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이성계는 강력한 리더십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건국자가 될 수 있었다. 그 리더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첫째 이성계의 리더십은 결단력이다. 위화도 회군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리더가 아니면 결심하기 어려운 사안이었다. 당시 우군도통사였던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보다 나이도 어리고 직급으로도 밀리는 입장이었지만, 그는 주도적으로 나서서 위화도 회군을 결정하는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결국 조민수도 한발 늦게 이성계의 뒤를 따라 회군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둘째 이성계의 리더십은 성취력이다. 이성계는 홍건적이나 왜구를 소탕할 때 백전백승하는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신궁수’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활쏘기 등의 무술에 뛰어났지만,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실천으로 옮긴 점이 리더로서 더욱 돋보인다.
셋째 이성계의 리더십은 신뢰심이다. 한나라 유방의 책사가 장자방이듯이, 이성계의 책사는 정도전이었다. 역사학자들은 정도전을 ‘조선왕조의 설계자’라고 하는데, 그 설계를 바탕으로 이성계는 ‘무력’을 도구로 하여 ‘조선’이라는 왕조를 개창한 것이다.이성계는 고려에서 최영만큼 인정받는 최고의 무장이 되고 싶었다. 이러한 야심을 누구에게도 밝힌 적은 없었지만, 전장에 나갈 때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반드시 이기려고 이를 악물었다. 그는 결코 패장이라는 오명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전투란 상황에 따라 이기는 적도 있고 지는 적도 있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는 설사 패하여 후퇴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나중에 군대를 수습한 후 반드시 적의 허를 찌르는 기습공격을 가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백전백승의 장수로 명성을 얻었다. 특히 최영과 함께 출전할 경우 이성계는 더 많은 전공을 세우려고 노력했다. 최영은 대장군이고 이성계는 그의 휘하 장수였다. 그래서 이성계의 전공도 따지고 보면 최영에게 돌아가게 돼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성계로선 불만이 많았지만, 일단 최영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 것만으로도 내심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이성계가 최영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권력 기반을 다지게 된 것은 1388년(우왕 14년) 정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이인임 일파를 제거하는 데 큰 활약을 한 덕분이었다. 당시 우왕은 이인임 일파 몰래 최영에게 문하시중의 벼슬을 내리고, 남모르게 그들 세력을 축출해줄 것을 명령했다.
“대감께서 성균대사성에 천거해주신 데 대한 보답으로 시생도 선물을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내가 삼봉 선생께 변변한 선물을 드린 것도 아닌데, 그 보답을 가지고 오셨다고?”이성계가 이렇게 되물을 때, 정도전은 허리춤에 숨겨두었던 단도를 꺼냈다.이때 이성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상대를 지켜보았다. 정도전이 그 단도를 가지고 어찌하나 볼 심산이었다. 정도전은 곧 자신의 왼쪽 검지를 찔렀다. 피가 방울방울 솟아나자 그것을 이성계와 자신의 찻잔에 차례로 떨어뜨렸다.“이것이 시생의 선물입니다.”그러자 이성계는 왓핫핫핫, 하며 큰 소리로 웃었다. “과연 용사이시구려!”이성계는 정도전으로부터 단도를 건네받아 자신도 똑같이 왼손 검지를 찔러 서로의 찻잔에 핏방울을 똑똑 떨어뜨렸다. “이렇게 나누어 마시면 내가 삼봉 선생의 선물을 제대로 받는 것이 되겠구먼!”이성계는 핏물이 녹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정도전도 역시 자신의 찻잔을 들어 올려 건배하듯 잔을 부딪친 후 단숨에 들이켰다. “이제부턴 삼봉 선생이 아닌, 아우라고 부르십시오.”“삼봉 아우도 이제부턴 사사로운 자리에서 나를 형님으로 부르시게.”이성계는 정도전보다 나이가 다섯 살 위였고, 그들은 그렇게 의형제를 맺었다. 사실상 이성계는 자신을 도와줄 우군이 필요했다. ‘문무(文武)’가 갖추어져야만 천하를 얻는데, 그에게는 ‘무(武)’가 있을 뿐 ‘문(文)’은 부족하였다. 그는 바로 자신에게 부족한 ‘문’을 정도전을 통해 얻고 싶었던 것이다. 한나라 유방에게 ‘장자방’의 지혜가 필요했듯이, 그는 정도전으로부터 바로 그와 같은 것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우왕과 최영은 요동 정벌군 출정을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일단 팔군도통사 최영을 필두로 하여 좌우의 도통사 조민수와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 요동 정벌군이 서둘러 개경에서 출발하였다. 우왕도 정벌군을 따라 평양까지 갔다. 평양에 며칠 머물면서 모자라는 군사들을 더 징집하기로 한 것이었다. 마침내 1388년(우왕 14년) 4월 18일, 고려의 요동 정벌군은 평양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좌우 양군은 각기 3만 8천여 명으로, 약 8만에 가까운 병력이었다. 거기에 군량미를 나르는 후군으로 보급부대가 1만여 명까지 합하면 총 10만 가까운 병력이라 할 수 있었다. 이들 고려군이 타고 간 말만 해도 2만 두가 넘으니, 기마부대도 막강한 편이었다. 팔군도통사 최영도 좌우 양군을 지휘하여 요동으로 진군하려고 하는데, 이때 우왕이 선뜻 나서며 말했다. “경까지 출동하면 누구와 정사를 나누란 말이오? 더구나 장군은 노령이라 전장으로 나가는 것이 심히 우려되는 바이오.”그러자 최영도 남쪽의 왜구를 경계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요동 정벌에서 일단 빠졌다. 소가 웃을 일이었다. 삼척동자가 보아도 왜구 경계는 이유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엄광용
1990년 <한국문학> 신인문학상 중편소설 당선. 1994년 삼성문예상 장편동화 부문 수상. 류주현 문학상 수상.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및 단국대 대학원 박사과정 사학과 수료. 소설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 장편소설 <황제수염>ㆍ<사냥꾼들>ㆍ<사라진 금오신화>ㆍ<천년의 비밀>, 대하소설 <광개토대왕 담덕>, 동화집 <초롱이가 꿈꾸는 나라> 등 출간. 현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연구원.
목차
머리말
1. 신궁수
2. 군부의 두 수장
3. 대풍가
4. 지는 해, 솟는 태양
5. 출병
6. 위화도 회군
7. 권력 장악
8. 신진사대부의 대립
9. 낙마 사고
10. ‘하여가’와 ‘단심가’
11. 역성혁명
12. 한양 천도
13. 왕자의 난
14. 태상왕
소설 이성계 해설
이성계 연보
소설 이성계를 전후한 한국사 연표