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제1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책과 노니는 집』 『거짓말 학교』에 이은 또 하나의 수작(秀作)
프랑스 뚜르에서 남북 분단의 현실을 마주하다!신인의 패기와 뜨거운 열정으로 일구어나가는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이 어느덧 11회 수상작을 출간하게 되었다. 그동안, 환상계와 현실계의 역동적 서사구조를 짜내고 있는 『소년왕』(7회 수상작), 입양가족의 문제를 우리 시대 가족의 보편적 문제로 제시하고 있는 『내 가슴에 해마가 산다』(8회 수상작), 역사동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책과 노니는 집』(9회 수상작), 우리 동화의 사각지대를 밝혀주는 『거짓말 학교』(10회 수상작)까지 매회 뛰어난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하며, 출간과 동시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지금까지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은 잘 다듬어진 안정적인 길보다 거칠더라도 새로운 길을 선택하며 어린이문학의 깊이와 폭을 넓혀왔다.
이번에 출간한 11회 수상작 『봉주르, 뚜르』 역시 우리 어린이문학에 한 획을 긋기에 충분한 문제작이다. 심사위원들은 “분단이나 통일이라는 말과 무관하게 살아가던 한 소년이 어떻게 우리 사회의 가장 첨예한 모순과 부딪치게 되는가를 섬세하게 보여준” 수작이라며 만장일치로 대상작을 선정했다.
이 작품의 미덕은 단순히 분단 문제를 ‘소재’로 했다는 데 있지 않다. 최고 미덕은 시종일관 어른의 계몽 의지에 함몰되지 않고 현실 아이들의 사고와 시선을 장악한 채 서사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이는 작품의 주요한 코드 중 하나인 ‘우정’의 생성과 헤어짐을 통해 완성된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미덕은 분단 문제를 말하기 위해 우정을 끼워 넣은 것도 아니고, 우정 뒤에 분단이 배경처럼 자리 잡은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봉주와 토시의 우정과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분단은 씨실과 날실처럼 교직되며 켜켜이 서사를 쌓아 간다._「심사평」 중에서
『봉주르, 뚜르』는 프랑스 뚜르를 배경으로 한국인 소년 봉주가 비밀을 추적해가는 이야기다. 봉주는 새로 이사한 집 책상에서 한글로 쓴 ‘사랑하는 나의 조국, 사랑하는 나의 가족’, 그리고 ‘살아야 한다’라는 글자를 찾아낸다. 낯선 이국땅에서 의미심장한 한글 낙서를 발견한 봉주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을 토대로 낙서의 주인공을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비밀에 싸인 소년 토시를 만나고, 더 나아가 우리의 비극적 현실인 분단 문제 속에 놓이게 된다.
분단이란 소재는 자칫 잘못하면 낡고 상투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러한 함정을 피해가며 참신한 구성으로 이야기를 끌고나간다. 여타 분단 동화에서 보이던 ‘통일을 해야 한다’는 당위론적 통일론이 아닌, 지금 우리의 현실을 장악하며 분단 문제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상상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문학적 향취를 담은 한 편의 추리영화를 보는 듯한 장면 전환과 세련된 문체의 힘 역시 이 작품을 빛나게 하는 요소들이다.
열두 살, 프랑스에서 보는 첫 달이 움직였다아빠의 파견 근무로 프랑스에 살던 봉주네는 파리에서 뚜르로 이사를 하게 된다. 프랑스의 여느 집처럼 뚜르의 새집 역시 웬만한 가구와 가재도구가 갖추어져 있다. 봉주네 가족은 그것들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고 이삿짐을 정리한다.
봉주는 2층에 자리한 자신의 방이 마음에 든다. 늦은 밤, 달빛은 영화관의 영사기에서 나오는 빛처럼 길게 방으로 들어온다. 신기하게도 봉주는 프랑스에 사는 몇 년 동안 달을 본 기억이 없다. 뚜르로 이사 온 첫날, 프랑스에서의 첫 달을 보게 된 셈이다. 그런데 달빛이 책상 옆면에 부딪치는 순간, 한글로 쓴 문장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사랑하는 나의 조국,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한 뼘 정도 떨어진 곳에서
‘살아야 한다’를 또 찾아냈다.
나는 우리 가족을 사랑하고, 우리나라를 좋아하지만
한 번도 이런 말을 써 본 적은 없다.
좀 더 신경이 쓰이는 건 ‘살아야 한다’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여기 살았던 사람이 죽는다는 말인가? 아니면 죽었다는 말인가?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_본문 중에서
어느새 달빛은 창문을 넘어서고, 봉주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낙서의 주인공을 찾아 나선 순간, 비밀은 깨지기 시작했다프랑스라는 이국땅에서 의문의 한글 낙서를 발견한 봉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호기심이 깊어진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기에, 봉주의 가슴은 더 두근거린다. 혹시 전에 살던 사람이 한국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집주인 듀랑 할아버지를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봉주네 집에서는 한 번도 한국인이 살았던 적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봉주는 여러 가설을 세워보지만, 비밀의 열쇠는 쉽게 찾을 수가 없다.
한편 봉주는 새로 전학한 뚜르의 학교에 조금씩 적응해나간다. 다행히 뚜르의 아이들은 봉주에게 친절히 대한다. 그런데 딱 한 사람, 토시와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겉도는 불편한 일이 이어진다. 토시가 일본인이라서 그런 걸까? 봉주는 토시가 자꾸 신경 쓰인다. 그러던 중 한글 낙서의 주인공과 토시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아랍 아저씨의 말처럼 내가 토시에게 어떤 피해를 주기라도 한 걸까.
토시에게 내가 한국어로 말한 것이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픈 일이었을까.
토시는 정말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걸까.
달리는 동안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_본문 중에서
우리 동화의 시공간을 확장시킨 패기 넘치는 작품작가 한윤섭은 10년 전, 프랑스 뚜르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는 뚜르에 살면서 루아르 강가를 산책했고, 플뤼므로 광장에서 하늘을 보았고, 집주인 듀랑 할아버지를 만났고, 식당을 하는 아랍인을 만났다고 한다. 그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는 사람들과 순간들이 이 작품의 모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뚜르의 일들은 어제와 같이 느껴집니다.
그 뚜르의 이야기를 다시 꺼낼 수 있어 너무도 다행입니다.
저는 이제껏 연극이나 뮤지컬처럼, 공연을 목적으로 한 글들을 써왔습니다.
동화를 쓰겠다고 마음먹은 건 제 아이가 태어난 후입니다.
그 계기가 뚜르의 기억과 만난 것입니다._「책머리에」 중에서
작가는 봉주라는 열두 살 소년의 눈을 통해, 남북 분단 체제는 그저 과거의 아픈 이야기만이 아닌 언제 어디서든 맞닥뜨릴 수 있는 현실의 문제라고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절실한 문제인, 분단 문제를 다루면서 이와 전혀 상관없을 법한 프랑스를 배경으로 끌어온 것 역시 신선한 충격이다. 똘레랑스의 나라 프랑스를 배경 삼아 남북문제를 이야기하고, 여러 프랑스인과 아랍인을 등장시킨 건 작가의 치밀한 구성력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장치는 『봉주르, 뚜르』가 통념과 관습에 갇히지 않고 분단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두 소년, 봉주와 토시는 아슬아슬한 관계 맺기로 서로에게 조심스레 다가선다. 아무 조건과 편견 없이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지금의 현실 앞에서는 그 마음을 쉽사리 내보일 수 없었던 두 소년. 그들의 애처롭고 애틋한 우정이 오래도록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민족 문제를 ‘말하는 것’만으로 의미를 가졌던 시기는 이미 지났다. 이 분단 체제를 공기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세대에게 ‘분단은 악, 통일은 선’이라는 낭만적 접근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제는 우리의 전통적 현실주의 흐름을 불러내어 상상력을 갱신할 필요가 있다. 『봉주르, 뚜르』의 등장은 이런 현실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_「심사평」 중에서
여전히 우리 동화에서는 비슷한 소재와 배경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된다. 기존의 낡은 작법을 깨기 위해 시공간을 확장하는 등 스케일 큰 작품을 선보이는 작가가 절실히 필요할 때다. 그런 점에서 『봉주르, 뚜르』는 우리 동화의 새 지평을 여는, 또한 패기 넘치는 신인작가의 시작을 알리는 매력 있는 작품이다.
동화를 써보려고 한동안 정신없이 정말 많은 동화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웅크리고 앉아 소화가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소화가 되는 동안 펜을 들어 꼼지락거려 보았습니다.
결과가 좋았습니다. 또 써볼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_수상 소감 중에서
‘사랑하는 나의 조국,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한 뼘 정도 떨어진 곳에서
‘살아야 한다’를 또 찾아냈다.
나는 우리 가족을 사랑하고, 우리나라를 좋아하지만
한 번도 이런 말을 써 본 적은 없다.
좀 더 신경이 쓰이는 건 ‘살아야 한다’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여기 살았던 사람이 죽는다는 말인가? 아니면 죽었다는 말인가?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_ 본문 중에서
아랍 아저씨의 말처럼 내가 토시에게 어떤 피해를 주기라도 한 걸까.
토시에게 내가 한국어로 말한 것이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픈 일이었을까.
토시는 정말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걸까.
달리는 동안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_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