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오 헨리
미국 단편소설 작가로 본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William Sydney Porter)이고,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즈버러에서 내과의사인 아버지 알게몬 시드니 포터와 어머니 메리 제인 버지니아 와인 포터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려서 양친을 잃어 숙모가 교사로 있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882년 텍사스로, 1884년에는 오스틴으로 이주하면서 목장 관리, 제도사, 기자, 은행원 등의 직업을 전전하였다. 1887년 아솔 에스테스와 결혼했으며, 1891년 오스틴은행에 근무하면서 아내의 내조를 얻어 주간지를 창간했으며, 지방신문에 유머러스한 일화를 기고하는 등 문필생활을 시작하였다. 1896년 2월 은행 공금횡령혐의로 기소되었다가 친구들의 도움으로 온두라스로 도피했으나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체포되었다. 1898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교도소의 병원에서 약제사로 일하면서 딸의 부양비를 벌기 위해 글을 썼고, 즉각 잡지 독자들로부터 인기를 얻었으며, 출감하면서 이름을 오 헨리란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1903년 12월부터 1906년 1월까지 뉴욕의 《월드(World)》지에 매주 글을 기고하였다. 최초의 소설집 《캐비지와 왕(Cabbages and Kings)》(1904)을 시작으로, 《400만(The Four Million)》(1906), 《손질 잘한 램프(The Trimmed Lamp)》(1907), 《서부의 마음(Heart of the West)》(1907) 등의 단편집을 계속해서 출간했다.헨리의 말년은 악화된 건강, 금전상 압박과의 싸움, 알코올 중독 등으로 얼룩졌다. 1907년에 한 재혼은 불행했다. 1910년 6월 5일, 과로와 간경화, 당뇨병 등으로 뉴욕 종합병원에서 사망했다.
지은이 : 다자이 오사무
다자이 오사무(일본어: 太宰 治, 1909년 6월 19일 ~ 1948년 6월 13일)는 일본의 소설가이다. 1936년(쇼와 11년)에 첫 작품집 『만년(晩年)』을 간행하였다. 1948년(쇼와 23년)에 애인 야마자키 도미에(山崎富栄)와 함께 다마가와(玉川) 죠스이(上水)에 투신자살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달려라 메로스(원제: 走れメロス)」, 「쓰가루(津軽)」, 「옛날 이야기(お伽草紙)」, 「사양(斜陽)」, 「인간실격」이 있으며, 사카구치 안고・오다 사쿠노스케(織田作之助)・이시카와 준(石川淳) 등과 함께 신희작파(新戱作派)・무뢰파(無賴派) 등으로 불린다.본명은 쓰시마 슈지(일본어: 津島修治)인데, 필명을 쓴 까닭은 쓰가루 지방(아오모리현 서부) 출신인 스스로가 본명을 읽으면 쓰가루 방언의 영향으로 지시마(チシマ)로 들리지만 이 필명은 방언투로 읽어도 발음이 그대로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1아버지는 공무로 늘 바빴고 어머니는 병약했으므로, 다자이 자신은 유모 등의 손에서 자랐다.1916년(다이쇼 5년)에 가나키제일심상소학교(金木第一尋常小學校)에 입학하였다. 4년만인 1922년(다이쇼 11년) 4월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학력 보충을 위해 현지 4개 마을에서 조합으로 세운 메이지고등소학교(高等小學校)에 다시 1년간 통학하였으며, 1923년(다이쇼 12년)에는 아오모리 현립 아오모리중학교(靑森中學校)[2]에 입학하는데, 입학 직전인 3월에 다자이의 아버지가 도쿄에서 세상을 떠났다.프랑스어를 전혀 하지 못하면서도 프랑스 문학을 동경해 4월에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불문학과에 입학하지만, 높은 수준의 강의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데다 친가에서 부쳐주는 돈으로 마음껏 방탕하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그에 대한 자기 혐오, 내지 다자이 자신의 처한 위치와 더불어 마르크시즘에 심취해 갔고, 당시 치안유지법에서 단속하고 있던 공산주의 활동에 몰두하느라(다만 공산주의 사상 자체에 진심으로 빠져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강의조차 대부분 출석하지 않았다. 또한 소설가가 되기 위해 5월부터 이부세 마스지(井伏鱒二)의 제자로 들어갔는데, 이때부터 본명인 쓰시마 슈지가 아닌 다자이 오사무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대학은 거듭된 유급에 수업료 미납으로 제적된다.[5] 재학 중에 만나 동거하던 술집의 여급으로 유부녀였던 18세의 다나베 시메코(田部シメ子)와 1930년 월에 가마쿠라의 고시고에(腰越) 바다에서 동반 투신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시메코만 죽고 다자이는 혼자 살아남았다. 이 일로 다자이는 자살방조 혐의로 검사로부터 조사를 받았지만, 형 분지(文治) 등의 탄원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6]「인간실격(人間失格)」, 「앵두(櫻桃)」를 마무리한 직후 1948년 6월 13일, 타마가와(玉川) 죠스이(上水)에서 애인 야마자키 토미에(山崎富栄)와 동반자살하였다.[14] 이때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이 사건은 발표 직후부터 온갖 억측을 낳았는데, 도미에에 의한 억지 정사설, 희극 심중 실패설 등이다. 다자이가 생전에 아사히 신문에 연재 중이던 유머 소설 「굿 바이」도 미완의 유작으로 남았는데, 공교롭게도 13화에서 작가의 죽음으로 절필되었다는 데에서 기독교의 징크스를 암시하는 다자이의 마지막 멋부림이었다는 설도 있고, 그의 유서에는 '소설을 쓰는 것이 싫어졌다' 등의 취지가 적혀 있었는데, 자신의 컨디션 저조나 다운증후군을 앓는 저능아였던 외아들의 처지에 대한 비관도 자살의 한 원인이 되었을 거라는 설도 있다. 기성 문단에 대한 '선전포고'로까지 불리던 다자이의 연재 평론 「여시아문(如是我聞)」의 마지막회는 다자이 사후에 게재되었다. 유해는 스기나미 구 호리노우치에서 화장되었다. 계명(戒名)은 문채원대유치통거사(文綵院大猷治通居士)였다.다자이의 사체가 발견된 6월 19일은 공교롭게도 그의 생일이었는데, 죽기 직전에 쓴 단편 「앵두」와도 관련해, 생전에 다자이와는 동향으로 교류가 있던 곤 간이치(今官一)에 의해 '앵두 기일'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날은 다자이 문학의 팬들이 그의 무덤이 있는 도쿄도 미타카시의 젠린사(禪林寺)를 찾는 날이기도 하다. 또한 다자이가 태어난 아오모리 현 카나기마치에서도 '앵두 기일'에 맞춰 다자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는데, 다자이의 탄생지에서 다자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 옳다는 유족의 요망도 있어 다자이 오사무 탄생 90주년이 되는 1999년부터는 「다자이 오사무 탄생제」로 이름을 고쳤다.
지은이 :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1896년 9월 24일 미국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에서 아버지 에드워드 피츠제럴드, 어머니 몰리 맥퀼란 사이에서 태어났다. 위로 누나가 둘 있었지만 모두 갓난아이 때 사망했고, 이 때문에 어머니의 과한 애정을 받으며 성장했다.12세에 세인트폴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레이먼드 담보물의 신비」라는 글을 처음으로 교지에 싣는 등 어릴 때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였다. 15세에 부유층 자제들만 입학하는 뉴먼 스쿨에 입학했는데 이때 느낀 열등감이 이후 작품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뉴먼 스쿨 졸업 후 1913년에 프린스턴대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기에 지네브라 킹이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부유한 그녀의 아버지가 그를 반대했던 사건이 ‘리치걸 푸어보이’라는 피츠제럴드 문학의 핵심 에피소드로 발전한다. 그녀는 이후 젤다와 함께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하는 데이지의 모델이 된다.1917년에 미 육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연인 젤다와 결혼을 약속하지만 불안정한 장래 때문에 파혼당하고 나서 심기일전하여 장편소설 『낙원의 이쪽』을 발표한다. 이를 계기로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고, 젤다와의 결혼에 성공한다.1925년에 세 번째 장편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출간했다. 이 책은 이후 20세기 최고의 미국 소설로 꼽히지만 출간 당시에는 반응이 미미했고, 그 후에 발표한 『밤은 부드러워』도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냈다. 설상가상으로 본인의 알코올 의존증과 아내의 정신병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지만 눈에 띄는 성과는 없었고 주로 잡지에 단편소설을 발표하거나 영화사에서 극본 작업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소설가로서의 정체성을 끝까지 놓지 않았고, 1940년에 미완성 장편소설 『대군의 사랑』을 집필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지은이 : 이디스 워튼
1862년 1월 24일, 유서 깊은 전통을 지닌 뉴욕의 한 가정에서 셋째 딸로 태어났다. 1866년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이주해서 1872년까지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1872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정식으로 학교에 다니는 대신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아버지의 서재에서 문학, 철학, 종교 서적을 탐독했다. 그리고 16세가 되던 1878년 처음으로 시집을 출간했다. 1880년 아버지의 건강 문제로 가족이 다시 유럽으로 떠났으며 1882년 아버지가 프랑스 칸에서 사망하자 어머니와 함께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1885년 23세의 나이에 열세 살 연상의 에드워드 로빈스 워튼과 결혼한 후, 그녀는 심각한 신경쇠약을 앓았다. 불행한 결혼생활, 사회적 지위와 작가적 야심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서였다. 신경쇠약을 치료할 겸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생활했으며, 소설과 유럽 여러 지역의 역사, 건축, 미술에 대한 글을 썼다. 그녀는 1913년 남편과 이혼하고 1937년 파리에서 사망할 때까지 20여 년을 프랑스에서 살았다. 그사이 몇 편의 단편과 몇 권의 단편집을 출간한 이디스 워튼은 1905년 『환락의 집』을 발표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그녀는 그 소설에서 뉴욕의 본질에 대한 연대기를 쓰려 했다. 『환락의 집』이 친구로 지내던 소설가 헨리 제임스를 포함한 당대 미국 문단에서 큰 환영을 받음으로써, 평단의 명성과 대중적 인기를 모두 누리는 작가로 확고한 위치에 오른 것이다.그녀는 헨리 제임스, 싱클레어 루이스 등과 친하게 지냈으며 1914년 프랑스에 정착한 이후로는 장 콕토, 앙드레 지드 등 유명한 문인들과 교류했다. 또한 시어도어 루스벨트와도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그녀는 프랑스 전선을 여덟 차례 방문하면서 전쟁의 참화를 묘사한 『싸우는 프랑스』를 출간했고 전쟁 구호 활동도 적극적으로 펼쳤다. 이 공로로 그녀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이후에도 몇 권의 소설책을 출간했으며 전쟁 후 1920년에 발표한 『순수의 시대』로 1921년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923년 마지막으로 미국을 방문한 그녀는 전쟁소설 『전선의 아들들』을 발표했으며 1926년에는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평생 동안 소설, 단편소설, 시, 에세이, 여행기, 회고록 등 40여 권이 넘는 책을 출간한 그녀는 병상에서까지 글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1937년 75세로 프랑스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대표작으로는 『순수의 시대』 외에도 『환락의 집』(1905), 『이선 프롬』(1911), 『암초』(1912), 『여름』(1917) 등이 꼽힌다.
지은이 : 헤르만 헤세
독일 남부 뷔르템베르크의 칼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하네스는 목사였고, 어머니 역시 독실한 신학자 가문 출신이라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90년 라틴어 학교에 입학했고, 이듬해 마울브론 신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신학교의 속박된 생활을 못 견디고 뛰쳐나와 한때 자살을 시도했다. 시인이 되기를 꿈꾼 뒤 시계 공장에서 시계 톱니바퀴를 닦으며 문학수업을 시작했다. 1895년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해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를 출간했다. 1904년 첫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출간하여 문학적 지위를 얻었다. 그해에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했으며, 스위스로 이주해 시작에 몰두했다. 그 후 인도 여행으로 동양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으며, 아내의 정신병, 헤세 자신의 신병 등 가정적 위기를 겪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스의 광적인 폭정에 저항하는 등 파란 많은 세월을 겪었다. 주요 작품으로 《수레바퀴 밑에서》, 《게르트루트》, 《크눌프》, 《데미안》,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트문트》, 《유리알 유희》(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등이 있다.1877년 7월 2일 남부 독일 칼브에서 태어남. 1881년 스위스의 바젤로 이주함. 1890년 라틴 어 학교에 입학함.1891년 어려운 주州 시험을 통과하고 마울브론의 신학교에 들어감. 1893년 칸슈타르 고교를 중퇴함.1895년 서점 견습 점원이 됨.1899년 처녀시집 《낭만적인 노래(Romantische Lieder)》와 산문집 《자정 이후의 한 시간(Eine Stunde hinter Mitternacht)》을 발간함.1901년 시문집 《헤르만 라우셔(Hermann Lauscher)》를 발간해 시인 부세의 주목을 받음.1902년 《시집(Gedichte)》을 어머니에게 헌정했으나, 어머니는 출판 직전에 별세.1904년 최초의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Peter Camenzind)》로 일약 인기 작가가 됨. 9세 연상인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함. 1906년 제2의 장편소설인 《수레바퀴 아래서(Unterm Rad)》를 발표함.1907년 소설집 《이 세상 이야기(Diesseits)》를 발간함. 1908년 《이웃 사람(Nachbarn)》을 발간함. 1910년 《게르트루트(Gertrud)》를 발간. 방랑벽이 심한 그와 피아니스트인 아내와의 불화로 인도 지방으로 여행함. 귀국 후 스위스 베른으로 이주함. 1911년 시집 《도상(途上, Unterwegs)》을 발간함.1912년 《우회로(迂廻路, Umwege)》를 발간함.1913년 〈로스할데(Roßhalde)〉를 씀. 이 작품에 그려진 예술가의 결혼 생활의 파국은 마침내 헤세 자신의 현실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반전주의자로 지목받아 국적을 스위스로 옮겼으며, 같은 입장에 있던 R. 롤랑과 친교를 맺음. 1915년 서정적인 방랑자의 이야기 《크눌프(Knulp)》와 시집 《고독자의 음악(Musik des Einsamen)》을 발간. 전쟁의 체험과 정신병이 악화된 아내와의 이별 등은 헤세의 작품 경향을 일변시켰음. 1919년 정신 분석 연구로 자기 탐구의 길을 개척한 대표작인 《데미안(Demian)》을 발간함.1922년 《싯다르타(Siddhartha)》와 〈내면에의 길(Weg nach Innen)〉에서 불교적 해탈의 비밀을 추구하였음. 1927년 《황야의 이리(Der Steppenwolf)》를 발표. 이 작품은 내외의 분열과 고뇌를 그린 《데미안》과 일관되어 있음. 1928년 에세이집 《관찰(Betrachtungen)》을 발간함.1929년 시집 《밤의 위안(Trost der Nacht)》을 발간함.1930년 스위스에 있으면서 《지(知)와 사랑(Narziss und Goldmund)》을 발표. 이 작품은 신학자로서 지성의 세계에 사는 나르치스와, 여성을 알고 애욕에 눈이 어두워진 골드문트와의 우정의 역사를 다룬 것임.1933년 소설집 《작은 세계(Kleine Welt)》를 발간함.1942년 《시집(Die Gedichte)》을 발간함. 1943년 20세기의 문명의 비판서라 할 수 있는 미래소설 장편 《유리알 유희(Das Glasperlenspiel)》를 발표함.1945년 시선집 《꽃 피는 가지(Der Blutenzweig)》를 발간함. 1946년 괴테상과 노벨문학상 수상. 《전쟁과 평화(Krieg und Frieden)》를 발간함.1951년 《만년의 산문(Spate)》을 발간함.1954년 《헤세와 로망 롤랑의 왕복 서한》을 발간함.1955년 《악마를 부름(Beschworungen)》을 발간함.1962년 8월 9일 사망함.
지은이 : 기 드 모파상
1850년 프랑스 항구도시 디에프 근처 미로메닐 성城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별거 이후 에트르타에 있는 어머니의 별장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이때 경험한 노르망디의 대자연, 시골 사람들의 성정과 습성 등은 그의 작품의 배경과 소재로 자주 나타난다. 고등학교 시절, 작가로서의 삶에 사표가 된 두 명의 스승, 시인 루이 부예와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를 만난다. 1869년부터 파리 법과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지만, 이듬해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군대에 징집되어 학업을 중단한다. 1871년 7월에 제대하여 1872년 3월 아버지의 소개로 해군성에 취직한다. 1880년 모파상은 에밀 졸라 등과 함께 소설집 『메당의 저녁Les Soirees de Medan』을 출판하고, 여기 수록된 「비곗덩어리」가 프랑스 문단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890년까지 10년 동안 300여 편에 이르는 중·단편과 6편의 장편, 5편의 희곡 등을 창작하며 플로베르, 졸라와 더불어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이 10년은 육체와 정신의 병이 심각하게 나빠진 시기로, 그는 척추 통증과 시력 저하, 불면증 등 갖가지 질병에 시달렸다. 몇 번의 자살 기도 이후 1892년 파리 교외의 정신병원에 보내진 뒤 그곳에서 거의 혼수상태로 지내다가 1893년 7월 6일 생을 마감했다. 사진출처 - 창비 제공
지은이 : 수잔 글래스펠
1876년 아이오와 주 대븐포트에서 태어났다. 여성의 2%만 대학에 가던 시절에 드레이크대학을 졸업했고 잠시 기자로 활동했다. 시카고대학원을 졸업한 후 유부남인 조지 크램 쿡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쿡이 이혼하자 그와 결혼했다. 둘은 프로빈스타운 플레이어스를 창단해 20세기 초 미국 연극을 이끌었다. 극단은 성공했고 다른 브로드웨이 극단의 경쟁을 유발했다. 상업성에 빠져 원래 정신이 희석되었다고 판단, 극단 운영을 중단하고 그리스로 떠난다. 쿡은 이곳에서 질병으로 사망했다. 글래스펠은 미국으로 돌아가 소설 창작에 전념했다. 1948년에 사망했다.
지은이 : 시그리드 운세트
시그리드 운세트(Sigrid Undset, 1882 -1949) 노르웨이 소설가,덴마크 칼룬보르에서 태어남, 노르웨이로 가족이 이주, 1928년 노벨문학상 수상, 고고학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중세 북유럽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쌓음, 상업학교를 졸업후 사무원으로 일하며 글을 쓰기 시작함, 노르웨이화가와 결혼하였으나 이혼후 가톨릭으로 개종,.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고 독일군이 노르웨이를 점령하자 미국으로 망명하여 글과 방송으로 반 나찌 저항 운동을 함, 전쟁후 노르웨이로 돌아옴, 문학활동과 조국에 대한 헌신으로 노르웨이 최고훈장을 수상, 1949년 사망함. 데뷔작으로 마르트 울리 부인, 대표작으로 크리스틴 라브란스다테르(중세 노르웨이의 삶을 다룬 3부작) 올라브 아우둔쇤 ,예니등과 단편집 행복한 시절, 노르웨이 역사,신화, 아이슬란드 신화에 바탕을 둔 군나르의 딸외에 여러 단편,수필등이 있슴.참고로 노르웨이 화폐 500크로네 지폐에는 운세트의 얼굴이 들어가 있고 노르웨이 본국에는 작가의 동상과 함께 소설 크리스틴 라브란스다테르의 주인공인 크리스틴의 동상도 있다.
봄날 기 드 모파상
봄 한 접시 오 헨리
벚나무와 휘파람 다자이 오사무
두 소녀 시그리드 운세트
빛이 머무는 곳에서 수잔 글래스펠
4월의 소나기 이디스 워튼
질문하는 여자들 버지니아 울프
약혼기 헤르만 헤세
젤리빈 F. 스콧 피츠제럴드
도서 DB 제공 - 알라딘 인터넷서점 (www.ala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