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0.4초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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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재현하는 기호였던 3만년 미술의 역사를
깡그리 뒤엎어버린 현대 미술의 혁명
재현을 거부하는 기호로서 현대 미술이 펼쳐낸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포스트모더니즘의 미학적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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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벽화부터 신고전주의까지 미술의 전 역사를 부정한 ‘순수 미술’,
순수 미술을 다시 부정한 ‘반예술’,
순수 미술의 탄생과 죽음으로 현대 미술 전체를 꿰뚫은 역작!현대 미술은 미술의 ‘상식’을 거스르기 때문에 어렵다. 세계의 모습을 아름답게 보여주기는커녕 도통 알아볼 수 없는 이미지를 만들거나, 뭔가를 보여주더라도 형편없게 또는 제멋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상식에 반하는 현대 미술을 설명해준다며 나서는 미학적 개념들은 더 어렵다.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 미술을 이해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개념이지만, 그 각각이 난해할 뿐 아니라 서로의 관계는 더 난해하여, 안내자가 되기보다 진입 장벽이 되기 십상이다.
『현대미술 강의』는 미술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기호’라는 가장 근본적인 사실에서 출발하여 이 난관을 돌파한다. 저자는 미술의 역사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대 이전의 시기에 언제나 세계를 ‘재현하는 기호’였던 미술이 더 이상 이런 기호이기를 거부했던 때를 현대 미술의 시발점으로 잡는다. 재현을 거부한다는 것은 현대 이전에 미술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현하는 기호로부터 재현을 거부하는 기호로의 이동은 현대의 전과 후를 가르는 미술사 전체의 기호학적 전환이다. 다음으로, 현대 미술사 내부의 기호학적 전환은 현대 미술의 독보적 성취인 순수 미술을 중심축으로 해서 제시한다. 낭만주의가 고전주의에 맞서면서 시작된 재현의 거부는 한 세기가 넘는 점진적 노력의 경주 끝에 세계를 미술에서 완전히 밀어낸 순수한 기호를 창조하는 데 성공한다. 이것이 바로 모더니즘이다. 그러나 순수 미술의 승리는 미술과 세계의 단절을 초래했으니, 여기서 생겨난 것이 반예술의 기치 아래 미술과 세계의 새로운 접속을 시도한 아방가르드다. 모더니즘의 순수한 기호는 완결되어 있다. 즉 기표(작품)와 기의(작가의 창조성)가 단단히 결합되어 있고, 이런 상태로 별천지, 즉 삶의 일상적 세계를 초월해 있는 순수한 예술의 세계에 존재한다. 아방가르드는 이런 미술의 위치를 다시 삶의 세계로 옮기려는 것인데, 그러려면 먼저 순수한 기호가 해체되어야 한다. 구성 대신 구축, 제작 대신 레디메이드, 완결성 대신 파편화 등 아방가르드는 순수한 기호를 분해하기 위한 다양한 전략을 발전시켰으나, 1960년대까지도 모더니즘을 무너뜨리지 못하다가, 마침내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순수한 기호의 완전한 분해에 성공한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순수 미술은 여지없이 파괴되고, 미술은 과정과 신체와 장소의 담론으로, 또 개념과 제도와 차용의 담론으로 정신없이 흩어졌다. 재현을 거부하는 기호가 순수한 기호로 완성되었다가 각종 담론의 기호로 해체된 것을 한 세기 반에 달하는 현대 미술의 행로로 제시한 다음 저자는 묻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뤄낸 기호의 해체가 진정한 성공인가? 안타깝게도 절반의 성공만을 인정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게 저자의 답이다. 반예술의 궁극적 요점은 순수한 기호의 해체 자체가 아니라, 그 해체를 통한 미술과 세계의 새로운 접속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순수 미술의 무덤 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춘 해방의 춤은 성급한 것이었고, 기호의 껍데기, 즉 기표만 가지고 노는 물신 숭배의 막장으로 현대 미술은 끝나고 만다. 그러니, 현대 미술이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미술과 세계의 접속은 오늘날의 미술이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다.
이 책은 스탕달의 낭만주의 이론, 샤를 보들레르부터 클레멘트 그린버그에 이르는 모더니즘 이론, 페터 뷔르거부터 핼 포스터로 이어지는 아방가르드 이론, 그리고 프레더릭 제임슨, 로절린드 크라우스, 크레이그 오웬스 등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따로 또 같이 조명하여 현대 미술의 미학적 기원과 전개의 구조가 선명하고 입체적으로 드러나게 했다. 이 책은 미술 이론을 익히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매우 충실하고 유익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미술의 주역은 또한 미술작품이며 미술가가 아니겠는가? 현대 미술의 전개가 유례없이 급진적이었던 만큼 이를 다룬 미술 이론들 또한 사고의 획기적 도약을 요한다. 이 쉽지 않은 독서의 여정 사이사이 안내판이 되어 혼란의 안개를 걷어낼 수 있도록 대표적인 미술가들의 활동과 그들의 역작도 함께 풍부하게 수록했다.
순수 미술, 미술이라는 기호를 뒤흔들다모더니즘, 아방가르드,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 미술을 호령한 세 가지 혁명적 움직임이다.『현대미술 강의』는 그 부제처럼 현대 미술의 이 찬란한 세 줄기를 ‘순수 미술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하나의 흐름 안에서 엮어낸다. 이러한 시도는 도전적이다. 순수 미술, 즉 모더니즘은 종종 아방가르드와 적대적인 것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사후의 것으로 논의돼왔다.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는 ‘모더니즘’을 현대 미술의 주역으로, 또 현대 미술사의 세 혁명적 움직임을 아우를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데, 이는 순수 미술이 모든 미적 혁명의 원천이며 시원인 데 있다. 순수 미술이 바꾼 것은 단순히 그림의 소재, 붓질의 방식, 선의 형태에 그치지 않는다. 순수 미술은 미술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문제 삼아 미술 혹은 그림이라는 기호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순수 미술은 그로 인해 미술의 판도를 그야말로 전복시킨 미학적 반란이자 미술사의 빅뱅이며 현대 미술의 시발점이 되었다. 저자는 이후 ‘순수 미술’이 일으킨 이 빅뱅의 자장 안에서 활동한 모든 미술을 현대 미술이라고 칭한다.
그렇다면 순수 미술이 뒤흔든 미술이란 어떤 것이었는가? 시기상으로는 낭만주의 태동 이전의 미술(흔히는 ‘고전 미술’) 그리고 더 정확히 정의하면 시기에 관계없이 세상의 재현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미술이 순수 미술의 공격 대상이다.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선사시대 사람들이 동굴 벽에 동물을 그린 데서 시작된 이 재현의 전통은, 오늘날 비록 사진이 더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다 하나 여전히 현대 회화나 조각 속에 면면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앙드레 바쟁은 인간이 “존재의 육체적 외형을 고정시[켜]…… 존재를 시간의 물결에서 건져내고, 그리하여 영생의 언덕에 살게” 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다고 썼는데, 이 통찰이 설득력을 지니는 것은 물론이고 그 욕구가 매우 강렬했음은 분명하다. 사실상 3만 년 그림의 역사란 순수 미술의 맹아가 나타났던 19세기 중엽 이전까지는 줄곧 세계를 재현하고자 노력한 역사였고, 명암이며 원근법이며 하는 각종 기법은 2차원의 평면에 입체적인 3차원의 세계를 최대한 손실 없이 옮겨오기 위해 발달했다.
순수 미술은 이처럼 세상을 지시하고 세상과 자신을 일치시키기 위해 애쓰던 미술이 그 자신을 직시하도록 했는데, 여기서 모든 미학적 혁명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그 자신’이란 구체적 물질인 미술이며, 회화를 기준으로 했을 때 2차원 사각의 평면에 물감 등의 재료를 덧발라 이루어지는 미술이다. 순수 미술 이전에는 세계를 재현하고자 하는 목적 때문에 미술이 그 자체로 갖는 특성, 그 평면성과 물질성 등이 억눌리고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면(앞서 언급한 ‘원근법’ ‘명암’ 등이 그 예다), 순수 미술은 이 특성을 인지하고 부각하는 데서 시작해 종국에는 그 특성만으로 미를 창출하고자 시도했다. 물론 이 혁명은 점층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최초의 시도에서부터 세계의 재현을 아예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네의 <올랭피아>나 모네의 <인상, 일출>은 당시에 그 전복적 성격으로 격렬한 반발을 샀으며 숱한 조롱의 대상이 되었으나 현대의 시각으로는 그다지 전복적이지 않다. 미술을 세계로부터 건져올리기 위한 움직임은 계속되어, <올랭피아> 이후 모네의 인상주의, 마티스의 야수주의, 피카소의 입체주의를 거쳐 몬드리안에 이르러서는 세계가 아예 화면 밖으로 밀려나고 ‘순수’하게 선과 색(면)으로 구성된 미가 창출되었다.
저자는 순수 미술의 이 혁명적 전환을 언어학의 ‘기호학적 전환’과 겹쳐본다. 저자가 말하는 이 기호학적 전환은 20세기 초 소쉬르가 제시한 구조주의 언어학과 이후 20세기 중엽 데리다가 주창한 포스트구조주의 언어학까지를 포괄하는데, 순수 미술이 일으킨 미학적 전환은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과 함께 놓인다. 그는 기표인 언어, 그리고 지시 대상인 세계 사이의 불투명성과 그 관계의 자의성에 주목해 언어와 세계 내 지시 대상 간의 연결 고리를 끊었다. 소쉬르의 주장에 따르면 기표의 의미는 그것의 지시 대상이 아니라 다른 기표와의 차이, 기표 간 구조에 의지한다. 언어는 그것이 본디 가리킨다고 믿어지던 대상, 즉 세계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이며, 언어 체계는 그 자체로 자율성을 얻는다. 이것은 미술이 고전적인 재현을 거부하고 순수 미술로 확립되어간 과정과 흡사하다. 언어라는 기표가 세계라는 기의와의 일대일 대응관계를 부정하고 자율적 체계를 구축했듯이 미술이라는 기표가 세계라는 기의를 끊어낸 후 그 근본 요소(선, 색, 면 등)만으로 구성된 자율적 미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방가르드, 다시 캔버스를 찢고 세상으로 나오다순수 미술에서 미술의 자율성이란 세계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면에서는 해방이었지만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안에서만 맴돈다는 점에서는 구속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20세기 초 순수 미술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현대 미술로서 고전 미술에 대항해 스스로를 혁신해오던 순수 미술은 비판적 의미를 잃고 오히려 그 자신이 새로운 권위가 되었다. 아방가르드는 이때 등장했는데, 세계와는 금을 긋고 캔버스 안에 갇혀버린 미술을 비판하고 이것을 다시 세계 밖으로 꺼내려고 시도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전 미술로 되돌아간 것은 아니며 그럴 수도 없었다. 아방가르드는 미술을 둘러싼 제도의 쟁점을 미술 내에 도입해 미술과 세계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미술을 순수한 기호에서 담론적 기호로 변화시키고자 했다.
가장 선명하고도 유명한 예는 뒤샹의 레디메이드일 것이다. 그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공산품을 그대로 미술작품으로 내놓았는데, 이를 통해서 기존의 미술품 생산 방식을 전복하는 것은 물론 미술작품을 둘러싼 유통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미술을 미술품으로 만드는 것이 미술의 고유성이나 자율성이 아닌 미술품을 둘러싼 유통망이며, 미술품도 미술 시장에서 거래될 뿐 사실 자본주의 시장의 상품과 다를 바 없다는 것 말이다. 아방가르드의 제도 비판적 성격은 전후 미국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이때도 비판 대상은 미술을 둘러싼 유통 제도였으나, 뒤샹의 레디메이드에서처럼 단순히 이를 가시화하는 것을 넘어 미술작품의 가치를 좌우하는 권력으로서 미술관-화랑 등에 직접적인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를 위해 다니엘 뷔렌은 같은 줄무늬 작품을 길거리 게시판과 미술관에 전시해 무언가를 미술이게끔 하는 미술관의 권력을 보였고, 한스 하케는 전시회 현수막과 해당 전시회를 후원한 회사의 인종차별 정책을 적은 현수막이 당대 아프리카 현실을 보여주는 사진을 가리도록 배치해 미술관과 기업의 결탁을 고발했다. 이외에도 아방가르드에서 순수 미술의 해체는 다각도로 전개되었다. 순수 미술의 주 기반인 시각성을 교란하고(다다), 산업적 제작 방식을 선택하고 관람자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끌어와 작가를 존재론적·의미론적으로 작품으로부터 제거하고자 하였으며(미니멀리즘),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복제해 지시 대상 없는 이미지를 만들어 미술을 재현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키고자 했다(팝). 그 외에도 순수 미술의 거의 모든 미학적 전제가 아방가르드의 대상이었으니, 아방가르드의 시도는 매우 다종다양했다.
이 모든 해체·전환 작업을 ‘반예술’의 시도로 통칭할 수 있을 텐데 여기서 ‘예술’은 물론 순수 미술이다. 아방가르드는 순수 미술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그에 대한 사후 반응이기는 하나, 아방가르드는 단순히 순수 미술에 따르는 결과라기보다는 엄연히 현대 미술의 한 축이었다. 이를 증거하는 사실로 20세기 초 유럽의 전전 아방가르드는 냉전의 정치학 속에서 미국 제도의 비호를 받았던 후기 모더니즘(잭슨 폴록이 이 시기의 대표적 화가다)에게 억압되었지만 20세기 중엽 전후 미국 아방가르드는 제도의 예술로, 미술관의 예술로 공고히 자리 잡은 이 후기 모더니즘을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듯 아방가르드는 순수 미술과 교차하고 상호 작용하는 움직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방가르드가 순수 미술과의 대결을 통해 해체한 미술의 기호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흘러들어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 미술의 계승자인가 반역자인가포스트모더니즘을 해석하는 문제는 사실 난해한 것을 넘어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한다. 모더니즘에 관해서도 합치된 이론이 없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이해에 불가분하게 엮여 있기 때문이다. 저자도 포스트모더니즘을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으며 다만 현대 미술의 마지막 장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자리 잡는 것이 합당한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아방가르드가 순수 미술에 반발하며 그 반발, 즉 ‘반예술’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으면서 현대 미술의 한 축으로 기능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아방가르드의 이 ‘반예술’ 시도가 성공한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반예술’의 기치를 내건 아방가르드는 예술, 즉 순수 미술을 전제로 했기에 이것이 허물어진 순간 아방가르드 또한 성립될 수 없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렇듯 순수 미술과 아방가르드가 치열한 대립을 끝내고 소멸한 순간 다음 타자로 등장했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순수 미술 혹은 아방가르드의 완전한 소멸 이후 맨바닥에서 쌓아올려졌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순수 미술, 아방가르드와 완전히 단절된 것이라는 데 반대하며 순수 미술과의 대립에서 승리를 거둔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연속성에 주목한다. 아방가르드는 순수한 기호에 맞서 매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작가를 작품에서 삭제하며, 미술 내부의 세계와 일상세계를 넘나들었다. 그 결과로 미술은 다시 한번 기호학적 전환을 맞았으며 그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아방가르드에 의해 해체되고 파편화된 의미가 폭발했으며, 이 폭발의 결과로 어느 때보다 더 독특하고 기상천외한 미술 형태가 출현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은 광활한 대지에 2000여 개의 기둥을 박고 천을 연결해 약 40킬로미터의 담을 만든 후 2주 후에 철거하는가 하면, 자동차에 스스로 못 박히기도 하고, 회화고 이미지고 없이 짤막한 텍스트만을 인쇄한 소책자를 미술작품으로 전시하기도 했다. 대지 미술, 신체 미술, 개념 미술, 과정 미술, 차용 미술 등이 그 갈래도 각양각색이었는데, 이 책에서는 이를 두 가지로 분류했다. 하나는 모더니즘이 금지했던 매체를 도입하는 미술(과정 미술, 신체 미술, 장소 특정적 미술), 다른 하나는 모더니즘의 미학적 전제를 위반하는 미술(개념 미술, 제도 비판 미술, 차용 미술)이다. 저자는 전자가 미니멀리즘의, 후자가 팝의 계보를 잇는 것으로 보고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연계를 구체화했다.
순수 미술이 전통적 ‘재현’의 기호를 자율적 기호로 이동시킨 것이 언어학에서 구조주의가 일군 전환에 비견할 만했다면, 아방가르드가 시도하고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완성된 기호의 변화는 데리다의 포스트구조주의가 거둔 성취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할 수 있다. 반예술의 미학이 미술의 자기완결적 기호를 해체한 것처럼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발생한 의미의 독점과 고정성을 해체하고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려 했기 때문이다. 미술의 이른바 구조주의적 전환에서 기호는 세계로부터 한 차례 해방되었으나, 그 의미는 작가의 존재, 그것을 둘러싼 유통망이며 관례에 굳게 붙들려 있었다. 포스트구조주의적 전환에서 미술의 기호는 완벽한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진정한 해방이었을까? 기의로부터 떨어져 나온 기표의 끝없는 유영은 어떻게 종결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