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2020년 데뷔 햇수로 30년을 맞은 시인 허연의 다섯번째 시집. 1990년대 초입, '권진규의 장례식' 외 일곱 편의 시로 현대시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등장한 허연은 도시생활자 개인의 욕망과 공포를 선명하게 보여주며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알렸다. 1995년 그의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가 나온 뒤 "해설을 쓴 평론가는 죽었고 시를 쓴 시인은 사라졌다"라는 소문이 오래도록 무성했고, 수많은 불온한 청춘들이 이 시집을 필사하며 허연을 앓았다.
그가 13년의 긴 침묵을 깨고 두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로 시단에 돌아온 이후에는, 시인 특유의 젊고 세련된 감각을 유지하며 꾸준한 활동을 이어와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 미터>까지 연이어 화제작을 출간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시를 통해 세계를 감각하고 발견한다. 생활 속에서 어른대는 시, 자연스러운 시들이지만 그의 감각은 여전히 날카로워서 사물의 핵심을 간파해낸다. 한없이 허무로 뻗어온 허연의 시였지만 그 중심은 결국 이 세계의 낮고 비루한 땅 위에 있었다.
더러운 거리와 가난한 사람들, 병듦과 죽음을 한껏 끌어안고 북회귀선으로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는 시인. 그가 이제 더욱 진솔하고 담백한 언어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허연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시집이 가닿을 당신에게 노래 될 시간을 마련하며.
출판사 리뷰
데뷔 30년,
허연은 이제 허연의 이야기를 한다
올해 데뷔 햇수로 30년을 맞은 시인 허연의 다섯번째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1990년대 초입, 「권진규의 장례식」 외 일곱 편의 시로 현대시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등장한 허연은 도시생활자 개인의 욕망과 공포를 선명하게 보여주며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알렸다. 1995년 그의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가 나온 뒤 “해설을 쓴 평론가는 죽었고 시를 쓴 시인은 사라졌다”라는 소문이 오래도록 무성했고, 수많은 불온한 청춘들이 이 시집을 필사하며 허연을 앓았다. 그가 13년의 긴 침묵을 깨고 두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로 시단에 돌아온 이후에는, 시인 특유의 젊고 세련된 감각을 유지하며 꾸준한 활동을 이어와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 미터』까지 연이어 화제작을 출간했다. 이 여정에 대해 시인은 이번 시집 발문을 쓴 시인 박형준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술했다.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는 소주병을 깨서 세상의 옆구리를 한번 찌르는 심정으로, 두번째 『나쁜 소년이 서 있다』는 돌아온 탕자처럼 내가 다시 시로 돌아왔다는 선언, 세번째 『내가 원하는 천사』는 이제 시와 대결하지 않고 시를 끌어안겠다는 화해, 네번째 『오십 미터』는 내가 결국 시 속에서 살았구나 하는 포기였지. 이번 시집은 시는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세상에 그냥 있었던 거구나 하는 인정…… (p. 151)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시를 통해 세계를 감각하고 발견한다. 생활 속에서 어른대는 시, 자연스러운 시들이지만 그의 감각은 여전히 날카로워서 사물의 핵심을 간파해낸다. 한없이 허무로 뻗어온 허연의 시였지만 그 중심은 결국 이 세계의 낮고 비루한 땅 위에 있었다. 더러운 거리와 가난한 사람들, 병듦과 죽음을 한껏 끌어안고 북회귀선으로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는 시인. 그가 이제 더욱 진솔하고 담백한 언어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허연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시집이 가닿을 당신에게 노래 될 시간을 마련하며.
자발적으로 도피에 실패한 니힐리스트
천성이 허무주의자인 허연은 초기 시에서 세상에 대한 복수감을 가감 없이 드러내곤 했다. 괴팍하고 불친절한 칼잡이처럼 ‘세상의 옆구리를 한번 찌르는 심정’으로 썼던 시절, 그의 시는 차마 발 딛을 수 없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희구했다. 미학으로의 강한 열망과 더불어 죽음으로서의 자유를 꿈꿨던 젊은 그의 시 「무반주無伴奏」가 이번 시집에서 같은 제목의 연작으로 등장했지만 전혀 다른 톤으로 풀려나오는 지점에서 그의 변모된 태도를 알아볼 수 있다.
에릭 사티는 사람이었다 에릭 사티는 돈을 벌고 싶어했다 에릭 사티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에릭 사티는 은행엘 가지 않았다 에릭 사티는 죽었다 자유는 죽음처럼 죽음은 자유처럼 에릭 사티는 사막엘 가고 있었다 모래바람으로 가고 있었다
- 「無伴奏」 부분(『불온한 검은 피』, 세계사, 1995)
행복하냐고 물을 때마다
바닥에 침을 뱉는
골 깊은 얼굴들
재개봉관에서 나와
수줍은 밥집에 모여
백반을 먹고
밤이 오면
금이 간 보안등 아래
어깨 없는 아이들이
그림자놀이를 한다
[……]
자정이 되면
다행스럽게
그날의 신神이 태어나고
종주먹을 쥔 아이들은
한 손에 빵을 들고 코피를 닦는다
이곳에서 희망은
목발을 짚고 집으로 돌아온다
- 「무반주」 부분
이제 허연의 세계는 모래바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무감한 일상, 폭력과 어둠 속에서도 매일 신이 태어나 목발 짚은 희망으로 되돌아온다. 이렇게 그의 시가 점차 단단해지고 빛을 더하게 된 이유가 꾸준한 공부와 독서에서 온 자기 확신에서 비롯했다고 시인은 밝히기도 하였다. 그간 고전을 넓고 깊게 탐독하여 이와 관련한 다수의 에세이를 집필해온 허연이기에 독자들에게도 낯선 사실이 아닐 터다. 스승에게 시를 배우지도 않았고 타인의 텍스트를 모사하지도 않았던, 단지 외삼촌의 서가에 꽂힌 영시집들을 읽어가며 작은 파장으로 큰 물결을 만드는 시의 언어에 빠져들어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가했던 허연. 시를 앓고, 시로 성장해온 그가 다섯번째 시집에 이르러 보여주는 자기 세계는 어떤 완성을 향해 부단히 가고 있다.
냉소하고 식었다 해도, 끝내 노래로 기억될 ‘어느 사랑의 역사’
돌진하는 건 재미없는 게임이야. 잘 생각해. 너는 중독되면 안 돼.
중독되면
누가 더 오래 살까? 이런 거 걱정해야 하잖아.
[……]
그러니까 다시는 가슴 덜컹하지 말기.
이별의 종류는 너무나 많으니까. 또 생길 거니까.
너무 많은 길을 가리키고 서 있는 표지판과
너무 많은 방향으로 날아오르는 새들과
너무 많은 바다로 가는 배들과
너무 많은 돌멩이들
사랑해. 그렇지만
불타는 자동차에서는 내리기.
-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부분
세속 도시의 냉소주의자 허연이지만 불타본 자만이 식을 수 있고(「이별은 선한 의식이다」), 날아오른 자만이 떨어질 수 있음(「트램펄린」)을 알고 있기에 이번 시집에서도 사랑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시인으로 우뚝 선다. 매 순간 최대 속도로 달음박질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만, 그래서 불타는 자동차에서는 내려야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나비가 되어줄 사랑을 또다시 해내고야 만다. 가장 충실하게 사랑을 겪어낸 자만이 할 수 있는 그의 이야기는, 읽는 이를 노래로 이끌어 부지불식간 시에 온전히 녹아들도록 한다. 언제나 눈치 보지 않는 솔직한 이야기로 우리를 만나는 허연이 그의 깊은 사랑과 무한한 깨달음으로 당신을 만날 채비를 마쳤다. 장맛비처럼 쏟아질 시인의 노래가 이제 여기에 왔다.
■ 뒤표지 글
비가 자주 내렸다.
창밖 사철나무에는 직박구리가 아침마다 와서 울다 갔고, 기쁨과 슬픔은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바꾸어 앉았다. 멀리서 무개화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신생아처럼 누워 아주 긴 음악을 듣고 있었다.
제외된 자들의 눈부심을 알았다
절창은 제외된 자들의 몫이라 생각했다
트램펄린에 날 던지면서 말한다
“말해줘 가능하다면 내가 세상을 고르고 싶어”
생각이 있으면 말해주리라 믿었지만
트램펄린은 그냥
나를 떨어뜨리고
미워하지도 않으면서 나를 떨어뜨리고
그러면 내 처지도 최선을 다해 떨어지고
세상에서 트램펄린이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아쉽다
날아오르는 몇 초가 달콤했기 때문에
- 「트램펄린」 부분
어린 시절.
큰물이 쓸려 간 아침,
교각 밑에 살던 거지 소녀가 떠내려갔을까 봐
숨도 안 쉬고 달려갔던 교각
마음 졸이며 달려갔던,
그 슬픈 음화가 생각났다.
병에 걸린 걸까.
엉겨붙은 눈꼽에
눈도 제대로 못 뜨는 고양이들이
짝짓기를 한다.
세상에 다시 오지 않을 거니까
적어도 그것만은 알고 있으니까
공룡뼈 같은 교각 아래서
고양이들은 생을 불태운다.
교각 밑을 걷다 보면
모든 것이 이상하게 음화淫?로 바뀐다
녹물이 눈물처럼 흘러내린 교각에는
설익은 유서들이 있고
누군가의 투항이 있고
어린 나이에 생을 마친 친구들과
그을린 맹세들이 있다.
스프레이로 쓴 억지스러운 구호 몇 개가
중년의 날 위협하고
이따금씩 덜컹대는 상판에서는
콘크리트 가루가 축복처럼 쏟아졌다.
트랙처럼 뻗어 있는 한강 다리 밑에 숨겨놓은
그 비밀스러운 음화를 지울 수가 없다.
내가 음화였음을.
- 「교각 음화」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허연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에서 「단행본 도서의 베스트셀러 유발 요인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시 창작에서의 영화이미지 수용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게이오대학교 미디어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저서로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 미터』, 산문집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에서 만난 극한의 허무』 『그리고 한 문장이 남았다』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등이 있다. 2006년과 2008년 한국출판학술상, 2013년 제5회 시작작품상, 2014년 제59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매일경제신문> 문화부 선임기자로 재직하고 있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트램펄린/세상의 액면/어떤 거리/십일월/만원 지하철의 나비/슬픈 버릇/상수동/이장/그해 대설주의보/교각 음화/해변/기억은 나도 모르는 곳에서 바쁘고/구내식당/무반주/새벽 1시/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시월/초봄/빵 가게가 있는 풍경/전철역 삽화/북해/바닷가 풍습/열대
2부
어느 사랑의 역사/24시 해장국/두려운 방/누구도 그가 아니니까/강물에만 눈물이 난다/트랙/애인에게는 비밀로 하겠지만/역전 스타벅스/절창/발인/80년대/경원선 부고/소년 記/당신의 빗살무늬/내 뒷모습/죽은 소나무/눈의 사상/용궁설렁탕/이별의 서/환멸의 도서관/세상의 액면 2/산새/산 31번지
3부
이별은 선한 의식이다/생은 가엾다/흡혈 소년/눈물이란 무엇인가 2/무방비 도시/무반주 4/무반주 3/나일강변/시어들/추억, 진경산수/해협/지옥에 관하여/21세기/침대의 시/상하이 올드 데이즈/시립 화장장/계시/패배/강변 비가/하얀 당신/독/중심에 관해/남겨진 방
발문 이곳에선 모든 미래가 푸른빛으로 행진하길 - 박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