끼보다 얻어 처먹는 새끼가 낫다고 목 놓아 외치는 이 새끼
아직 젖 같은 세상을 다 빨아 보지 못한
이 새끼
이돈형 맞다
― 「이돈형」 전문
이 시는 시인의 실제 이름을 제목으로 취한 특이한 사례이다. 언어로 그린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시는, 시인 자신에 관한 편견을 바로 잡고자 하는 의지가 직핍하게 다가온다. 부조리한 세상과 어떠한 불화도 감내하면서 진실한 삶의 시를 쓰고자 하는 시인의 열망이 반영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자신을 “이 새끼”라고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의 첫 구절을 “나는 사람 새끼다”라고 시작하여 “이 새끼/ 이돈형 맞다”라고 마무리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을 “새끼”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말이 지닌 함의는 이중적이다. 즉 욕설로서의 “새끼”와 새 생명으로서의 “새끼”라는 두 가지 의미가 겹쳐 있다. 전자는 세상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는 폭력과 편견이고, 후자는 시인이 고집스럽게 견지하고자 하는 삶의 진실에 해당한다. 시인의 목표는 전자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통해 후자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새끼”는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과 싸우면서 진실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시인 자신의 초상이다.
시인은 “맞아도 좋으니 지금은 이 새끼에게 젖을 달라”고 한다. 이때 “젖”은 “새끼”를 세상에 존재하게 해 주는 생명의 원천이다. “새끼”의 “젖”을 향한 절규는, 거짓된 아비의 폭력으로 인한 고통과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진실을 얻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다. “새끼”는 또한 기득권에 편승하면서 적당히 편안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조상의 젖을 빨아 본 적이 없”다는 것은 과거의 속화된 전통이나 기성세대에 빚을 지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젖 좀 달라면 대뜸 나오는 말이 이 새끼가! 였다”라는 시구에는, 진실을 요구하는 시인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냉대와 폭력이 함의되어 있다. 하지만 시인은 그마저도 기꺼이 수용한다. “맞다 이 새끼”라고 하면서 세상의 어떠한 비난 속에서도 자신의 진실과 자존을 굳건히 지키겠다고 다짐한다. 진실을 위해서라면 고루하고 거짓된 세상의 욕을 “얻어 처먹는 새끼가 낫다”라는 시적 역설에 도달한 것이다.
나는 고독하다, 고로 존재한다
세상의 편견에 맞서서 진실을 찾아가는 “나”, 즉 “이돈형”이 시인으로 탄생하는 일차적인 방식은 고독 속에서 상실된 자아나 비루한 삶을 성찰하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 자아 상실의 핵심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사랑의 결핍이다. 이때 사랑은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소소하거나 잡스러운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세속적 가치와 윤리를 넘어서는 순수하고 절대적인 사랑이다. 이것은 그가 자주 사랑 노래를 부르지만, 그 노래에는 언제나 떠나간 사랑 혹은 결핍된 사랑이 등장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세속의 상식적 사랑을 뛰어넘는 완전한 사랑에 대한 열망이 크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성은 그의 사랑 이야기가 항상 세상의 상식을 전복하거나 역설하는 모티브로 작용한다.
오늘의 날씨는 비
비로 먼 곳을 바라볼 수 없는 나는 한 사람에게로 떨어져 온종일 쏟아지는 것에 대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 사람에게
그 사람이 있는 먼 나라에게
그 먼 나라의 모든 안녕에게 두 손 번쩍 들고
몸 구석구석 퍼진 야윔만 데리고 나왔으니 부디 나무라지 마시길
거제입니다
7월의 거제는 보랏빛 수국이 한창이고 쏟아지는 것들은 여전히 내게서 달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모퉁이를 돌다가 내게 들킨 수국이 당신을 닮아 나도 모르게 아, 하고 탄식했습니다만 수국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은 하루가 짧고
혼자 그리워해야 할 사람은 남은 생으로도 모자라
걸었습니다 쏟아질 것들이 다 쏟아져 이 비에 쓸려간다 해도 먼 나라의 한 사람이 나를 굽어봐
보랏빛 애탐이 한창입니다
왜 하필이란 말에는 꼭 내가 들어 있을까요
― 「혼자 놀아 미안한데 그래도 오늘은 내가 기억해 주길 바라는 한 사람을 그리워해야 하니까 이해 요망」 전문
이 시는 “비”와 “수국”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이별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비”는 단순히 “오늘 날씨”만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 “나”가 겪는 슬픔과 눈물, 그리고 “먼 곳을 바라볼 수 없게 하는” 단절감을 상징한다. “비”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나”가 “한 사람에게서 떨어”지게 하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비”는 이별의 상징으로서, “나”는 “비”에 갇혀 사랑하는 “한 사람”과 단절될 수밖에 없게 한다. “한 사람”은 대체 불가능한 유일성을 지닌 존재, 사랑하는 그 사람이 지금 있는 곳은 “먼 나라”이다. 그는 당장 만날 수 없는, 아니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존재이다. 시인은 그의 부재로 인한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7월의 거제”로 떠나온 것이다. 그곳에는 마침 “당신을 닮”은 “보랏빛 수국”이 피어 있어서 “나도 모르게 아, 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런데 “수국은 눈 하나 깜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사랑이 지닌 비극적 운명이다. 언제나 “먼 나라”에만 존재하는 진정한 사랑은 “나”를 외면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리움에 지친 “나”는 몸과 마음의 “야윔”과 “애탐”만 키운다.
그런데, 시인은 결구 부분에서 “왜 하필이란 말에는 꼭 내가 들어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야윔”과 “애탐”으로만 존재하는, 그래서 그 진정한 실체는 부재하는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자각한다. 운명이란 현실의 논리를 넘어선 초인간적이고 초현실적인 인간의 처지와 관련된다. 따라서 이 시에서 “나”의 그리움은 유한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초월한 어떤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열망에 속한다. “나”는 그 사랑을 위해 그 순수한 그리움을 위해 “비”가 “쏟아지는” 장소인 “거제”로 온 것이다. 이 자발적 고독의 공간에서 “나”는 “수국”을 닮은 단 “한 사람”을 생생하게 떠올리면서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나”는 불완전한 사랑의 경험 속에서 완전한 사랑을 꿈꾸는 운명의 주인공 혹은 낭만적 아이러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나”의 고독은 진정한 사랑의 결핍과 함께 타인과의 단절감으로 인해 발생하기도 한다. 사실 현대인의 단절감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과학 문명과 물질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인간은 스스로 고립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원인을 타인에게서 찾을 때는 세태 비판이 되지만, “나” 자신에게서 찾을 때는 삶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된다. 이돈형 시인은 주로 후자의 태도를 보인다.
비빔국수를 시켜 놓고
끼니때마다 비빔국수를 먹을 수 있다면 행복이겠다 싶다가 나는 왜 이 비빔국수가 좋을까 자문하다가
비빔이라는 말에서
섞임에 백기 든 사람처럼 잠깐 헝클어지다가
갓 나온 비빔국수를 젓가락으로 뒤섞는다 설기 썬 상추와 채 썬 오이 위에 앙증맞게 얹힌 한 알의 메추리알까지
흰 면을 슬몃슬몃 내주고 무서움도 매서움도 아닌 달고 맵고 신맛이 어우러진 양념에 설핏설핏 물드는 면발
면면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아낌없어
송골송골 땀방울 꽤나 맺히게 하려는지 얼맵게 뒤섞여지면 젓가락 끝부터 혀에 갖다 대게 된다
살과 살을 비벼도 타들지 못하고 사람에게 맨 마음 비벼 봐도 비벼지지 않을 때가 많아
비빔국수를 한 젓가락 휘휘 감아 돌리는 동안
면들이 부러워 죽겠다
― 「비빔국수」 전문
이 시는 “비빔국수”라는 일상적인 음식을 소재로 한다. 물론 이 시의 목적은 음식 자체의 맛이나 모습을 묘사하는 데 있지 않다. “비빔국수”를 매개로 현대인이 겪는 소통의 부재와 그로 인한 근원적 고독을 드러내고자 한다. 시의 전반부는 “비빔국수”에 대한 예찬과 “섞임”의 과정에 대한 감각적인 묘사에 집중한다. 시인은 “끼니때마다 비빔국수를 먹을 수 있다면 행복이겠다”라고 하면서 그 매력의 근원을 “비빔”과 “섞임”에서 찾는다. “비빔국수”의 “면발”을 보면서 “달고 맵고 신맛이 어우러진 양념에 설핏설핏 물드는” 모습에 감탄하고 있다. “흰 면”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각종의 재료들“상추”, “오이”, “메추리알”, “양념”과 어우러지는 모습에 매력을 느낀 것이다. 그 매력은 “면면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아낌없이” 신뢰할 만할 정도로 인상적이다.
이 시는 물론 음식으로서의 “비빔국수” 자체를 초점으로 한 것은 아니다. 이 시의 핵심은 “살과 살을 비벼도 타들지 못하고 사람에게 맨 마음 비벼 봐도 비벼지지 않을 때가 많아”라는 부분이다. 이 구절은 요즈음 세상에서 벌어지는 인간관계의 단절감을 문제 삼고 있다. “비빔국수”는 다양한 재료들이 쉽게 섞여 조화를 이루지만, 인간들은 저 잘난 맛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소홀히 한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나”를 포함한 현대인은 대부분 “살과 살을 비비는” 육체적 접촉은 있으나, 마음과 마음은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타들지 못하고”) 살아간다. 진솔한 “맨 마음”으로 다가가면서 소통을 시도해 봐도(“비벼 봐도”) 어우러지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래서 타인과 섞이지 못하는 “나”는 깊은 단절감과 부러움을 느낀다 “비빔국수를 한 젓가락 휘휘 감아 돌리는 동안/ 면들이 부러워 죽겠다”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이 시는 가장 일상적인 소재인 음식을 통해 심오한 인간 문제를 탐구하는 솜씨가 마뜩하다. 시상의 결은 다르지만, 생활 공동체의 “고담하고 소박한” 전통을 노래한 백석의 「국수」라는 시를 떠올리게 한다.
고독한 존재로서 “나”는 다른 시편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가령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3일 내내 병실의 안색을 살피며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혼자 아팠다”(「3인실」 부분)라고 고백한다. “병실” 생활을 하면서 삶의 고독을 체감한다. “한 사나흘 아파보니 사람 안에 사람 없이 지낸다는 게 얼마나 모진 일인가를 알겠다”(「일 없다」 부분)라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고독의 원인은, “도망치듯/ 찢겨지듯 사람이 밀려난다”(「바람이 불어서 흔들린 것이 아니라 너를 보내고 돌아와」 부분)에 드러나듯이, “너”의 부재로 인한 것이다. 또한 “나”가 느끼는 자아 상실감도 고독의 원인이다. 가령 “나는 뿔뿔이 흩어졌다(「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영원을 새끼 치는 동물인 양 영원히 뿜어져 나오는 울음을 가진 동물인 양 다 내게로 오라, 내게로 오라 너희의 울음까지 모두 울어줄 테니 다 내게로 오라, 두 팔 벌리고 막 태어난 신의 새카만 새끼 흉내를 내다 일어서는 내 멸망의 그림자에 밟힌 순간부터」 전문)라고 말할 때의 “나”가 그렇다. “나”는 “내 멸망의 그림자에 밟힌 순간부터” 자아를 상실하고 말았던 셈이다. 이때 “나”에서 비롯된 고독은 “너”의 부재와 맞물리면서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이돈형
이돈형 시인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고, 2012년 『애지』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우리는 낄낄거리다가』,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 『잘디잘아서』가 있고, 김만중문학과 애지문학작품상과 선경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