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법사회학, 행정법, 법수사학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법치주의와 사법부의 역할을 연구해온 저자 한스 페터 그라베르는 나치 독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의 군사독재 정권, 나치 점령 시기의 유럽 국가들, 자유주의 사회인 미국과 영국 등 여러 나라의 다양한 사례를 통해 ‘정의를 배반한 판사들’의 실상을 탐구한다.“법복 입은 사람들이, 억압적인 지도자들의 가장 악랄한 정책을 어떻게 그렇게 자주, 쉽게 실행할 수 있는지”를 “누구보다 탁월한 비교적 시각, 역사적 깊이, 그리고 법철학적 정교함으로 파헤친” 심층적 연구(마크 오시엘, 아이오와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라는 평가에 걸맞게 풍부한 역사적 사례를 기초로 심도 있는 법철학적 연구를 담고 있다.
출판사 리뷰
나치 독일, 점령 치하 유럽, 남아프리카공화국,
라틴아메리카, 미국과 영국……
법치주의가 공격받는 시대,
사법부의 역할과 한계에 관한 심층 보고서
‘사법부가 과연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지키는 쪽에 설까?’
2024년 12월 3일 밤, 현직 대통령이 저지른 내란 사태 와중에 우리 국민이 잠 못 이루고 노심초사하며 곱씹은 질문이다. 특수부대의 무장 헬기에서 쏟아져 나온, 완전무장한 계엄군이 국회 본회의장을 향해 들이닥치며 민주주의 헌정질서를 벼랑 끝으로 몰아간 절박한 위기의 순간을 온 국민이 지켜봤는데도 파면 선고를 하염없이 미루는 헌법재판소와 수십 년에 걸친 법 집행의 관행을 뒤집어 내란 우두머리를 풀어주는 법원의 모습은 ‘사법부는 어느 편에 서 있는가’라는 깊은 불안과 회의를 불러 일으켰다.
사실 한국의 사법부는 오랫동안 이런 질문을 받아왔다. 법원은 과거 군사정권의 비상계엄 선포를 터무니없는 궤변으로 정당화했을 뿐 아니라 고문으로 얻어낸 허위자백을 증거로 인정해 정치적 반대자들을 범죄자로 만들려는 정권의 뜻을 뒷받침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유서대필’ 조작사건과 ‘사법농단’ 사태가 보여주듯 사법부는 ‘법치주의와 인권의 최후 보루’라는 임무에 충실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내란 우두머리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파면 선고로 큰 고비를 넘기기는 했지만, 앞으로 내란 사태를 법적으로 수습하는 과정에서 또 어떤 예상치 못한 일을 벌일지, 국민이 사법부에 대해 불신과 염려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과연 한국의 법원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수호자인가?
『정의를 배반한 판사들』은 이런 의문을 품은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법사회학, 행정법, 법수사학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법치주의와 사법부의 역할을 연구해온 저자 한스 페터 그라베르는 나치 독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의 군사독재 정권, 나치 점령 시기의 유럽 국가들, 자유주의 사회인 미국과 영국 등 여러 나라의 다양한 사례를 통해 ‘정의를 배반한 판사들’의 실상을 탐구한다. “법복 입은 사람들이, 억압적인 지도자들의 가장 악랄한 정책을 어떻게 그렇게 자주, 쉽게 실행할 수 있는지”를 “누구보다 탁월한 비교적 시각, 역사적 깊이, 그리고 법철학적 정교함으로 파헤친” 심층적 연구(마크 오시엘, 아이오와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라는 평가에 걸맞게 풍부한 역사적 사례를 기초로 심도 있는 법철학적 연구를 담고 있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저자는 이 책에서 “법의 자율성, 그리고 판사에게 법치주의의 핵심원칙을 거스르도록 요구하는 법률이 그 자율성을 어떻게 흔들고 공격하는지”(5쪽)를 탐구하면서 그 상황에서 판사들이 겪는 문제를 다음과 같은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첫째, 국가가 억압적으로 변하고 사법부가 그 억압에 기여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둘째, 억압에 협력한 판사들을 법적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셋째, 그들의 행동을 도덕적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억압에 맞서도록 독려할 수 있는가?
역자 정연순 변호사는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본부장,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장을 역임하는 등 다양한 실천을 통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실현하는 데 기여해온 법률가로, 그 과정에서 해온 고민과 전문성을 살려 책에서 다룬 다양한 사례와 법철학적 쟁점을 정확하고도 읽기 쉽게 번역했다.
『정의를 배반한 판사들』은 오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중대한 질문 ? 민주사회에서 사법부와 판사들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공격받을 때 판사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 를 깊게 사유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법적 창의성’을 발휘해 불의에 앞장선 판사들
사람들은 사법부와 판사가 권위주의 정권에서도 정의와 인권을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이길 원한다.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독립성을 보장하고 많은 권한을 부여한다. 하지만 현실의 사법부와 판사는 대개 그렇지 않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는 아파르트헤이트 시기의 사법부를 이렇게 평가했다.
법원과 법조계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입법부와 행정부가 벌인 불의에 일반적으로 동조했다. …… 법률가들 상당수가 법원을 통한 아파르트헤이트의 확립과 옹호에 적극 가담했다.(48쪽)
남아프리카공화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나라에서 사법부는 정권의 억압을 정당화하고 타협했다. “대부분의 경우 법원은 억압에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그에 대해 합법성이라는 외양을 입혀주고 결국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한다.”(66쪽)
권위주의 정권이 만든 법을 시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때론 ‘법적 창의성’을 발휘해 억압에 앞장서기도 한다. 유대인과 독일인의 혼인과 성관계를 금지한 뉘른베르크혈통보호법이 제정되기 전에도 독일 대법원은 “민족사회주의 세계관에서 상정하는 결혼의 본질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에 근거하면 혼혈 결혼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뉘른베르크혈통보호법 제정 후에는 배우자의 조부모 중 한 명만이 유대인일 때도 “법이 특정 혼인을 금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와 같은 혼인이 인종적 관점에서 문제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라고 판시해 혼인 금지 범위를 법이 규정한 것보다 더욱 확대했다.
판사가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정부에 동조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판사도 압도적인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판사들은 엘리트 계층의 일원이기에 계급적 이해관계를 위해 권위주의 정부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직업 경력과 승진을 위해 정권에 협조한다 등등 판사들의 행동에 대한 다양한 설명이 있다. 모두 일리가 있지만, 법치주의의 본질을 훼손하는 박해와 억압에 판사들이 가담해온 상황을 온전히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판사는 본질적으로 법의 권위에 복종하는 존재이기에 권위주의 정권이 만든 실정법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라고 이 책은 강조한다.
판사는 법을 적용할 의무가 있다. 법적 추론은 국가가 제공하는 권위 있는 법적 출처, 즉 법원法源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도덕적 또는 정치적 추론과 다르다. 어떤 법이론적 접근방식을 취하든 판사가 그러한 법원法源을 완전히 무시하고 법을 집행할 수는 없다. 즉, 권력이 확고해지고 억압적 조치가 입법화되면 판사로서는 그 억압적 조치를 적어도 일응prima facie 권위 있는 법원法源의 하나로 받아들이게 됨을 의미한다. 그 후에는 법원이 정권의 합법성과 주요 권력 기제 같은 핵심 이익에 거의 도전하지 않는 방향으로 사법부의 역할과 기본적 권력관계가 정리된다.(99쪽)
‘정의를 배반한 판사들’은 어디에나 있다
판사들이 억압에 가담하는 것은 독재 정권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미국과 영국 같은 자유주의 사회에서도 일어난다. 국가안보를 위해서 또는 사회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자유주의 사회의 판사들도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판결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 영국 내무부장관은 영국 방위 규정 18B에 따라 “공공안전이나 국가방어에 해를 끼치는 행위에 최근 관여했거나 또는 그러한 행위를 준비하거나 선동했다고 믿을 만한 합리적 이유가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1,874건의 구금명령을 발부했다. 피구금자 한 명이 법원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상원은 법원이 이를 심사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내무부장관이 구금할 만한 합리적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면 실제로 합리적 이유가 있는지를 심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두고 ‘사실상 행정부에 무제한의 권한을 부여하고 사법심사를 무력화하는 조치’라고 비판한다.
‘명백히 부적합한 사람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한다는 우생학은 가상의 사회적 위협을 이유로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한 대표적 사례다. 지적장애인 캐리 벅에 대한 강제 불임수술이 정당한지를 다룬 재판이 대표적이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없는 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판결로 유명한 미국 대법관 올리버 웬델 홈즈는 “애초에 명백히 부적합한 사람들이 자손을 생산하지 못하도록 막을 방법이 있다면 그것이 세상을 위해 더 낫다. 바보들은 3대로 충분하다”라는 악의적인 이유를 붙여 강제 불임수술을 정당화했다.
이런 사례는 ‘정의를 배반한 판사들’이 나치 독일이나 라틴아메리카의 군사독재 정권처럼 노골적으로 억압적인 나라에만 나타나는 예외적 존재가 아니라 모든 국가와 사회에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보편적 존재임을 보여준다.
판사에 대한 형사처벌과 사법면책의 문제
어떻게 해야 판사들이 정부의 억압에 동조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저자는 불의에 가담한 판사의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를 폭넓게 논의한다. 원론적으로 판사가 재판을 통해 심각한 인권침해를 일으킨 경우 처벌하는 것이 맞지만,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판사에게는 사법적 면책특권이 있다. 판사가 독립적이고 공정하게 법을 적용하려면 결과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판결할 수 있어야 하기에, 대부분의 나라가 판사의 면책특권을 인정한다. 저자는 “법치주의의 근본을 훼손한 혐의를 받는 판사가 그 항변수단으로 사법면책을 이용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255~256쪽)라고 하면서도 판사의 책임을 광범위하게 추궁하면 사법부의 독립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
실제로도 억압에 동조한 판사들을 처벌한 역사적 사례가 별로 없다. “판사들은 거의 예외 없이 지난 정권의 악행과 억압에 가담한 책임을 묻는 법정에 서지 않았다.”(185쪽) 예외적으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나치 독일에 동조한 판사들의 책임을 물었지만, 판사 직무를 수행했다는 이유만으로 형사처벌을 받은 사람은 단 한 명에 불과했다.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대부분 법무부에서 정책 수립과 법 집행에 직접 관여한 이들이었다. 판결과 관련해서는 “판사로서 극도로 잔혹하고 광적인, 그리고 차별적 방식으로 법을 집행한 경우”(186쪽)에만 처벌받았다. 억압적인 실정법을 적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받은 판사는 없었다. 독일 통일 후 동독 판사들을 대상으로 한 재판을 제외하면 독일 법원도 나치 시대에 내린 판결로 판사를 처벌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규정」 등 인권보호를 위한 여러 국제규범이 있지만,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이 책이 다룬 여러 판결 이후에 국제규범의 해석과 적용에 대한 판례가 많이 축적됐고, 이를 돕는 기구도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지만, 국제규범이 실제로 개혁을 촉발한 사례는 드물다. 판사의 형사책임을 좁게 해석하는 판례가 이미 쌓인 상황에서 이를 뛰어넘기 힘들다는 점도 형사처벌을 어렵게 한다.
‘올바른’ 법적 방법론은 없다
특정한 법적 해석방식, 즉 ‘올바른’ 법적 방법론을 선택하면 판사가 억압에 가담하는 일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들에 따르면 판사와 법치주의 혹은 폭정의 관계에서 핵심 변수는 법적 방법론이다. 법의 도덕성이나 올바름을 고려하지 않고 규범의 형식만 갖추면 법으로 간주하는 법실증주의 때문에 나치 독일의 사법제도가 무너졌다는 법학자 구스타프?라드브루흐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저자는 “억압은 다양한 법적 접근방식과 방법론을 통해 정당화될 수 있다”(410쪽)고 반박한다. 사실 나치 독일에서는 법실증주의가 지배적인 법적 방법론이 아니었고, 한스 켈젠 같은 주요 법실증주의자들은 나치에 반대했다. 오히려 법실증주의가 인정하지 않는 법적 원천, 즉 규범의 형식을 갖추지 못한 인종 이데올로기나 독일 민족의 공동선과 목적 등에 맞춰 법률가들이 법령과 법 개념을 해석한 결과 독일 법체제가 무너졌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나치 독일의 판사들은 서로 다른 법적 방법론을 사용했는데도 똑같이 정권의 억압에 동조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 또한 법적 방법론이 핵심 쟁점이 아님을 보여준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남아프리카공화국 판사들은 입법자의 목적과 의도를 중시하는 ‘단순 사실 접근법’을 적용했고, 나치 독일의 판사들은 입법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법령을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방법론을 사용했다. 그 결과, 남아프리카공화국 판사들은 입법자의 인종차별 이념을 최대한 반영하는 방향으로 법을 해석했고, 독일 판사들은 바이마르공화국 시기의 입법의도를 무시하면서 법이 적용되는 시점, 즉 나치 시대의 이념과 요구에 맞게 법을 해석했다.
양심에 따라 정의를 추구한 판사들
불의에 가담한 판사들을 처벌할 수도 없고, 억압에 동조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올바른’ 법적 방법론도 없다면 판사는 그저 무력하게 권력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
많은 판사들이 불의와 타협한 다음, ‘차악 선택의 논리’를 펴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자신이 협력을 거부하면 정부가 더 노골적으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억압을 저지르거나, 더 순응적인 판사가 임명되어 ‘더 나쁜 상황’이 생겼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라드브루흐는 나치 사법부 지도자들에게 내려진 미 군사재판소의 판결을 들면서 이들의 논리가 왜 틀렸는지 분명하게 드러냈다.
악에 가담함으로써 악을 피할 수 있다고 믿지 말라. 이는 이미 충분히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으며, 비겁한 공모에 대한 변명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 악과 연대하면 필연적으로 눈이 멀게 돼 자신이 가담한 악의 본질을 더 이상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374쪽)
실제 역사를 살펴보아도 판사들은 억압적 정권 아래에서도 일정한 자율성을 누리며 저항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형식적이나마 ‘독립적인 사법부’를 통해 합법성과 정당성을 승인받을 필요가 있기에 권위주의 정권이라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판결을 한 판사를 처벌하기는 쉽지 않고, 실제로 그런 일은 거의 없다. 정당성의 외양을 갖추기 위해 권력이 사법부를 필요로 하는 한 사법부와 판사는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다. 가령 나치 독일은 학살과 전쟁범죄, 인종차별로 얼룩진 인류 최악의 정치체제이기에 법 자체가 작동하지 않았고 일개 판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달랐다. 뮌헨대학교 정치학 교수인 카를 뢰벤슈타인은 나치즘 이후 독일법 재건에 관한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직한 판사가 강제수용소에 보내지거나 연금까지 박탈당한 사례는 단 한 건도 보고된 바 없다. …… 일부 판사들이 공개적으로 정권을 비판했더라도 다른 지역으로 전보되거나, 승진에서 배제되는 정도였으며, 경우에 따라 사직당해 연금수령자 신분으로 바뀌는 정도였다. 그보다 더 무거운 제재는 없었다.(76쪽)
나치 독일에서 악법에 저항한 대표적 사례가 안락사 프로그램을 거부한 로타 크라이지히 판사다. 정신질환자들의 후견인으로 활동하던 크라이지히는 자신이 후견한 사람들이 의료기관에 이송된 뒤 살해됐음을 알게 된 뒤, 판사의 사전 승인 없이는 안락사할 수 없다는 공문을 의료기관에 보냈다. 법무부장관이 공문을 철회하라고 지시했지만, 크라이지히는 굴복하지 않았고 끝내 사임했다. 그러나 나치 정권은 그를 더이상 탄압하지 않았고, 크라이지히는 생태농장에서 종교활동에 전념하며 남은 생을 보냈다.
크라이지히처럼 정신질환자를 후견하는 판사가 당시 독일에서 1,400명 이상이었는데 크라이지히만 안락사 프로그램에 항의했다는 일화는, 더 많은 판사가 억압적 정권에 저항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한다.
나치에 점령된 유럽 국가들에서도 판사들이 저항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노르웨이에서는 점령군이 친독 인사를 행정부처 수장으로 임명하는 등 사법체계 개혁을 시도하자, 대법원이 반대하고 나섰다. 제국판무관은 노르웨이 법원이 점령당국의 법률을 심사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는데, 대법관들은 이에 항의하며 모두 사임했다. 이들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똑같이 독일 점령 치하에 있던 벨기에 판사들 또한 처음부터 점령당국에 저항하며, 점령당국이 제정한 법의 적용을 거부했다. “그들은 판사와 변호사직에서 유대인을 축출하는 시도에도 저항했는데, 이것이 이후 벨기에법에 인종 범주와 인종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보인다.”(356쪽) 저자는 이런 저항이 몇몇 사안에서만 있던 예외가 아니며 “벨기에 법원은 전쟁 기간 내내 독일 점령에 맞서 비교적 성공적으로 저항했다”(365쪽)라고 평가한다.
이런 사례들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억압적인 환경에서도 판사와 법원이 양심에 따라 정의를 추구할 수 있는 여지가 있고, 주어진 재량권을 행사해 권력의 억압을 견제하거나 상당 부분 완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판사들의 태도, 판사 개개인이 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자신의 판단이 미칠 영향을 인식하는 일이다. 법률가들은 흔히 사람을 권리나 의무의 당사자, 범죄자, 피고인과 같은 추상적 법적 범주에 맞춰 인식하도록 훈련받는데, 이는 당사자에게 인간적으로 공감하는 대신 고통에 무감각하게 만들고 자신의 판결이 낳을 반인권적 결과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앞서 살펴본 역사적 사례들은 판사들이 자신들의 판결이 당사자에게 줄 인간적 고통과 사회에 일으킬 결과를 제대로 이해하고 재량권을 행사한다면 상황을 크게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사법부를 둘러싼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줄이려면
판사들이 왜 억압에 동조하는지를 심도 있게 분석한 이 책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 여러 시사점을 던진다.
‘법치주의와 인권의 보루여야 한다’는 이상과 현실의 사법부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고, 2024년 12월 3일 이후 시민들은 그 간극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이런 간극이 왜 생겼는지, 어떻게 해야 이 간극을 해소할 수 있을지, 사법부가 법치주의의 수호자로 제 역할을 다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고민하는 우리 모두에게 『정의를 배반한 판사들』은 풍부한 역사적 사례와 치밀한 이론적 분석을 통해 여러 단서와 해답을 제시한다.
이 책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선 판사 스스로가 형식적으로 법률을 적용하는 기계적 전문인이 아니라 도덕적 주체로 서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법률이 정한 추상적 요건과 법이론에만 매몰되어 구체적인 인간적 상황과 판결이 현실에서 가져올 결과를 무시하는 법 기술자”(439쪽)로 남기를 거부해야 한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역자는 공동체 차원에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지켜낼 수 있는 판사를 양성하는 교육, 문화, 윤리와 제도를 고민”(439쪽)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위기가 점점 확산되는 오늘날 주권자인 국민과 헌법의 편에 서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법부를 가지려면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정연순 변호사가 이 책을 번역함으로써 독자들과 우리 사회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이런 어려운 질문을 외면하고 쉽게 떠오르는 해결책에 매몰된다면, 우리는 사법부의 역할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할 때 오히려 불의와 타협해 국민과 정의를 배신하는 법복관료들에게 휘둘리는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439쪽)
작가 소개
지은이 : Hans Petter Graver
목차
한국어판 서문
감사의 말
1장 사법의 역할과 법치주의
들어가는 말 | 책의 구성
1부 법치주의에 대한 전쟁
2장 국가의 억압과 법치주의
법치주의와 사악한 통치자들 | 법치주의에서 폭정으로 | 법의 형태로 자행하는 억압: 진짜 법인가? | 법의 안과 밖
3장 사법부에 대한 억압
권력의 정당성 추구 | 사법부의 독립 | 판사 숙청과 법원 재편 | 법원의 관할권 제한과 특별법원 | 법적 사고체계의 왜곡: 당근과 채찍
4장 억압에 대한 사법부의 수용
권위주의 정권의 합법성 수용 | 억압적 목표와 정책 수용 | 인종을 넘어서 | 자유주의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억압에 대한 동의
5장 저항
“법의 불꽃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 | 합법성의 문제 | 제한적 해석 | 권위주의가 쇠퇴하는 시기의 저항 | 저항과 법적 방법론
2부 불의에 대한 판사들의 책임
6장 형사책임을 둘러싼 논쟁
들어가는 말
7장 국제법에 따른 위법성의 조건
연합국 전범재판소의 법적 근거 | 미 군사재판소의 법조인 재판 |나치 판사들에 대한 무죄판결
8장 불법적 권력과 위법성의 조건
판사와 혁명 | 점령 치하의 판사
9장 전환기 상황에서 위법성의 조건
나치 이후 독일의 재건 | 동독의 판사들
10장 특별법원의 판사들
권위주의 정권과 특별법원 | 미 군사재판소와 특별법원 |나치 이후 특별법원에 대한 견해 | 특별법원 참여가 범죄인가?
11장 사법적 억압의 정당화
범죄의 고의 | 법의 부지 | 강요 | 토론
12장 ‘판사에 대한 특별면책?’
의무와 명령 | 사법면책과 판사의 역할 | 사법부의 독립과 면책 |권력분립
13장 판사에 대한 처벌
변치 않는 정의의 본질 | 판사들은 왜 처벌받지 않는가? |소급처벌의 어려움 | 책임 추궁은 충분했나?
3부 판결의 도덕적 측면
14장 법실증주의 명제
사법부의 공모 이유 | 라드브루흐와 나치 독일
15장 어떤 법실증주의인가?
정의되지 않는 법실증주의 | 법과 도덕을 분리하는 법실증주의 |형식주의인 법실증주의 | 법실증주의의 대안
16장 다른 방식의 법해석
단순 사실 접근법
17장 법이론을 통한 설명을 넘어서
법이론이 사법적 판단을 좌우하는가|심리적 요인|제도적 요인|도덕적 정체성의 함정과 상실
18장 차악 선택의 논리
홀로코스트의 실행 | 법치주의의 예외 | 차악 선택이라는 항변 | 사직이 유일한 대안인가? | 현실적 계산 | ‘미끄러운 경사길’의 오류 피하기
19장 정의를 추구하는 판사들
법 뒤에 숨지 않기 | 헌법 조항으로 권위주의를 막을 수 있는가 | 국제기준 | 법적 방법론의 정치학 | 법치주의를 위한 저항
역자 후기
주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