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왜 ‘총보다 강한 실’인가?역사는 강하고 파괴적인 것들이 움직여왔다. 역사는 필연적으로 승리자의 기록이었다. 고고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리적으로 강하고 썩지 않는 것들이 남았다. 실과 직물처럼 잘 썩는 물질들은 역사의 기록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남성이 절대 다수인 고고학자들은 선사시대에 ‘도자기 시대’나 ‘아마 시대’가 아닌 ‘철기시대’와 ‘청동기시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얼마나 폭력적인 발상인가?
하지만 그루지야의 줏주아나 동굴에서 인류 최초의 섬유가 발견되었을 때, 우리는 조상들을 전혀 다르게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돌과 창을 들고 다니는 남성적인 모습이 아니라, 나무나 천처럼 부드러운 물질을 다룰 줄 아는 섬세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 말이다. 철과 청동, 돌은 단지 강하고 오래 보관될 수 있는 물질이었을 뿐, 실제로 우리 삶에서는 과일이나 천 등을 사용하는 것이 주가 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신석기시대의 가락바퀴 같은 유물은 현재의 기술과 비교해도 매우 섬세한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을 통해 역사를 보는 것은 권력과 힘이 만들어낸 역사의 한 장면만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작지만 끈질기게 역사를 움직여온 일상의 역사를 발굴하는 일이다. 역사 속에는 기록되지 않고 유물로도 남지 않은, 하지만 우리의 일상과 더 가까운 삶이 존재했을 것이다. 주류의 역사는 많은 것들을 생략한 채, 힘의 서사만을 남겼다. 바늘의 눈으로 역사를 보면 세계는 완전히 달라진다. 실을 통해 세계를 본다는 것은 실과 직물을 만든 ‘사람들’을 바라보는 작업이다. 남겨진 기록만을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왜 기록을 남기지 못했는지를 알아가는 작업이다.
역사를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책,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의 신작저자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복식사를 전공했고, 18세기 여성 복식사와 무도회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작가다. 그동안 실에 대한 역사는 다뤄진 적 없었다. 있더라도 대부분 옷의 외관과 매력에 대해 서술해왔다. 즉, 그것을 만든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둘러싼 역사나 사회, 문화에 대한 관심보다는 ‘완성품’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총보다 강한 실』은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의 저널리스트적인 집요함과 학자로서의 분석이 더해진 책이다. 인류의 시작부터 함께한 실에 대한 13가지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 숨겨진 역사와 조명되지 않았던 인간의 모습을 찾아낸다.
인류 최초의 실을 찾아낸 줏주아나 동굴의 발견을 시작으로 실을 사용하는 최초의 인류를 탐색하기도 하고, 고대 중국 여류 시인의 한시 속에서 고대 중국의 비단 생산의 비밀을 찾아보기도 한다.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레이스 뜨는 여인>에 등장하는 놀라운 레이스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추적한다. 남극대륙과 에베레스트를 정복하기 위해 도전하는 인간들과 그들이 선택한 특별한 직물들, 우주에 한발 내딛기 위해 우주비행사만큼 고군분투한 우주복 제작자들, 인간 속도의 한계를 넘기 위한 전신 수영복 논란까지.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듯 엮어낸 13가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몰랐던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와 만난다. 그 시간들은 이제껏 우리가 알았던 모습과는 다르다. 동굴 속에서, 안방에서, 공방에서, 공장에서 여성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그 모든 직물은, 우리가 매일 옷을 입듯 당연하지만 소홀했던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실’ 하나로 풀어간 역사의 참모습이 여기 있다.
실과 직물에 대한 신기하고 놀라운 이야기들이 줄줄이 이어진다바이킹족이 해협을 건너 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이전에도 분명 배는 있었는데, 그들이 달랐던 점은 무엇일까? 바로 ‘양모로 만든 돛’이었다. 잘 젖지 않는 양모를 이용한 돛을 가지고 그들은 배를 타고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었다.
중세 잉글랜드 왕국이 유럽 대륙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큰 이유는 양모 때문이라고 해도 놀랍지 않다. 중세 잉글랜드 재정의 엔진과 다름없었던 양모를 통해 잉글랜드의 경제가 움직였다. 양모를 사고팔면서 축적된 부가 없었다면 리처드 왕이 십자군 전쟁에서 중심 역할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는 산업혁명이 철이나 석탄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직물이 변화의 중요한 동력을 제공했다. 18세기 중반 영국에서는 100만 명이 넘는 여성과 아이들이 방적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이 버는 돈은 빈곤층 가구 가계소득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했다.
이처럼 실과 직물은 기술 진보를 이루는 하나의 도구로서, 혹은 산업의 중심으로서, 세계를 움직여왔다. 실이 총보다 강했던 이유다.
인류의 역사는 다시 쓰여야 한다그리스 신화 속 운명의 여신은 실을 뽑아 그 실의 길이를 통해 운명을 점지했다.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는 옷감을 짜면서 시간을 벌며 구혼자들을 물리쳤다. 이렇게 신화와 전설 속에 실과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남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실을 잣고 옷을 만드는 일은 아주 오랫동안 여성들의 일이었다. 직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명의 여성들이 한 장소에 모여 몇 시간에 걸쳐 반복적인 노동을 한다. 그들은 일을 하면서 입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은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었다. 실과 관련된 전설 속에서 타고난 솜씨와 재치를 가진 실 만드는 사람은 항상 여성이었다.
주류의 역사 뒤편에서, 혹은 남성들의 세계 뒤에서 바느질과 실잣기는 여성들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실과 관련된 이야기, 바느질 작품과 옷들은 여성들이 만들어낸 작은 역사들이다. 또 직물과 관련된 기술은 여자들에게 경제적 권력과 지위를 부여하기도 했다. 남자들과 동등한 보수를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절대 빈곤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총보다 강한 실』은 이렇게 구전되어온 이야기 속에서 실과 옷을 만들던 여성들의 삶을 추적한다. 또한 그들이 남긴 직물, 혹은 직물이 만든 산업들을 통해 여성들의 노동과 기록되지 않은 흔적을 찾는다.
역사 속 진짜 주인공을 발견하다미국에서는 도망 노예들을 찾는 팸플릿이 여기저기 붙었다. 눈에 띄는 특징은 그들을 찾을 때 그들의 옷차림을 디테일하게 묘사했다는 점인데, 당시 기록에 남은 도망 노예들의 인상착의를 통해 그들의 삶과 문화를 유추해볼 수 있다. 옷차림 뒤에 숨은 인간의 모습을 유추하는 일은 역사 속 인간의 모습을 찾아내는 일이다.
중세시대에 유럽 왕족들은 펠리칸처럼 부풀어 오른 레이스를 착용하며 누구의 것이 더 큰지를 자랑하듯 경쟁을 했다. 레이스는 실용적인 성격이 전혀 없고, 오로지 장식만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화려한 경쟁의 뒤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 레이스를 만든 사람들을 찾게 된다.
그 멋진 레이스를 만드는 일은 대부분 가난한 여성들이 담당했다. 부유층은 레이스를 위해 막대한 돈을 지불했지만, 그 돈은 가난한 계층에게 가지 않았다. 바느질 노동은 여성에게서 쉽게 얻을 수 있어 그 공급자가 매우 많았고, 비공식적인 가내 공방에서 일하던 레이스 직공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던 탓에 길드라는 하나의 조직이 되기가 어려웠다. 유럽 왕족의 초상화에서 발견되는 사치스러운 레이스 경쟁 때문에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무역 분쟁까지 벌였지만, 그것을 만들어낸 노동자의 빈곤한 생활은 여전했다.
기록된 역사의 외형 혹은 그 의류의 화려함만을 보는 문화사는 이미 많다.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는 그 화려한 레이스는 누가 만들었는가에 주목했고, 우리는 역사의 뒤편에서 당시 사람들의 삶을 움직인 ‘진짜 주인공’들을 만나게 된다.
에베레스트 등반, 우주여행, 전신 수영복,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직물 이야기직물이 없었다면 인류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더 넓은 대륙으로 이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체온의 한계를 가지는 인간은 직물로 스스로를 보호하면서 미지의 대륙, 그리고 더 높은 곳에 가고자 하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20세기 남극대륙과 에베레스트를 오르기 위해 많은 직물이 선택되었다.
우주여행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주복은 인류 역사상 처음 겪는 무중력 상태에서의 신체를 보호하는 직물을 만든다는, 완전히 새로운 도전이었다. 이러한 대단한 도전 뒤에는 의외의 에피소드가 많다. 뜻밖에도 NASA와 우주복을 만들게 된 업체는 여성 속옷을 만들던, 여성 기술자의 개인적인 기술에 의존하던 기업이었다. 2008년 마이클 펠프스가 “수영은 이제 더 이상 수영이 아니다”라고 선언했을 때, 전신 수영복은 인간의 몸으로 속도를 올리는 수영이라는 스포츠에 흠집을 냈다. 스포츠 의류는 어디까지 인간을 개선할 수 있고, 개선해야만 할까?라는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
직물을 만든 사람들, 그들을 추적하는 이 책의 시야는 폭넓고 장대하다. 대단한 인간 승리의 모습보다는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실패하고, 가끔은 웃음거리가 되고, 그럼에도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은 실패들이 진보를 만들어내는, 실이 만들어내는 역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지금 책에서 눈을 떼고 자기 자신을 보라. 옷으로 감싸인 당신의 몸이 보일 것이다.
천과 옷을 생산하는 일은 어느 시대에나 세계 경제와 문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인류는 천을 만들어낸 덕택에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수 있게 됐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선사시대에 온대 지방에서는 옷감 짜는 일에 드는 시간이 도자기 굽는 일과 식량 구하는 일에 소요되는 시간을 합친 것보다 길었다.
머리말 ‘실과 인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