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한흑구
190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세광(世光). 산정현교회의 최초 조선인 목사였던 아버지 한승곤(흥사단 의사장 역임)의 1916년 미국 망명으로 일곱 살 때부터 부재한 아버지는 편지로만 존재했다. 숭덕학교와 숭인학교를 졸업했으며, 숭인학교 시절에 문학동인 ‘혜성’을 결성해 주요한, 김동환의 시편을 암송하고 김억의 번역시집을 탐독했다. 1926년 기독교 잡지 《진생》에 시를, 1928년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해 《동아일보》에 소묘 수필 「인력거꾼」을 발표했다. 1929년 2월 아버지가 기다리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흥사단에 입단하고 고학으로 시카고 노스파크대학 영문학과, 필라델피아 템플대학 신문학과를 수학했으며, 방학이나 휴학 기간에는 미주 대륙을 여행했다. 또한 문학 창작에 왕성하여 《신한민보》에 꾸준히 시를 발표해 ‘미주조선인문단’ 형성에도 일역하는 한편, 서울의 《동광》이나 《우라키》에 시, 소설, 평문, 수필, 번역시, 번역소설을 발표했다. 1935년 종합지 《대평양》의 창간 실무를 주도해 주간을 맡았고, 이어서 1937년 문예중심 종합지 《백광》의 창간 실무도 주도해 주간에 버금가는 역할을 맡았다. 1937년 이른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 이광수, 주요한, 아버지(한승곤) 등과 함께 구속돼 고초를 겪은 뒤 평남 강서군 산골 마을로 이주해 손수 과수원을 일구고 농사를 지으며 일제의 갖은 회유와 강요를 물리치고 시 「동면」을 발표하면서 실제로 창작 활동의 ‘동면’에 들어갔다. “단 한 편(片)의 친일문장도 쓰지 않은 영광된 작가”로 해방을 맞았으나 ‘적도(赤都)’로 바뀐 평양에서 살아갈 수 없었다. 1945년 9월 조만식의 주선으로 긴급히 월남해 서울 문단에 합류하고 미군정청 통역관이 되었다. 그해 11월 가족이 무사히 38선을 넘어오게 했다. 해방공간의 서울에서 문인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산문과 서평을 발표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자 ‘분단 해방’의 세속적 명리를 미련 없이 놓아버리고 일가친척 하나 없는 낯선 땅, 오로지 바다와 갈매기와 백사장과 솔숲을 가슴에 담아 포항 영일만 바닷가로 이주했다. 6·25전쟁 중 부산으로 피난했다 포항으로 돌아와 폐허의 도시 재건에 미군의 도움을 끌어오는 일에 앞장섰다. 전후(戰後) 세월에는 주로 수필 창작에 정성을 기울여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문》 《현대문학》 《수필문학》 등 여러 매체에 많은 수필을 발표했다. ‘시적(詩的) 수필’의 명작으로 남은 「보리」도 포항에 살면서 《동아일보》에 처음 발표한 작품이었다. 1979년 11월 자택에서 고요히 눈을 감았다. ‘은둔의 사색가’라는 헌사가 문학의 이름으로 바치는 훈장처럼 추서되었다. 저서로 『미국의 대학제도』(1948), 번역시집 『현대미국시선』(1949), 『세계위인출세비화록』(1952), 수필집 『동해산문』(1971), 수필집 『인생산문』(1974), 수필선집 『보리』(1975) 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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