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실존 인물 권희정 열사의 삶을 바탕으로, 한 개인의 생애와 1990년대 학생운동의 풍경을 복원한 장편소설이다. ‘열사’라는 이름으로 기억되어 온 권희정을 역사적 표지나 상징적 존재로만 남겨 두지 않고, 한 사람의 딸이자 친구, 선배이자 후배, 학생이자 활동가로서 살아낸 구체적인 시간과 감정을 입체적으로 되살려 낸다. 불교학생회 92학번으로 대학에 들어온 권희정은 학내의 토론과 공부, 집회와 연대, 학원 자주화 투쟁의 현장을 지나며 점차 시대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러나 이 소설이 끝내 붙드는 것은 거창한 구호만이 아니다. 친구에게 밥을 사 주고, 후배를 챙기고, 부모를 걱정시키지 않으려 애쓰고,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수줍어하고, 지친 동료 곁을 묵묵히 지키는 한 청춘의 마음이야말로 이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깊은 결이다.작품은 권희정의 생애를 따라가면서도 단순한 연대기적 재현에 머물지 않는다. 불교적 어휘와 사유를 장의 제목과 구조 속에 촘촘히 배치해, 한 인간의 삶과 죽음, 남겨진 자들의 슬픔과 기억을 보다 넓은 시간의 감각으로 감싼다. 학생운동의 한복판에서 벌어졌던 등록금 투쟁, 교육 재정 확보 요구, 총장실 점거, 단식, 총학생회 선거, 한총련과 학원 자주화 운동 등 1990년대의 구체적 장면들이 생생하게 펼쳐지는 한편, 그 장면들 사이사이에는 엄마 선순의 불안과 사랑, 동료와 후배들의 회한, 친구들의 우정, 가족 안의 갈등과 오해가 섬세하게 겹쳐진다. 시대를 움직이려 했던 뜨거운 의지와 더불어, 그 의지 때문에 흔들릴 수밖에 없던 개인의 내면이 함께 놓이면서 『희정-92학번 권희정입니다』는 한 시대의 기록이자 한 사람의 초상으로 읽힌다.“데모하는 건 아니지? 넌 절대 그런 데 발 들이면 안 된다. 알지?”“제가 가입한 데는 불교학생회예요. 종교 동아리라 데모할 일 없으니까 안심하세요.”선순은 딸을 믿었다. 그렇지만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순은 딸의 눈을 들여다보며 다시 한번 다짐을 두었다.“아빠 아시면 큰일 나. 절대로 데모하는 데는 근처에도 가지 마.”“아휴, 걱정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절대로 데모 같은 건 안 해요.”
희정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믿는다고 했다. 민중의 선한 의지를, 민중이 가진 힘을.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미래에도 민중은 진보하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거라고. 그 길에서 잠시 주춤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했다. 보다 치열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다 진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다 굳건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중의 힘을 못 믿어서 그런 거라고. 인간으로서 나태하고 나약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회의의 순간이 자꾸만 찾아올 거라고 했다. 그런 순간이 올까 봐 무척 두렵다면서 희정은 덧붙였다.“가영아, 만일 내게 그런 순간이 온다면 내 뺨을 세게 때려 줘. 정신이 번쩍 들게.”
옛날 옛날에 권희정이라는 아이가 있었어. 걸음이 무척 빠른 아이였지. 그 아이는 그 빠른 걸음으로 안 가는 곳이 없었어. 당시에는 하루가 모두에게 24시간이었는데, 부처님이 그 아이에게만 특별히 하루를 48시간으로 늘려 주었어. 바빠서가 아니라 착해서. 하루를 48시간으로 늘려 줘도 그 아이는 늘어난 시간을 착한 곳에 쓸 걸 알았기 때문이지. 과연 그 아이는 늘어난 시간을 힘든 사람을 돕는 데 썼어.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사 주고, 혼자 있는 사람에게 말 걸어 주고, 울고 있는 사람에게 가만히 다가가 등을 두드려 주고, 화난 사람의 이야기를 다 들어 주었지. 그러고도 시간이 아직 남아 있으면 편지를 썼어. 자, 숨을 크게 들이마셔 봐. 어때, 꽃향기가 나지? 이건 그 아이가 보낸 편지야. 부처님이 너무 착한 그 아이를 대신해서 너희들에게 부쳐 준 편지야. 너희도 그 아이처럼 착하게 살라고. 그 아이가 누구라고? 그래 권희정. 내 친구야.
작가 소개
지은이 : 박혜지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2013년 제5회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충북작가회의 회원. 소설집 『오합지졸 특공대』, 『사랑, 입니까』, 동화 『아홉 계곡의 보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