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이재명 대통령이 걸어온 길”
이재명 대통령은 1963년 경북 안동시 예안면 도촌리 지통 마을에서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1976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족과 함께 경기 성남시 상대원동 꼭대기 월셋집으로 온 가족이 올라왔다.
열두 살 소년은 진학 대신 목걸이 공장 ‧ 고무 부품 공장 ‧ 냉장고 공장 등을 6년간 전전했다. 아버지는 동네 쓰레기를 치웠고 어머니는 상대원시장 화장실에서 청소했다. 자식 공부보다 번듯한 집 한 채를 마련하는 게 우선인 아버지 아래서 중 ‧ 고등학교 진학은 그림의 떡이었다.
여섯 번째로 취업한 스키 장갑과 야구 글러브를 만드는 공장에서 프레스에 왼쪽 손목 관절이 눌리는 사고를 당했다. 밥벌이가 급했던 형편에 수술을 받긴 어려웠다. 이때 후유증으로 왼팔은 손목이 뒤틀린 채 굽었고 6급 장애 판정을 받았다. 팔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에 다락에 연탄불을 피우고 수면제 스무 알을 먹었지만 멀쩡하게 눈을 뜨고 일어났다. 수면제를 찾는 소년을 보고 상황을 짐작한 약사가 수면제 대신 소화제 같은 것을 잔뜩 줬던 것이다.
1981년 사립대학에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특별장학생 제도가 도입되자 마음을 다잡고 대입을 준비했다. 3학년까지 등록금 전액을 면제받고 매달 생활비 20만 원을 받는 중앙대 법대에 합격했다. 공장에서 받던 월급의 3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어머니는 “재맹아, 내는 인자 죽어도 한이 없대이”라고 했다.
1986년 겨울 스물셋에 두 번째 도전 끝에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아버지는 그해 3월 위암 재발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고 이 대통령이 합격 사실을 전한 며칠 뒤 세상을 떠났다.
사법연수원 생활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지연과 학연, 집안을 자랑하는 연수생들이 많았고 몇몇은 연줄 없는 연수생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운동권의 지하서클 조직인 비공개 기수 모임에서 활동했다. 당시 모임에는 문무일 전 검찰총장과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더불어민주당 정성호 의원, 최원식 문병호 전 의원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1988년 노태우 정부에서 지명된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에 반대하는 연수원생 성명을 주도했다.
사법연수원 성적은 상위 30% 안팎으로 좋았지만, 판사나 검사 대신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연수원 시절 노무현 변호사의 강연을 듣고 판검사가 아니어도 먹고살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어 인권변호사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연수원 2년 차에 인권변호사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에서 변호사 실습을 했다.
1989년 성남시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성남공단의 노동 사건과 외국인 노동자의 산업재해 사건, 경원대와 한국외국어대 등 구속된 학생들의 변호는 물론 시국사건 양심수들의 사건도 무료로 맡았다. 일주일에 두 번은 이천노동상담소를 찾아 노동운동을 지원하고 노동법률 상담을 했다.
변호사로서 이름을 알린 건 ‘성남시민모임’ 집행위원장으로서 2000년 분당 파크뷰 특혜 분양 의혹을 제기했을 때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인사는 “김대중 정부였고 유죄 판결을 받은 김병량 당시 시장도 원래 우리가 밀던 분”이라며 “그럼에도 부당한 일에 반대하는 이 대통령을 보면서 패기 넘치는 변호사라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이 대통령은 2002년 5월 기자회견을 열고 최철호 전 KBS PD와 김병량 당시 시장의 통화 내용을 폭로했고 이른바 ‘검사 사칭’으로 벌금 150만 원 형을 받았다.
성남 구시가지 대형 병원들이 문을 닫으며 의료 공백이 심각해진 2004년 성남 공공의료원 설립을 목표로 시민 2만 명의 뜻을 모아 주민 발의 조례를 만든 것도 정계에 투신하는 계기가 됐다. 어렵게 만든 조례는 시의회에서 47초 만에 날치기 부결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방청하던 시민들과 항의하다가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수배됐다.”며 “성남시의료원은 제가 정치를 결심한 이유”라고 했다.
2006년 성남시장 후보와 2008년 성남 분당갑 국회의원 후보로 도전해 고배를 마셨지만, 2010년 제19대 성남시장으로 당선됐다. 이 대통령은 “전임 시장이 진 빚 5,200억 원을 단기간에 갚을 수 없다.”며 모라토리엄을 선언해 이목을 끌었다. 이후 3년 6개월간 예산 삭감, 긴축 재정 등을 통해 모든 빚을 갚아 모라토리엄을 졸업했고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벤치마킹 사례가 되기도 했다. 성남시장 시절 추진한 무상 교복 ‧ 공공산후조리 지원 ‧ 청년 배당 등 보편적 복지 사업은 그의 브랜드가 됐다.
‘변방의 장수’였고, 중앙 정치무대의 주목을 받은 건 2016년 지방자치단체 예산권을 둘러싼 박근혜 정부와의 갈등으로 11일간 단식 농성을 하면서부터다. 같은 해 10월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자 제도권 정치인 중 처음으로 박 대통령 하야를 공개 주장했다. ‘사이다’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2017년 대선 경선에 출마해 3위에 그쳤지만 대선 주자로서의 존재감을 보여줬다.
2018년 경기도지사에 당선됐고 경기도정을 이끄는 동안 기본소득을 비롯한 ‘기본 시리즈’를 내세우며 권토중래에 나섰다.
2021년 10월 대선 경선에서 승리했지만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등이 검찰 수사로 이어지면서 2022년 3월 본선에서 0.73%포인트 차로 패배했다.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고 같은 해 8월 전당대회에 출마해 당권을 잡았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을 선포하자 계엄 해제를 주도했다. 비상계엄 소식을 듣고 국회로 가는 길에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통해 “국회로 와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으로 조기 대선이 확정되자 민주화 이후 가장 높은 경선 득표율인 89.77%의 득표로 민주당 경선에서 압승했다. 대선 유세 과정에선 “개인 이재명의 승리가 아니라 내란 종식과 민생 회복을 바라는 국민의 승리, 상식의 승리, 정의의 승리, 민주주의의 승리를 국민 여러분과 함께 반드시 이뤄내겠다.”고 강조했다. 결국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과 ‘빛의 혁명 완수’를 내세우며 21대 대통령으로 국민의 선택을 받게 됐다.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사와 당선 소감문, 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문을 필사해 보자. 필사를 해 보면 이재명 대통령이 보입니다.
2025년 6월 10일 엮은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