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사계절 1318문고 시리즈 63권. 6·25 전쟁 직후 수복상황에서 성장해가는 소녀의 이야기로, 수복지구 강원도 양양 출신인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수시로 바뀌는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하게 자연과 더불어, 이웃과 더불어 궁핍하지만 소박하고 평화롭기까지 한 삶을 살았던, 여섯 살 소녀 순이와 그 가족들에게 초점을 맞춰 아름다운 감성을 선사한다.
남북분단 직후 북한 지역이었다가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 편입된 수복지구 강원도 땅 양양. 한 마을 사람끼리도 어제는 적군이 됐다 오늘은 아군이 되었다 하며 하루아침에 생과 사의 갈림길이 나뉘는 대치 상황에 놓인 특수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출판사 리뷰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내놓는 수복지구 강원도 양양 출신 소설가 이경자의 성장소설
전쟁의 상처로 반세기가 넘도록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아 있는 우리나라는 여전히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젊은 세대라 할지라도 천안함 사태 같은 시시때때로 불거지는 전쟁 공포에 술렁이곤 한다. 2010년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 되는 해로, 6·25 관련한 영화며 드라마, 전시회 등이 줄을 이어 소개되고 있다.
중견소설가 이경자의 장편소설 『순이』도 그 대열에 합류하는 작품이다. 『절반의 실패』『사랑과 상처』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성주의 작가 이경자는 수복지구 강원도 양양 출신으로,『순이』는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고부갈등, 남편의 외도와 폭력, 이혼 등 당시 사회에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던 주제를 당당하게 풀어놓은『절반의 실패』(1988)로 페미니즘 작가로 불리며 큰 반향을 일으킨 작가는 이후 독립적 인격체로서 여성의 근원성을 깊이있게 성찰하는 작품들을 선보여왔다. 그런 그가 처음 발표하는 청소년소설『순이』는 6·25 전쟁 직후 수복상황에서 성장해가는 소녀의 이야기다. 남북분단 직후 북한 지역이었다가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 편입된 수복지구 강원도 땅 양양. 한 마을 사람끼리도 어제는 적군이 됐다 오늘은 아군이 되었다 하며 하루아침에 생과 사의 갈림길이 나뉘는 대치 상황에 놓인 특수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그렇다고 전쟁의 참혹상이나 전투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이 소설은 수시로 바뀌는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하게 자연과 더불어, 이웃과 더불어 궁핍하지만 소박하고 평화롭기까지 한 삶을 살았던, 여섯 살 소녀 순이와 그 가족들에게 초점을 맞춰 한없이 그립고 아름다운 감성을 선사한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아이는 자란다
순이는 남동생 철이처럼 “고거 하나” 안 달고 나왔다는 이유로 늘 어머니한테 괄시받고 차별받는 여섯 살 소녀다. “군복을 입진 않았어도 군인”인 아버지 덕에 순이 어머니는 장거리에 옷수선집을 내고 군복 수선을 하게 되고, 순이 할머니는 군인 숙사로 쓰는 마을 사무소에서 군인들 아침밥을 해주게 된다. 순이 할머니는 허방을 디딘 사람처럼 밖으로만 떠도는 큰아들과 인민군과 군인으로 나뉘어 불려간 뒤 소식을 모르는 아들들, 점잖지만 걸핏하면 할머니를 무시하는 할아버지와 돈을 번답시고 자신을 업신여기는 며느리 탓에 외롭기만 하다. 이런 할머니에게 손녀딸 순이는 유일한 말동무이자 살가운 피붙이다.
자신에게 쌀쌀맞은 어머니와 폭력을 휘두르는 무서운 아버지 탓에 순이에게도 유일한 가족이자 피붙이로 다가오는 사람은 할머니뿐이다.
작품은 큰 사건이나 급박한 상황 없이 계절이 흐르는 대로 자연스레 전개된다. 순이의 단짝 친구는 영이인데, 한국 말을 잘 못하는 미국 신부를 대신해 성당 일을 돌보는 아버지 덕에 성당 관사에 산다. 순이는 영이를 만나러 성당을 오가며 할머니들이 요리문답하는 내용을 외고, 이국적인 외모의 신부님을 동경하며, 미국 구호물자로 나오는 껌이나 크레용 같은 것들을 부러워하며 미국과 천당에 대한 무한한 경외감을 키워나간다. 종이 인형과 크레용을 갖고 한껏 젠체하는 영이와 그것이 부럽기만 한 순이의 대화는 당시 사람들의 미국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느끼게 해준다.
“이런 건 어디서 났너?”
순이가 수줍게 물었다.
“미국에서 왔어.”
영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순이가 영이를 쳐다보았다.
“미국이…… 어딘지 아너?”
순이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순간 영이가 피이, 입안에서 퍼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미국은 천당이야!”
“천당?”
순이가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영이는 모른 척 대답하지 않았다.
“거가 어딘 줄 아너?”
순이가 다시 물었다.
“닌 까맣게 몰러.”
영이는 눈을 반짝이며 자기를 쳐다보는 순이에게 어른처럼 말했다. 순이는 조바심을 치며 영이가 다음 말을 해주길 기다렸다. 눈길이 간절했다.
“땅을 자꾸자꾸 파문 기와집이 나와. 거기가 미국이야.”(31쪽)
지금은 미국에 대해 이렇게 느낄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미국과 미제에 대한 동경은 전쟁 직후 빠른 속도로 사람들 가슴속에 자리잡아갔다. 작가는 6.25전쟁 직후 한국 사회가 본격적인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 크게 개입한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를 통해 전파된 기독교사상과 서구문명이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변모시키는지 작품 곳곳에서 자연스레 보여준다. 구호물자와 수복지구의 개발 덕분으로 “돈 세상이 왔기 때문에 돈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51쪽)다는 새로운 현실을 영리하게 알아차린 사람은 바로 순이 어머니다. 순이 어머니는 군복 수선을 하며 번 돈으로 살림을 하고, 논밭을 사고, 제수 용품을 마련하는 등 자신이 집안의 실제적 가장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시댁 어른들이나 친척들이 “오래된 풍속이나 가정의 모양새가 틀어질 수 있다고” 여기며 그닥 탐탁지 않아하는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순이 아버지는 “여자는 사흘도리루 개 패듯 패는 게 법”이라 여기는 사람으로, 순이 어머니에게 수시로 폭력을 행사한다.
추석 대목 장날이면 사람들이 흥청거리면서 사람 냄새가 나기 시작하며 마을이 전쟁의 폐허를 딛고 활기를 찾는 것처럼, 순이네 집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간다. 자꾸만 밖으로 도는 순이 아버지와 그럴수록 기를 쓰고 악착같이 돈을 벌려는 순이 어머니를 보며 순이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다시 설악산 깊은 골로 들어간다. 자기네가 떠나야 며느리가 집으로 들어와 살림을 꾸릴 것이고, 아들도 가장으로서 살 궁리를 차릴 것이라 생각해서다.
설이 지나고 정월대보름이 다가오면서 할머니는 옴팡 정이 든 순이를 떠나 “사람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산골로 들어갈 생각에 아쉬운 맘만 가득하다. 또 늘 자신을 업신여기는 며느리와도 잔정이 들어 남편한테 짓눌린다는 공통점을 공유하면서 둘은 여자로서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순이는 할머니가 산으로 들어가버리고 아버지 어머니 철이와 한집에 살아야 하는 새 생활이 싫기만 하다. 봄이 되어 학교에 입학한 순이는 ‘글자’라는 새 세상에 눈을 뜨게 되는데…….
여섯 살 순이의 눈에 비친 전쟁의 흔적-미국과 천당, 빨갱이
『순이』는 어린 시절 “왜정”(일제시대)을 겪고 젊어서는 “인공”(해방 이후 한국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그리고 나이 들어 “난리”(한국전쟁)까지 몸소 겪어 낸 순이 할머니와 순이 어머니, 순이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여성 이야기이다. 작가는 이들을 통해 고부 관계, 모녀 관계, 더 나아가서는 가족의 소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백인 기병대가 인디언들을 학살하며 인디언 마을을 정복하는 것’에 환호하고, ‘서양 여자들처럼 머리를 볶고’ ‘감자에 고추장 대신 버터를 발라 먹으며’ 미국 문화에 빠르게 경도되어 가는 어머니지만 딸에게 갖는 감정은 여전히 구세대적이다. 여성스럽게 곱게 자랐으면 하는 자신의 바람과 달리 유난히 호기심 많고 사내애처럼 돌아다니는 순이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패악을 부리곤 한다. 자신도 어렸을 때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똑같은 소리를 듣고 자랐다는 걸 기억해내면서도 왜 딸아이한테 그러는지 스스로 이해 못할 때도 있다. 그러는 가운데 순이는 자신도 알지 못한 채 “마음 한구석에 깊은 슬픔의 웅덩이가 하나 더 생”기곤 한다.
학교에 입학해 문자세계를 경험하고 또다른 황홀경에 빠진 순이가 삐라를 찾아 읽으며 글자들을 익히고, 천주교 주보를 읽으며 점점 더 기독교 세계에 대한 환상을 가지는 것으로 끝나는 이 작품은 앞으로 순이가 맞게 될 새로운 파국을 예고한다. ‘아버지 어머니가 아무리 욕하고 때려도 천주님이나 성당이 있으면 겁날 게 없는’ 순이는 “자신이 익힌 문자를 통해 어린 시절 그토록 믿고 경외했던 천국과 미국이 자신을 배반하리라”(277쪽)는 것을 곧 알게 된다는 암시와 함께. 그건 아마도 순이와 같은 또래의 기성세대가 이미 경험한 1970년대의 ‘아메리칸 드림’으로 이어질 것이다.
또 하나 『순이』에서 보여지는 동족상잔의 비극은 분이네에 응축되어 있다. 전쟁 나기 전에 번듯하던 기와집은 분이 아버지가 북으로 올라간 다음 국군이 미군과 함께 다시 치고 올라오면서 동네 사람들이 마구 부순 바람에 사람 냄새라곤 사라진 채다. 더구나 분이는 폭격을 피하다 잃어버렸다 고아원에서 찾아온 상황이었다.
할머니가 시켜 새를 보던 순이는 분이와 놀라는 분이 할머니 말에 자연스레 분이와 친구가 되어 소꿉을 논다. 아무렇지 않게 그 이야기를 전하는 순이에게 할머니는 분이와 놀지 말라고 무섭게 말한다. 하지만 순이로서는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할머이, 분이가 나쁘너?”
할머니는 시루에 물을 퍼 주던 쪽박을 시루 밑 다리에 얹고 잠깐 생각하더니 순이를 바라보았다.
“분이는 어래서 죄가 없어두 그 집 아부지가 빨갱이래서 놀문 안 돼!”
“할머니유, 빨갱이가 나쁘너?”
“그럼 나쁘구말구!”
“증말루?”
“니는 할미가 나쁘다문 나쁜 줄이나 알구 있어!”
“왜서?”(177쪽)
단지 분이 아버지가 빨갱이라서 놀지 말라고는 하지만 할머니 역시 그것이 “하얘졌다가 빨개졌다가를 손바닥 뒤집듯이”(180쪽) 하는 세상 탓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순이 할아버지가 이 모든 상황이 “이승만과 김일성이 없고, 미국과 소련이 없고, 삼팔선이 없고 전쟁이 없고 휴전선이 없다면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일”(231쪽)이라는 것을 알고 있듯이 말이다.
분이 아버지가 간첩으로 넘어왔다는 소문이 돌아도 그건 어른들의 일일뿐 아이들은 그것이 뭔지 알지도 못한다. 순이가 우연히 분이네 집 마당에서 꽈리를 따다가 문틈으로 보게 된 “이상한 눈동자, 털이 부숭부숭하던 얼굴”(245쪽)에 대해 장난처럼 말한 것도 실제 큰일이 되어 나타난다. 누군가 간첩으로 신고해 분이 아버지가 잡혀가고, 숨겨 줬다는 이유로 분이 어머니와 할머니도 함께 잡혀가고, 분이는 결국 다시 고아원으로 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순이는 이 소문 역시 듣지 못한다. 아이들에겐 전쟁이 주는 공포나 불안, 위협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오히려 순이에겐 아버지가 휘두르는 폭력, 어머니의 차별이 더 큰 공포와 위협으로 다가올 뿐.
생생한 추억과 그리움이 묻어나는 소설
1948년 양양에서 태어난 작가 이경자는 1953년 휴전이 되고 양양이 다시 남한 땅이 될 때 ‘순이’처럼 여섯 살 소녀였다. 물론 소설은 허구라 사실과 다르지만 작품을 통해 접하게 되는 마을 분위기는 그 시절 지역민의 귀한 증언이기도 하다.
『순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전쟁이 낙인 찍은 공포와 불안, 불신을 이겨내는 힘은 사람들 간의 정이다. 궁핍과 빈곤 속에서도 누가 죽으면 온동네 사람들이 힘을 모으고, 제사 음식을 여러 집과 돌려먹던 시절, 보잘것없는 사금파리로 그릇을 만들어 소꿉살림을 살고, 씹다 버린 껌조차 벽에 붙여가며 아껴먹고, 누룽지를 간식처럼 입에 달고 다니면서도 행복해하던 소녀들이 자라 우리 모두의 어머니, 할머니가 되었다. 『순이』는 작가가 그런 “세상 모든 ‘순이’에게 사랑과 눈물의 인사를 보”내며, “그리움과 존중과 사랑을 담아” 쓴 작품이다. “마숩너?” “좋너?” 하는 낯설지만 묘한 끌림이 있는 강원도 사투리가 물씬 풍기는 대사들을 읽다 보면, 소설가 공선옥의 말처럼 “순이, 영이, 분이, 철이, 강원도 아이들, 강원도 양양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쓰는 말, 강원도 양양 말이 사금파리처럼 내 가슴에 와서 박힌다.”청소년들의 좁은 현실을 다루는 작품들이 경쟁하듯 쏟아지는 요즘, 한 발 떨어진 우리의 옛 모습이 작가의 입담에 실려 생생하게 그려진『순이』는 독자들에게 책읽기의 또다른 맛을 선사할 것이다. 마치 소설가 심윤경이 『순이』를 읽고 그랬던 것처럼 “내가 살지도 않았던 시절, 내가 속하지도 않았던 사회에 대해 추억과 그리움을 간직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사계절1318문고 63번으로 나온 이 책은 양장본으로도 출간되었다.
작가 소개
저자 : 이경자
197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여성주의 관점으로 쓰인 연작소설 『절반의 실패』로 알려짐.출간한 책으로 남존여비를 근현대사의 격랑에 넣어 그린 장편소설 『사랑과 상처』, 여성성의 왜곡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 장편소설 『그 매듭은 누가 풀까』, 무속 신앙의 신탁자가 되기 위한 의례인 내림굿을 소설로 풀어 쓴 장편소설 『계화』, 수복 지구 양양의 지정학적 고통과 슬픔을 여섯 살 아이의 시선으로 쓴 장편소설 『순이』, 탈북자 여성을 통해 현대사의 질곡을 그린 장편소설 『세 번째 집』, 중단편집 『건너편 섬』 등이 있음. 이 밖에 대표적 산문집으로 『딸아, 너는 절반의 실패도 하지 마라』 등이 있으며, 중국 모계 사회를 곁눈질한 문화 체험기 『이경자, 모계 사회를 찾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