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문명교류학의 세계적 권위자 정수일
그 학문 여정의 완결판을 만난다세계적인 문명교류학 연구자 정수일 선생이 평생에 걸쳐 이룩한 학문 연구의 정수이자 결정판 『문명교류학』이 출간되었다. 『실크로드학』(창작과비평사 2001)으로 한국 문명교류사 연구의 새 장을 연 이후 『실크로드 사전』 『실크로드 도록』 등 관련 저술을 차근차근 상재해온 저자의 문명 연구를 종합한 것이다. 육로, 해로, 초원로 등 여러 갈래로 이뤄진 고대 실크로드 교역이 한반도까지 이어져 있음을 입증하고, 아메리카를 포함하는 환지구적 해로 차원의 문명교류를 선구적으로 탐방하는 등 저자가 문명교류학 연구에 끼친 중요한 성과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저자가 보기에 오늘날 인간적인 삶의 척도는 우리 각자가 얼마만큼 문명을 향유하며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다.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개방과 교류를 통해 문명이 전례 없는 보편성과 대중성을 띠면서 무한히 확장·심화되어가는 이 시대에, 인류는 ‘서로 교환하는’ 문명을 떠나서는 한시도 삶을 지탱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같은 시대적 환경에서 저자는 문명과 문명교류에 관한 기초지식을 전수하고, 인류에게 ‘세계는 하나’라는 관점과 호혜적 교류에 바탕을 둔 평화의 정신을 제시하며, 나아가 공생공영의 미래사회 건설을 위한 ‘범지구적 보편문명’의 실현이라는 ‘문명대안론’의 구상과 실천 방도를 모색하고자 이 『문명교류학』을 집필하고 출간하기에 이르렀다고 밝히고 있다.
동서 문명은 어떻게 달라졌으며, 또 얼마나 닮았는가
큰 틀에서 이 책은 공유성에 바탕을 둔 문명의 개념 이해(1~5장)와 상이성에 바탕한 문명교류의 개념 이해(6~13장)를 주 내용으로 하며, 문명교류학의 지향점과 그 내용(14~15장)을 개괄적으로 다룬다. 우선 ‘동’과 ‘서’의 지정학적 개념을 살펴본 뒤(1장), 생물학적으로 같은 종에 속하는 인간인 동양인과 서양인이 창출한 문명이 어떻게 서로 달라지기 시작했으며, 또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 연원(淵源)을 탐구한다(2장). 저자는 그에 대한 해답을 원초적인 자연환경적 연원과 고고학적 연원, 사회경제적 연원, 가치관적 연원 등 각기 다른 역사적 연원 속에서 찾고자 하는데, 특히 가치관적 연원에서는 동·서양 가치관과 철학의 비교와 대조를 통해 상이성의 기원을 밝히고 있다.
문명이란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노동을 통해 창출된 결과물의 총체라고 보는 저자는, 자생성(自生性)과 모방성(模倣性)만을 문명의 속성으로 보는 지금까지 학계의 통설에 공유성(共有性)이라는 속성을 추가했다. 그리고 문명과 문화가 위계적이거나 단계적인 관계가 아니라 총체와 개체, 복합성과 단일성, 내재와 외향, 제품과 재료의 포괄적인 관계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요컨대 문화는 문명을 구성하는 개별 요소이며 문명은 그 외형적 양상이라는 것이다.(3장)
문명 연구의 시작과 발전: 근현대 문명담론과 그 한계19세기 중반 스펜서(Herbert Spencer)와 모건(L. H. Morgan), 타일러(E. B. Tylor) 등이 피력한 ‘문명진화론’에서 발단되어 같은 세기 말엽 스미스(Grafton E. Smith)와 페리(William James Perry)가 제시한 ‘문명이동론’, 그리고 20세기 전반 토인비(A. J. Toynbee)가 주장한 ‘문명순환론’으로 이어지는 근대적 문명담론을 살피면서, 저자는 그 담론들의 창신성(創新性)을 긍정하는 한편 한계성도 지적한다(4장). 먼저 문명진화론에 대해서는 무생물인 문명이 생물처럼 진화한다든가 문명은 동일한 선(단계)을 따라 진화한다는 이른바 문명단선진화론(Theory of unilinear evolution of civilization)의 맹점을 짚는다. 이어서 문명이동론을 비판하며, 문명은 끊임없이 이동하지만, 그것은 결코 일방향의 이동이 아니라 상호이동, 즉 교류라고 주장한다.
근대적 문명담론에서 가장 주목받는 영국의 문명사가 토인비는 세계사를 비교문명론적으로 고찰하는 독특한 문명사관을 제시했다. 문명은 불리한 환경으로부터의 도전(challenge)에 대해 성공적으로 응전(response)해야 탄생과 성장이 가능하다는 이른바 ‘도전과 응전 원리’다. 이 원리에 따라 문명은 탄생·성장·붕괴·해체의 4단계 사이클(cycle)을 겪는다는 설명이 이른바 문명순환론이다. 그는 이 순환론에 근거해 인류가 창조한 30개 문명을 성장문명(21개)과 정체(停滯)문명(5개), 유산(流産)문명(4개)으로 유형화했다. 그러나 저자는 토인비가 거대한 세계역사의 흐름을 도전과 응전에 의한 순환이라는 단순한 교조주의적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일종의 사변적 역사철학에 불과하고, 또한 그가 창조적 소수(지도자나 영웅)의 역할을 과대평가하며 ‘신의 법칙’에 의해 해체기 문명이 구제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 등은 명백한 관념론적 역사관으로 비판받는다며 토인비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어서 저자는 20세기 후반 냉전 시대가 종식되었지만 인류의 기대와는 달리 다시 새로운 유형의 국제적 분란이 숱하게 발생하자, 전래의 연구 기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갑작스레 현대적 문명담론이 나타났다고 설명하고, 그 대표적 사례로 동방에 대한 서방의 지배주의적 사고방식을 갈파한 사이드(Edward W. Said)의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의 ‘문명충돌론’과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등장한 뮐러(Harald Muller)의 ‘문명공존론’ 등을 고찰한다(5장). 그러나 이들 문명담론은 문명 연구자들이 아니라 정치학자들에 의해 주로 이루어지다보니 그 주요 내용이 법이나 권력, 갈등이나 정의 같은 정치학 영역의 연구에 집중되어 문명 자체의 이해와는 크게 관련이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문명의 공존이나 조화를 언급할지라도 그 실현의 기본 방도와 수단인 교류에 관해서는 도외시했다. 저자는 특히 헌팅턴이 복합적인 문명 개념을 단순한 가치체계(주로 종교)로 축소하고, 문명 간의 차이를 문명 본연의 ‘충돌’인 양 착각하며, 지구촌의 분란을 숙명화한다고 비판한다.
문명의 교류는 어떻게 시작되었나저자의 정의에 따르면, 문명교류란 인간이 정신적·육체적 노동을 통해 획득한 서로 다른 결과물을 유무상통(有無相通)과 호혜(互惠)의 원칙에 따라 주고받는 행위로, 18세기에 뒤늦게 시작된 문명담론과는 무관하게 일찍이 문명시대 이전부터 줄곧 이어져왔다(6장). 학계에서는 문명교류의 시원에 관해 후기 구석기시대(1만 2천~3만 5천년 전)에 인류의 장거리 이동이 시작되자 초기 원시적 문명이 이동·전파되었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그 실증 유물로 제시되는 것이 유럽 7개 지역 19곳에서 출토된 비너스(venus)상으로, 1만 2천~2만 5천년 전에 제작된 이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은 동유럽으로부터 시베리아를 지나 중국 훙산문화에도 그 흔적을 남겨놓음으로써 명실상부한 초기 문명교류 유물로 알려졌다. 이렇게 시작된 문명교류는, 인류의 장거리 이동에 동반하며 그 개시가 이루어진 태동기(약 3만년 전, 후기 구석기시대), 초기 문명교류 통로로서의 실크로드의 흔적을 남긴 여명기(1만년 전, 충적세), 중국의 한(漢)·당(唐)조와 로마제국 및 이슬람제국 간의 교류가 이루어진 발전기(서력기원 전후~18세기 중엽), 기계동력 이용과 산업혁명 및 식민지 개척 등으로 인해 활발한 교류활동이 벌어지고 오늘날의 신실크로드로 이어지는 개화기(18세기~현재) 등 4단계에 걸쳐 장족의 발전을 이어왔다.
저자는 특히 발전기와 개화기에 진행된 문명교류의 역사적 배경을 몇가지로 나누어 살핀다. 즉, 정치적 경략이나 식민화 같은 정치사적 배경, 군사적 정복과 같은 군사사적 배경, 교역을 중심으로 한 경제사적 배경, 과학기술의 전파를 비롯한 문화사적 배경, 민족이동이나 범민족적 수용 등 민족사적 배경, 교류인들이 주도하는 인적·교류사적 배경, 교통수단의 변화에 따른 교통사적 배경 등이다. 문명교류의 흥망성쇠가 입체적인 이들 역사적 배경이 어떠한가에 따라 좌우됨을 보여준다.(7장)
또 문명교류란 본질적으로 이질문명권 간에 유무상통하는 행위라고 강조하는 저자는 현대적 문명담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가 문명권의 개념과 문명권 설정의 기준(여건)이 통용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에 저자는 “문명권이란 문명의 전승이나 전파를 통해 이루어지고, 공통적인 문명 구성요소를 공유한 여러 국가나 민족, 지역을 망라하여 형성된 문명의 역사적·지리적 범주를 말한다”(274면)고 직접 정의하는 한편, 문명권 설정의 기준을 ⓛ문명 구성요소의 독특성(상이성) ②문명의 시대성과 지역성의 보장 ③문명의 생명력 유지 등 세가지로 든다. 그리고 이 기준에 따라 유목기마민족의 ‘준문명권’과 라틴아메리카문명권, 아프리카문명권, 유럽문명권, 북유럽(비크)문명권, 아시아문명권, 이슬람문명권, 동아시아문명권 등 8개 문명권을 시범적으로 설정해 서술한다. 특히 지금까지 완전히 무시되어온 비크문명권을 10여년간 동분서주하면서 수집한 유적·유물과 문헌자료들을 바탕으로 이 책에 학문적으로 편입시켰다.(8장)
유라시아 실크로드에서 환지구적 문명교류로문명은 모방이라는 근본 속성에서 산생되는 전파성과 수용성으로 인해 상호 교류가 불가피하다. 또한 문명교류는 문명의 또다른 근본 속성인 자생성에서 산생되는 보편성과 개별성에 의해서도 보장된다. 인류는 언제나 보편성에 바탕을 둔 문명의 공유를 염원하므로 문명교류가 이러한 보편성 형성의 첩경이 될 수 있으며, 개별성은 문명 간의 이질성을 조건지어주므로 문명교류의 결정적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문명의 속성에서 발원되는 이러한 문명교류의 당위성을 논하면서, 문명교류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교류의 성격이나 결과를 결정짓는 접변(接變, acculturation) 현상으로서 융합(融合, fusion)과 융화(融化, deliquescence) 및 동화(同化, assimilation)이며, 이를 면밀히 관찰하고 현실과 결부시켜 그 함의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9장)
문명은 정형화된 구조이면서 동시에 항상 변화·이동하는 생물로, 그 공간적 변화와 이동 과정이 곧 교류이며, 그러한 인류문명의 교류 통로를 우리는 ‘실크로드’라고 부른다. 저자는 오아시스 육로 단계에서 출발해 환지구적(環地球的) 확대가 이루어지는 실크로드 개념의 확대 과정을 살피면서, 지구적 문명교류의 통로인 실크로드의 초원로, 오아시스로, 해로라는 3대 간선을 상세하게 다룬다(10장). 이 과정에서 저자는 실크로드의 범주를 유라시아(구대륙)에만 한정시켰던 진부한 통념을 깨고 5대양 6대주를 아우르는 환지구적 문명교류 통로로 실크로드의 개념을 확대하는 한편, 우끄라이나에서 동시베리아(한반도 포함)에 이르는 광활한 북방 유라시아 초원지대에 산재하는 무덤인 쿠르간(kurgan)들에 대한 현장조사를 통해 지금까지 어림짐작으로만 그어진 초원 실크로드의 노선을 확실한 근거에 바탕을 둔 교류 통로로 자리매김하는 탁월한 성과를 보여준다.
실크로드는 대항해시대에 이르러 환지구적 해로로 확대됨으로써 명실상부한 환지구적 문명교류 통로로 그 위상을 비로소 정립하게 된다. 저자는 환지구로의 개척과 완수에 이르는 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대륙 ‘발견’, 정화의 ‘하서양(下西洋)’, 마젤란-엘까노의 ‘세계일주’, 빠나마운하 개통, 헤위에르달의 3대양 뗏목 일주 등 다섯 인물과 사건을 자세히 조망한다.(11장)
한민족은 실크로드의 일원이었다한반도의 주민은 실크로드가 생겨나면서부터 이를 소통과 교류의 통로로 활용해왔으나 어느날 이 사실이 망각되었다. 이 때문에 저자를 포함한 연구자들은 한동안 한반도와 실크로드의 관계를 두고 기존의 실크로드를 한반도까지 ‘연장’할 수 있을지를 논의했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실크로드학을 결산하는 이 책에서 관점을 ‘연장’에서 ‘복원’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반도 실크로드는 엄존하는 사실(史實)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저자는 명도전로(明刀錢路), 돌멘(dolmen, 지석묘), 가락국 수로왕과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 간의 국제결혼, 로만글라스계 유리 제품, 인물무늬 상감구슬 목걸이, 빗살무늬토기문화대 등 여러 생생한 역사적 근거들을 곁들여 일일이 고증하면서, 우리 겨레가 세계인들과 더불어 다듬고 보듬어온 실크로드가 우리 겨레를 뿌리 내리게 하고, 세계와 소통시키며, 세계 속에 우리 겨레의 위상을 드높인 길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12장)
아울러 저자는 일찍이 우리 역사에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교류의 역사에 기려야 할 위대한 선현들이 있음을 알린다. 1300여년 전 세계적인 서역기행문 『왕오천축국전』을 불후의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남겨놓은 혜초(慧超)는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여행인으로서는 최초로 실크로드 해로와 육로를 연속적으로 답파하고, 그 과정을 생동한 기록으로 남기면서 우리 겨레의 자랑스러운 위상을 만방에 떨친 세계인이다. 또한 고선지(高仙芝)는 세계의 지붕 파미르고원의 주인이라는 평을 들으며 다섯차례의 서역 원정을 단행해 세계 전쟁사에 불멸의 전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인류문명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제지술의 전파에 절대적 기여를 한 인물이다.(13장)
이질적인 문명들의 끊임없는 교류로
보편문명을 창출하는 그날까지책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문명사의 전환점을 맞게 된 이 시점에서 보편문명 담론사를 실사구시하게 반추하여 그 허와 실을 제대로 가려내 올곧고 미래지향적인 보편문명론을 바로 세우는 것이 절박한 시대적 요청이라고 일갈한다. 근대화되지 못한 비서구사회의 근대화를 위한 ‘책임과 의무’를 운운하며 서구의 정치적·경제적 구조의 확산만을 정당화한 서구적 보편문명론은 실상 제국주의적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강제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공유와 평등, 공정에 바탕을 두고 인류의 공생공영을 지향하는 범세계적인 보편문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14장) 그리고 이같은 보편문명을 궁구하는 문명교류학의 연구방법으로 총체론적 연구방법, 비교론적 연구방법, 통시적(diachronic) 접근방법을 제시한다.(15장)
여타 현대적 문명담론과는 구별되는 ‘문명교류론’을 제창하면서 교류를 통한 보편문명의 창출과 인류 공생공영의 실현을 추구하는 ‘문명대안론’을 모색하는 저자는, 모방성과 공유성 같은 문명 본연의 속성들이 최대한 올곧게 발휘되고 기능한다면 보편문명은 무한한 확장성을 갖고 순기능적으로 창출되고 교류되며, 확산되고 완숙해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문명교류의 무한확산 시대’이자 ‘현대적 문명담론의 시대’인 오늘의 시점에서 문명대안론이 명실상부한 미래사회 건설의 대안이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2025년 2월, 저자는 이 책의 집필과 교정이라는 마지막 소명을 마친 뒤 파란만장했던 이생의 삶을 뒤로하고 타계했다. 저자의 학문적 유지를 계승하는 한국문명교류연구소 구성원들이 남은 편집 작업을 마무리하며 짧은 추모의 글을 보탰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문명교류학이 문명의 교류와 소통을 주제로 하고 범지구적 보편문명의 보급과 확산을 기조로 하여 평등하고 공정하며 부유한 (새)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국제적 인문과학의 신생 분과라고 정의하며, 그 습득을 위해서 각고정려(刻苦精勵)해줄 것을 후학들에게 곡진히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